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6화 (16/271)

16 : 마음 따스해지는 이야기 (2)

흔히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공간을 부엌, 또는 주방이라고 부른다. 요즘에는 그 장소에 식탁을 놓고, 밥을 먹기도 해서 다이닝 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장소를 과연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화려하다. 거어어어업나 화려하다. 무슨 부엌이 이렇게 화려해?

부엌도 부엌이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식탁도 그렇다. 대리석 식탁 말로만 들어 봤지, 진짜 이런 게 진짜 있기는 있구나.

여덟 명은 충분히 앉고도 남을 대리석 식탁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비싸겠지. 이거 분명 비쌀 거야. 내 등록금 정도는 우습게 뛰어 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쓰윽 하고 만져 본다.

내 거처라고 했지. 그러니 앞으로 여기서 밥을 먹게 된다는 말인데, 이거 소화가 되려나 모르겠네.

라면 같은 거 끓이면 식탁이 이놈! 감히 내 위에 어디 라면 냄비를 놓는단 말이냐! 하면서 소리 지를 것만 같다.

“죄송합니다. 장 본 게 별로 없어서 제대로 아침 준비를 못 했습니다.”

서현 님은 식탁 위에 몇 종류의 빵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제대로 된 아침 준비를 못 했다…라고요?

바게트와 크루아상은 알겠는데, 나머지는 모르겠다. 저런 빵도 있었나?

빵뿐만이 아니다. 세 종류의 잼, 꽃 모양으로 커팅된 커터가 이름 모를 빵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마실 것도 한 종류가 아니다. 어제 마신 생과일주스, 녹즙으로 예상되는 정체불명의 독극물, 흰 우유, 갓 내린 커피, 그리고 여러 종류의 티백과 다기 세트.

끝이냐고? 아직 남았다.

소 한 마리가 씹어 먹으라해도 반나절은 걸리고도 남을 만큼의 거대한 샐러드 보울, 그리고 각종 드레싱.

제대로 된 아침을 준비하지 못했다면서요? 도대체 강씨 집안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아침은 무엇입니까?

드라마에서도 재벌 집 회장님도 아침엔 그냥 밥에다가 국에다가 그렇게 드시던데.

“앉으세요. 일단 드세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믈렛을 식탁 위에 올린다.

저게 오믈렛이야, 계란말이야? 계란 열 개는 들어갔겠다.

나는 어색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어머. 이 의자 푹신한 거 봐라.

내가 자리에 앉자 서현 님이 직접 컵과 포크, 나이프를 놓아 주셨다.

“내일 부터는 제대로 아침 만들어 드릴게요.”

“아… 아하하…… 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 빵을, 아니, 빵들을 바라보았다.

종류가 많으니 손이 안 간다. 그냥 식빵에 딸기잼 하나 있으면 고민할 것도 없건만.

“드셔 보세요. 아침에 구웠으니 괜찮을 거예요.”

구웠다고? 아침에 구웠다고? 사 온 게 아니고?

나는 크루아상 하나를 집어 들며 슬쩍 부엌을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저기 있는 저거, 오븐이야? 일반 가정집에 빵집에나 있을 법한 크기의 오븐이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크루아상에다가 버터를 바른다.

아침엔 국에 말아서 대충 우걱우걱 먹고 나오는 게 짱인데.

갑자기 그립네. 하숙집 할머니 밥이.

“작은어르신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버터 바른 크루아상을 입에 넣고 씹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서현 님께서 물어보신다.

“네?”

“음… 그러니까 큰 카테고리로 구분하면 한식, 양식, 일식, 중식 중에서 어떤 종류를 가장 선호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아. 뭐. 전 아무거나.”

내 말에 서현 님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그러지 마요. 빵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제일 어렵고 힘 빠지는 말이 ‘아무거나’랍니다.”

마치 유치원생을 가리키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미소로 말씀하신다.

“…죄송합니다.”

