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5화 (25/271)

25 : 2주 전, 강서현

“그게 무슨 말이냐?”

강민철 회장이 물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손녀의 얼굴이 있었다.

“제가 직접 들어가 모시고 싶다고요.”

중앙그룹 강민철 회장은 잠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둘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이 녀석아.”

“아파요. 진짜 아파.”

“그럼 아프라고 때렸는데.”

강서현은 예쁘게 얼굴을 찡그리며 꿀밤 맞은 부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강민철 회장은 그런 강서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서현아.”

“네. 할아버지.”

“이 할애비는 어르신과 작은어르신을 모시는 종이라는 것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들 것이라는 사실도 나는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네.”

강서현은 머리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할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분들이 원하지도 않으시겠지만, 혹여라도 그분들이 너를 내어놓길 원하신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거부할 것이다.”

강서현의 눈이 커졌다.

“거부한다고 해도 저항할 수 없겠지. 그러나 저항할 것이다. 내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하신다면 나는 기쁘게 목숨을 내어 드릴 것이다. 그러나 서현이 너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손주를 내어놓으라고 하신다면, 나는 거부할 것이다. 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것이다.”

“…….”

“내 사랑하는 손녀 서현아.”

“응….”

“가업이 강요되던 시기가 있었다. 어르신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재산이나, 명예나, 사랑하는 가족까지 모든 것을 내어놓던 시기가 있었다.”

“….”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 그런 시대가 아니다. 어르신께서 더 이상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어르신…께서요?”

“그래. 그분께서, 그분께서는 종복들에게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고민하기를 원하셨다. 생각 없이 지시에 따르는 노예나 하인이 아닌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의 뜻에 따라 내 모든 것을 그분의 의지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너 하나만은, 내 사랑하는 손녀 강서현 하나만은 내어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애초에 넌 내 것이 아니니까. 너는 나에게 찾아온 아주 소중한 생명이자 기쁨이지, 물건처럼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할아버지….”

강서현은 가슴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의 파동을 느꼈다.

세계적 대기업 총수, 한국 경제의 한 기둥이라고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언제나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며 안아주던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지금도.

“그러니. 원치 않는 의무감으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억지 의무감으로 작은어르신을 모신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려무나. 이 할애비가 너무 가슴이 아프다.”

강서현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앉으며 꼬옥 안아주었다.

“나는 참 행복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할아버지의 손녀라서.”

“그래. 나도 그렇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한 아가씨가 내 손녀라니.”

강서현은 그렇게 한참 동안 할아버지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한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그런데, 제가 작은어르신과 함께하겠다는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라니? 무슨 말이냐?”

“가업이라는 굴레.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아니에요. 이건 순전히 제가 원해서,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에요.”

서현의 말에 회장님은 말없이 굳어 버렸다.

항상 애기 같기만 하던 손녀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강민철 회장은 잠시 동안 말없이 강서현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니?”

강서현은 그런 할아버지에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죠….”

***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 강민철 회장은 서재에 앉아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강 회장은 11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수많은 결정을 해야 했고, 밤이라는 시간은 결정하기에 그리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강 회장은 밤시간에 무언가를 고민하거나 결정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하지만, 이날, 강민철 회장은 서재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낮에 손녀가 했던 이야기를 계속 몇 번이나 반복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이다.

강서현이 강 회장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강서현의 아버지, 강 회장의 맏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은 강서현이 세 살 되던 해였다. 유럽 출장 중에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참혹할 慘에 슬플 慽 자를 사용해 참척(慘慽)이라고 했다. 부모 된 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바로 참척이었다.

강 회장이 처음 그 비보를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시신 없는 빈소에서 감정을 숨긴 채 문상객을 맞이하면서, 아들을 잃고, 울다가 눈이 멀었다는 자하의 고사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전쟁 중에 아들을 잃은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썼던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이거늘’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때, 강 회장의 눈에 강서현이 보였다.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맞지도 않는 검은 상복을 입고서, 앞으로는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어서.

강서현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강 회장은 손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할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 중앙의 총수,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인,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강민철 회장이었지만, 손녀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는 손녀의 어리광에, 어르신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한 것이.

신기하게도 손녀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해달라고 졸라대고는 했었다.

그런 손녀가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안쓰러워서, 강 회장은 손녀에게 어르신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해주었다.

그 이야기 중에 작은어르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작은어르신. 주민등록상 생년월일로 따지면 손녀보다 두 살 아래의 작은어르신과 손녀는 같은 시간대를 살았다.

손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작은어르신도 초등학교를 다녔고, 손녀가 중학교 졸업반일 때, 작은어르신도 중학교를 다녔다.

작은어르신이라는 신비의 존재가 자신과 같은 나이대라는 것이 신기해서였을까?

