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Home과 House의 차이 (3)
언제나처럼 인문관 올라가는 길가 벤치에 앉아서 나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의 어깨에 팔을 척 하니 올린다.
“야. 괜찮냐?”
옆을 보니 어김없이 박승환이다.
뭐야. 이 자식 뭐야? 나한테 GPS라도 달아 놓은 거야?
“뭐가?”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생각할 거 많은데 이 자식 타이밍 그지같이 들어오네.
“괜찮아. 원래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박승환이가 내 어깨에 두른 팔을 풀고 팔짱을 끼면서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딱 개소리할 때 포즈다.
“나무가 말이지?”
박승환이 입을 연다.
“나무?”
“한 그루의 묘목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성장할 때 필요한 게 뭔 줄 알아?”
역시, 개소리가 맞군.
하지만 계속 들어 본다. 어떤 신박한 개소리를 할지 궁금하니까.
“가지치기가 필요해.”
“무슨 헛소리야.”
“일단 들어 봐. 가지치기. 뭔지 알지? 가지를 주기적으로 잘라 줘야 나무가 클 수 있어. 그런데 혹시 다칠까 봐, 나무가 아플까 봐 가지를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 그 나무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말라 죽어 버리는 거야.”
“야. 뭔 헛소리냐고.”
“그래. 알아. 안다고. 너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
안다고? 내가 무슨 고민하는지 안다고?
이 자식이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뭘 고민하는데?”
“가지를 칠 때는 가지를 확실하게 쳐야 하는 거야. 그런 아픔이 있어야 거목이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다 말려도 난 너의 결정을 지지한다.”
“내 결정? 내 결정이 뭔데.”
“휴학. 그리고 입대.”
…역시 개소리였어.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책하지 마라. 입대하고, 단체 생활하면서 같이 땀 흘리고 전우애를 느끼다 보면, 어느샌가 구릿빛 피부처럼 강하게 단련되어 있는 너를 보게 될 거야.”
“…….”
“신지수. 지금은 괴로운 이름이겠지만, 나중에 분명 웃으며 회상할 날이 올 거다.”
참…. 대단하다, 이놈도. 어쩌면 이렇게… 똥촉이냐.
***
-저녁 드시고 오시나요?
서현 님의 깨톡.
‘아니요. 오늘 일찍 들어가려고요.’
이건 내 깨톡.
-혹시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세요?
‘서현 님.’
-네.
‘오늘 저녁. 제가 준비해도 될까요?’
-작은어르신께서요?
‘네.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안 그러셔도 돼요.
‘아니요. 대접받는 거 미안하고 그래서 이런 말씀 드리는 거 아니에요. 제가 오늘은 꼭 저녁을 준비하고 싶어서요.’
-그러시다면…….
‘감사합니다. 오늘 언제 들어오세요?’
-저는 지금 집에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따가 봬요. 늦지 않게 갈게요. 아! 그리고 혹시 매운 음식 괜찮으세요?’
-매운 거요? 네. 괜찮아요.
‘넵. 그럼 이따가 봐요!’
오케이. 판은 다 만들어졌어.
하루 종일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서현 님에게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말이다.
남자는 직진 승부야! 가는 거야!
***
양손에 짐을 들고 있는 내가 주상복합 로비로 들어서자 보안팀 잘생긴 남자 직원이 나에게 다가온다.
“배달이신가요? 인포 데스크에 맡기시고 몇 호인지 알려 주시면 저희가 전달하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없어 보여서 죄송합니다.
“저 41층….”
“저 말고 인포 데스크에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서 웃는다. 친절한 웃음이다. 사람을 하대하는 느낌의 웃음은 아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군.
왜 그런 놈들 있잖아. 명품 매장에서 일한다고, 자기도 명품인 줄 아는 그런 바보들.
“그게 아니고. 저도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네?”
나는 짐을 내려놓고 서현 님이 선물해 주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보였다.
“저 여기.”
남자 직원은 카드를 보고,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카드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아니. 괜찮아요. 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리고 저라도 저보고 배달부 같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당연한 이야기다. 양손 가득 짐 들고 온다고 땀에 흠뻑 젖었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남자 직원이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인다.
이 정도로 사과할 일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하지는 않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민주주의의 시대, 신분은 없어졌어도, 계급은 남아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자 직원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계속 조아리는 모습을 보았는지,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다가왔다.
비싼 집이어서 그런지 남자 직원은 다 몸 좋고 잘생겼고, 여자 직원은 방송국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다들 예뻤는데, 이 아저씨는 좀 무섭게 생겼네.
가슴에는 보안팀장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중앙그룹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보안팀장은 다들 ‘얼굴에 위압감이 느껴질 것’이라는 필수 조건이 있나 보다.
“저. 그게….”
남자 직원이 보고를 하려고 한다.
내가 또 그런 건 못 참지.
“제가 짐 들고 가는데 무거워 보인다고 도와주신다고 하셔서요. 제가 괜찮다고, 운동 삼아 들고 간다고 하고 말씀드리던 중이었습니다.”
내가 보안팀장이라는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흐미. 이 양반 눈빛도 무섭네.
나는 당황해하는 남자 직원에게 작게 윙크를 하면서 말했다.
“친절히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말고, 저희 집에 그…… 도…… 동ㄱ… 저희 누나, 누나 장 봐 올 때는 좀 도와주세요. 엄청 이쁜 누나. 41층.”
“아… 알겠습니다.”
남자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엘리베이터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무서운 얼굴의 보안팀장이 내 짐 하나를 들고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괜찮은데. 저 주세요.”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들어 드리겠습니다.”
보안팀장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 씨. 그 냥반 기세하고는.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네.
