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 마음 따스해지는 이야기 (4)
“친척 집?”
박승환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봤다.
내가 한 설명은 이렇다.
얼마 전에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호출당해서 내려가지 않았냐.
그때 내려가서 친척 어르신…… 같은 분을 소개 받았다.
그랬는데, 친척 어르신…… 같은 분께서 서울에 혼자 올라와 있는 나를 보니 걱정이 되어서 기왕이면 같이 살자고 이야기를 하셨고.
나는 알았다고 했는데, 뭔가 커뮤니케이션상 오해가 생겨서 갑작스럽게 짐을 빼게 됐다.
약간 이상하긴 하지만 거짓말한 건 없지. 그럼.
“친척 집이 어딘데?”
“서. 성수동.”
성수동 맞기는 맞지.
“아. 거기. 공장 많은 데? 아니구나. 지금은 공장 다 없어지고 거기 겁나 힙해졌다고 하던데.”
공장이고 힙한 데고 없지 않나? 서울 숲밖에 안 보이던데.
“나 어릴 때 성수동 살았거든. 예전이 진짜 개판이었어. 거기 진짜 차도 많고, 먼지도 장난 아니었다니까. 성수동 어딘데? 성수역 근처?”
“성수역은… 아닌데. 뭐… 뭐 비슷하려나?”
“지하철 타기는 편하겠네. 하지만 성수역에는 사람이 겁나 많지. 말 그대로 지옥철이지. 오늘 어떠하더냐? 꽉꽉 미어터지지 않더냐?”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달까.
사실 잘 기억 안 난다. 아침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뭐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그… 그래. 많더라.”
뭐. 이로써 오해는 풀렸나. 아니다. 하나 궁금한 게 남았다.
“그런데 말이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응? 뭐가?”
“왜 갑자기 내가 사채업자에게 끌려갔다고 소문이 난 거지? 하룻밤 사이에?”
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꺼냈다.
내가 뭐 좀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친구가 엄청 많고, 선후배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고 이런 건 아닌데.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소문이 빨리 난 거지?
“뭐? 그거? 야. 아니, 오해가 다 풀렸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맞다. 통장. 통장 내놔.”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돌리는 박승환은 아직 내 손에 있던 통장을 낚아챘다.
“휴우~ 다행이다. 내년 여름에 갈 수 있어. 기다려라! 이비자!”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박승환이를 바라보았다. 이비자를 위해서라면 이 녀석을 못가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는데?”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을 위해서라면, 이 자식이 이비자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아무튼, 그나저나, 그건 그거고. 계속 의문을 풀어 가 보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뭐 어젯밤 이삿짐센터……분들이 좀 시끄럽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분들이야 이삿짐센터라고 옷도 입고 있었을 텐데. 왜 사채라고 소문이 난 거지?”
내가 박승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밥. 밥 먹었냐? 야. 그 쓰레기 같은 식권은 당장 버려 버리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이비자 갈 수 있게 된 기념으로 쏠게. 학식 말고 밖에서 쏜다!”
방금 이 자식은 진철이 형의 따스한 마음을 쓰레기 취급했다. 천벌 받을 자식.
그건 그렇고. 자꾸 말을 돌리는 게 수상쩍은데….
“저기요. 박승환 씨.”
“네? 넵!”
“어제 혹시 게임방에서 말이죠.”
“아. 배고픈데. 맞다. 나 수업인갑다.”
“배고픈 건 참고. 수업은 2시간 있다가 나랑 같은 수업.”
“배고픈 거 참으면 병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박승환이.”
“넵!”
“어제 게임방에서 나와 헤어진 이후의 행적을 말해 보실까?”
***
역시. 범인은 박승환 이 자식이었다.
게임방에서 심각해 보이는 전화를 받고 나가는 나를 보면서 이 자식은 농담 식으로 사채꾼에게 장기 팔러 갔다고 애들에게 이야기했나 보다.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하숙집에 들이닥친 이삿짐센터 직원들에 의해 사채설이 신빙성을 얻기 시작했고, 주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검은 양복 변호사 때문에 사채설이 확정되어 버렸다.
하숙집에서 묵고 있던 몇몇 친구들이 사실 확인 없이(할머니에게 물어보면 바로 알 텐데) 이야기를 확대했고, 결국 밤사이에 나는 사채꾼에게 끌려가고, 채무는 수천만 원대로 늘어나고. 뭐 그랬다는 이야기.
결국, 이 사건의 시작은 저놈, 박승환의 입방정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닷!”
번개같이 고개를 숙이는 저놈의 정수리를 엘보로 찍어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뭐 8백만 원을 들고 온 그 정성을 봐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시는 입방정 떨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뭐 진짜 사채업자가 껴 있는 사건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사실도 아니고, 그냥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덕분에 진철이 형이나 이 자식의 마음도 알게 되고,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나저나. 그냥 통장 받아둘 걸 그랬나. 생각하니 또 아쉽네.
그런 생각으로 박승환의 손에 들린 통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일순간 박승환의 표정이 굳는다.
“그 새끼 차네.”
승환이의 시선이 향한 곳에 독일제 스포츠 쿠페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제처럼 빠른 속도로, 어제와 같은 사람을 태우고. 어제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새끼 저거, 속도 내는 거 봐라. 저러다 사람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박승환의 대사도 어제와 똑같고.