손녀는 작은어르신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강 회장의 청각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

강 회장이 그렇게 말하자 서재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불이 켜져 있기에.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양복을 입은 청년이 열린 문으로 들어온다.

“잠깐 생각 좀 하다 보니. 이제 들어 온 것이냐.”

강 회장이 청년에게 물었다.

“귀국은 오후에 했습니다만,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강 회장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자상한 목소리로 청년에게 그렇게 말했다.

강우현, 제 아비를 꼭 빼닮은 강 회장의 장손자. 언젠가 강 회장의 뒤를 이어 중앙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 맏아들이 남겨두고 간 보물.

“서현이가 말썽을 부렸나 보군요.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을 보니.”

강우현은 그렇게 말하며, 강 회장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강 회장이 물었다.

“그때도 같은 표정이셨으니까요.”

“그때?”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있던 서현이가 미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입니다.”

강우현이 말했다.

강 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강우현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강서현은 자신도 오빠처럼 고등학교부터 미국에서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강 회장의 손녀는 손자만큼 똑똑했고, 공부도 잘했으며, 성실하고 착했다. 중앙그룹 회장의 손녀인 만큼 돈을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강 회장은 손녀를 미국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쫓아내듯 바로 미국으로 보내버리시고서는, 서현이가 간다고 하니, 걱정을 많이 하셨었죠.”

강우현이 옛날 생각이 나는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섭섭했느냐.”

강 회장이 물었다.

“사실 저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힘들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강우현의 대답이었다.

손자는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꼈다. 아버지를 잃고 난 이후부터 더욱 그랬다. 고작 열세 살에 불과한 강우현은 마치 여동생을 자기가 지켜 내겠다는 듯, 어디를 가든 항상 여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렇게 동생과 떨어진 손자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항상 여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치, 자신이 아버지의 빈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듯.

재벌가에서는 보기 드문 의좋은 남매였다.

“서현이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우현이 물었다.

강 회장은 그런 강우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작은어르신을 모시겠다는구나.”

그 말에 강우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런 대답에 강 회장이 손자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동생이라면 죽고 못 사는 녀석이었다. 그런 손자 녀석이 이렇게 쉽게 납득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냐?”

강 회장이 물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예상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세뇌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강우현은 그렇게 말하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내 잘못인 건가.”

“네. 할아버지 잘못입니다.”

강우현이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강 회장은 그런 손자의 얼굴을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찌해야 하겠느냐?.”

강 회장이 물었다.

사실 눈앞에 손자 말고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룹 내에서 어르신과 작은어르신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강 씨 일족만은 아니었다.

일족임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고, 일족이 아니지만, 어르신과 작은어르신의 존재에 대하여 아는 사람도 있었다.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몇몇 소수의 최고위급 임원들이었다.

하지만 어르신과 작은어르신의 존재에 대해 안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손녀와 관련된 문제를 상담할 수는 없었다.

어르신, 작은어르신, 그리고 사랑하는 손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눈앞의 손자가 유일했다.

“서현이를 믿어보시죠.”

강우현의 대답이었다.

“믿어보라?”

“똑똑한 녀석입니다. 현명하게 행동할 겁니다.”

강 회장은 손자의 대답에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녀가 처신을 잘못하리라 생각하기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작은어르신이었다.

아무리 작은어르신이라고 해도, 생물학적으로는 이제 스물한 살의 신체를 가진 청년이었다. 혈기 왕성한 청년과 손녀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강 회장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강우현이 말을 이었다.

“그럴 분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서현이를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닙니다.”

“….”

강 회장은 말없이 손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의 핏줄이기에, 그렇기에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판단이라는 말이냐?”

“네. 제가 지켜본 바로는 서현이에게 몹쓸 짓을 하실 분은 아닙니다.”

강 회장도 작은어르신을 지켜보았다. 아니, 지켜본 시간만으로 따진다면 손자인 강우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보았다.

요즘 아이들과는 다르게 진실한 청년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강 회장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 한수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본인이 신격(神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었을 때도, 과연 그러한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한 사람의 할아버지로서 그런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미국에서의 일. 기억 나십니까?”

“미국…. 말이더냐.”

“서현이, 그 녀석 좋다고 얼마나 많은 놈들이 달려들었습니까? 그 중에서 서현이 마음을 얻기는커녕 흔들기라도 했던 녀석이 어디 한 명이나 있었습니까?”

손자의 말에 강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서현은 남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현이, 그 녀석이 작은어르신을 쥐고 흔들었으면 흔들었지, 절대로 쉽게 휘둘릴 녀석이 아닙니다.”

“…그래. 일단 생각을 좀 더 해보자꾸나.”

강 회장은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몇 시간의 고민으로 결론 낼 사항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낸 손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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