“얼마 전에 41층으로 오신 분 맞으시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무서운 얼굴의 보안팀장이 말을 건넸다.
“네. 맞습니다.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제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보안팀장 박종대라고 합니다.”
“팀장님이시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이 열렸다. 팀장님은 엘리베이터 밖에서 나에게 짐을 건네주셨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타이밍 좋게 문이 닫혔다.
감사해? 뭘? 뭘 감사해?
***
문이 열리자 어김없이 현관 앞에 풀 메이크업에 풀 착장을 갖추신 서현 님이 서 계신다.
“다녀왔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어머? 그건 다 뭐예요?”
“오늘 저녁밥이요.”
“저녁밥이요?”
“네.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제가 저녁 만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저 금방 씻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저녁 식재료를 재빨리 부엌에 가져다 놓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 와중에 소파 위에 놓여 있는 서류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기필코.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잡았다.
재빠르게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부엌으로 갔다.
서현 님은 부엌 입구에 서서 과연 나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지 고민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훗. 이 나를 의심하는군.
“잠시만요. 잠시만 앉아 계세요. 앉아서 기대하고 계세요.”
나는 그녀의 등을 밀면서 거실로 몰아냈다.
첫… 첫… 첫 스킨십이다. 우후훗.
부엌으로 들어온 나는 본격적으로 앞치마까지 매고 요리를 시작했다.
사실 요리라고 이름 붙일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기필코 성공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 물을 올리고, 재료를 썰고, 분말을 물에 개고 하면서 열심히 요리를 시작했다.
과연 맡겨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늘은 무시하기로 했다.
오늘은 내가 주도한다.
슬슬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서현 님도 어떤 요리인지 아시겠지.
실망이 크시려나?
아니야. 나를 믿자. 나의 미각을 믿자.
무엇보다 이 요리는 검증된 요리 아니던가.
잠깐만. 생각해 보니 검증이라고 해 봤자 할아버지와 고등학교 친구 놈들뿐이잖아.
믿어도 될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냥 가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1시간 동안 뚝딱뚝딱해서 요리를 완성했다.
맛을 한번 볼까?
음. 괜찮군.
뭐. 한두 번 만들어 본 것도 아닌데. 이 정도쯤이야.
자. 이제 평가의 시간이다.
“서현 님. 식사하세요.”
거실 소파에서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던 서현 님이 식탁으로 오셨다. 그리고는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을 놀란 눈으로 보면서 말씀하신다.
“카레…네요.”
뉘앙스 미묘하네. 놀라움은 확실하고, 다른 감정은 감탄? 아니면 실망? 설마 경멸은 아니겠지?
“넵. 카레. 괜찮으세요?”
그렇다. 내가 준비한 음식은 카레.
잠깐, 잠깐. 지금 그냥 카레라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건 우리 집 비전 음식. 튀긴 물만두 카레덮밥이다.
카레에 들어가는 채소는 최대한 박살내서 아예 형태를 남기지 않는다. 가루와 채소가 반액체 상태로 걸쭉하게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건더기는 없나?
아니다.
튀긴 물만두가 바로 식감을 책임지는 건더기 역할을 한다.
물만두를 재빠르게 삶는다. 속이 살짝 안 익을 정도로만 살짝 데치고, 재빨리 건져 고추기름에서 재빠르게 튀긴다.
이 부분이 포인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이상적인 상태로 튀기는 것이 포인트다.
조금만 잘못하면 속은 무르고, 겉은 딱딱한 물만두 모양의 쓰레기가 된다.
내가 그거 많이 먹었지…. 연습하다 하도 실패해서.
아무튼. 내 회심의 요리다.
“실망하셨나요? 대접해 드린다고 해 놓고서는 고작 이거라서.”
“아…… 아니에요. 조금 놀라서.”
“놀라셨다고요?”
“네. 작은어르신께서 요리를 잘하시는 줄은 몰라서.”
후.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나는 집사처럼, 물론 항상 집사처럼, 하인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 의자를 빼 주고, 물도 한잔. 따라 드린 다음에야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럼 드셔 보실까요?”
“아… 네.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숟가락을 들어 카레와 밥을 살짝 비볐다. 그리고 작게 한 입 떠서 그 아름답고 작은 입에 넣었다.
아, 진짜. 너무하네. 너무 예쁘게 드시네. 우리 서현 님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맛있어요.”
들었느냐? 남자의 자존심이 세워지는 소리를.
아니. 너 말고. 너 서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임마!
자존심. 자존심 말이야.
서현 님은 이번에는 만두를, 카레 범벅이 된 물만두를 숟가락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또 오물오물.
이쁘다. 진짜 이쁘다. 맨날 짐승처럼 밥을 먹는 건지, 마시는 건지 모르는 동기 놈들이랑 밥을 먹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분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뭔지 알겠다는 아까 했고.
아무튼, 정말 아름다우시다.
그런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찡그려졌다.
“…맵네요.”
맵죠. 카레도 맵고, 들어간 재료도 맵고, 만두도 고추기름에 튀겼으니까요.
“하지만…… 맛있어요.”
그렇죠. 그게 포인트입니다. 맵지만 맛있다.
매운맛은 통각이다. 아픈 감각이다.
하지만 이 카레를 먹는 사람들은 매운 걸 알면서도 계속 카레를 먹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 자신작이니까. 음하하하하.
얼굴을 찡그리며, 어쩌면 찡그려도 저렇게 이쁠까.
얼굴을 찡그려 가며 물을 마셔 가면서도 계속 숟가락을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나도 내 비장의 음식에 숟가락을 가져간다.
아 씨. 맵긴 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