그러나 나는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지나가는 차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
“승환아.”
“어?”
“너 차에 대해서 잘 아냐?”
“차? 무슨 차.”
“저 차. 비싸냐?”
“비싸냐고? 음…… 뭐 비싸지. 비싼데… 뭐 들어서 기분 좋을 이야기도 아닌데.”
“얼만데?”
“왜?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냥. 궁금해서. 얼만데?”
“뭐… 저거는. 넌 모델명도 모르지. 아우디 A5인데 신차가가 한 6천 정도 할 거야. 거기에 옵션 붙이고 튜닝하고 그러면 한 7천, 8천? 그 정도?”
박승환이 사라지는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말한다.
소문에는 1억을 넘는다 어쩐다 하더니, 그 정도는 아니었군.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모습이 어딘가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승환이가 말을 보탰다.
“야. 부러워할 거 없어. 무슨 대학생이 8천만 원 넘는 차를 타고 다니냐? 저거 다 자식 망치는 거야. 자식에게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고, 사 달라는 거 다 사 주고. 그러면 그놈의 자식이 그걸 고마운 걸 알겠어? 자고로 첫 차라는 것은 말이지. 노동법 위반이 다반사인 곳에서 최저 임금 미만의 알바비를 받아 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들고 중고차 매장에 가서 딜러에 현란한 말솜씨에 속아 침수된 차를 사 오는 것도 모르고 신나서 날뛰다가 안전벨트를 쫙 뽑았을 때, 흙탕물이 잔뜩 묻어 있는 벨트를 봐야 하는 거야.”
“…….”
나는 말이 없었다. 그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아침밥을 다 먹고, 가방을 챙긴 나는 서현 님이 뒷정리를 하고 있는 부엌 쪽으로 인사를 했다.
뒷정리는 내가 하겠다는 데에도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며 내 등을 밀어낸 서현 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까 봐 차마 얼굴 보고 인사를 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는 아니고, 그저 조금 쑥스러워서.
“어머. 작은어르신. 잠시만요. 3분만요.”
내 목소리를 듣더니 서현 님이 부엌에서 뛰어나오신다.
“네? 네.”
“저랑 주차장에 같이 가요. 차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실 테고.”
“네?”
“잠시만요. 금방 나올게요.”
서현 님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려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강력한 두 글자가 떠올랐다.
투! 시!
투시. 막고 있는 무언가를 무시하고 그 뒤에 숨겨진 진실된 면을 보는 것.
예를 들어, 저 문 뒤에 있는 진실된 서현 님이라든가, 옷이라는 거짓 뒤에 있는 진실된 서현 님이라든가…….
“죄송해요. 내려가실까요?”
서현 님은 금방 나오셨다.
당연했다. 이미 풀 착장을 하고 계시지 않으시던가.
다행입니다. 이 죄 많은 놈이 더 죄를 쌓기 전에 나와 주셔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상황에서도 서현 님은 뭐가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런 서현 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나는 바보 같은 웃음을 보이게 될까 봐 마주 바라보지 못하겠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들이 들어왔다.
어제 서현 님이 삼각별 달린 차가 내 차라고 하셨지? 근데 뭔 놈의 주차장에 삼각별 달린 차가 이리도 많아?
국민 세단이라는 소나타나 그랜다이저보다 삼각별 달린 차가 더 많다. 아니, 소나타는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서현 님의 뒤를 따랐다. 내 차라고 하는 차가 어디 있는 거야?
“이 차입니다.”
서현 님이 한쪽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차량으로 다가갔다.
서현 님이 다가가자 마치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듯, 전면 그릴에 삼각별 달린 차량의 전조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사이드미러가 펴졌다.
삼각별은 삼각별인데 차가 그리 크지를 않구나. 난 또 삼각별이라고 해서 막 어마무시하게 비싼 그런 녀석일까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차가 날렵하게 생긴 것 보니 주차하기는 편하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차가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어쭈? 나 무시해? 나 그런 차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차…. 이름이 뭔가요?”
내가 물었다.
“AMG GT63S입니다.”
서현 님이 말했다.
***
“아니. 꼭 침수 차를 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야. 그저. 뭐랄까. 그렇게 첫 차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차에 대한 애정도…….”
“승환아.”
“어?”
“삼각별 AMG GT라는 차 아냐?”
“알지. 그건 왜?”
“뭐가 더 비싸냐?”
“뭐랑? 저 개자식 차랑?”
“응. 저 차랑.”
“삼각별 AMG GT는 모델이 두 개인데?”
“63S.”
“AMG GT63S? 그건 2억이 넘어!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야. 유치원생과 대학생의 차이, 아니. 유치원생은 심했나? 중학생과 대학생, 그 정도면 되겠다.”
승환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야. 한수야. 그래. 뭐. 니 마음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닌데, 너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
“가자. 밥 먹으러.”
내가 말을 끊었다.
“어? 어어. 그래. 가자. 밥 먹자. 열 받을 때는 뭐 먹으라고 그랬어. 뭐 먹을래? 내가 쏜다.”
“아니. 내가 산다. 오늘은. 이긴 기념으로.”
나는 식당 쪽으로 몸을 돌리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이겨? 뭘 이겨? 그건 뭔 개소리야? 야. 문맥에 맞는 말을 해야지. 야. 임마. 기다려.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