빠른 사과. 빠른 사과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다.

“말씀해 주세요. 뭘 좋아하시는지. 아니면 어떻게 드셨는지.”

밥 안 먹고 저 얼굴만 보고 있어도 배부르겠다.

서현 님이 만들어 주시는 거라면 다 좋죠!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이지.

사실 좀 과하다. 음식 종류가 아니라, 양이 문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력이 문제다.

“음. 평소에는. 그러니까 하숙집에서는 할머니가 차려 주셨으니까 그냥 차려 주시는 거 먹었고요. 보통 국 하나에 반찬 두세 개, 김치까지 네 개. 그렇게 먹었어요.”

“한식. 국 하나에 반찬 세 개요.”

서현 님은 그렇게 내 말을 다시 반복하면서 휴대폰에 저장한다.

아니. 그게 뭐 써넣고 할 정도의 정보는 아닌데 말이죠.

“아니. 꼭 한식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요. 하숙집은 밥 먹는 사람이 많으니까. 할머니가 밥하고 국 끓여 놓으시면 각자가 퍼다 먹는 그런 시스템이었거든요. 반찬도 냉장고에서 꺼내 먹고.”

나는 포크로 오믈렛을 갈랐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숙 오믈렛 안에는 치즈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양식도 좋아요. 좋은데.”

“좋은데요?”

“음…… 그러니까. 솔직히 오늘 아침은 좀 많이. 그 뭐랄까.”

“괜찮아요. 편히 말씀하세요.”

아…… 서현 님. 거울 안 보시죠? 거울 좀 보세요. 그 얼굴, 그 표정, 그 미소 앞에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남자는 없어요. 그럴 수 있는 XY 유전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하하. 네. 오늘은 좀 많네요. 양도, 종류도.”

“그게.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감사해요. 신경 써 주셔서.”

“아니에요. 많이 부족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 이제 우리 같이 사… 사… 사는 거니까.”

진정해라, 한수 이놈아. 그리고 미니미 이 자식아! 너도 진정해! 단어 하나에 흥분하지 마!

“편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서현… 님도. 아침마다 이렇게 준비해 주시면 저도 불편하고, 서현 님도 고생스럽고.”

“고생스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 저만 불편한 것으로 할게요. 다음부터는 그냥 조금만 가볍게.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서현 님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아… 적응 안 되는구먼.

“음. 그건 그렇고. 장 봐야 한다고 하셨죠?”

“네. 급하게 준비하느라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그럼 같이 갈까요? 오늘 저녁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이야기… 말씀이신가요? 어떤?”

“아. 그. 뭐랄까. 이제 같이 사… 사… 살게 됐는데.”

진정해! 서지 마!

“저기. 그. 서로 이제 합의해야 할 부분도 이야기하고. 그 뭐 프라이버시라든가.”

“작은어르신께서는 그런 것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계시면 되는데.”

“그 ‘작은어르신’부터 불편한데요. 서로 호칭도 그렇고. 그런 부분에서 좀 이야기를 나눌…까 싶은… 뭐… 그런….”

뭐야. 이거. 내가 작업 거는 것 같잖아. 너무 저자세인 것 같잖아. 너무 비굴한 것 같잖아!

어쩔 수 없다. 서현 님 앞에서 나는 영원한 을이 될 터이니.

갑질 해 주세요. 영원한 갑이 되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같이 장 보러 갈까요?”

첫 번째 공동 작업이다.

유 선생님 수업이라도, 할아버지 호출이라도 그 어떤 사안이라도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보냐?

“그럼 있다가 오후에 전화 드릴게요.”

내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반칙!

지금 그 표정에, 그 미소에,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은 반칙!

암튼 저녁에 또 본다. 이히히.

같이 장도 본다. 으흐흐.

밥도 같이 먹는다. 우후후.

이건 마치 신혼부부 같지 않은가. 음화하하하하하하!

마음속으로 미칠 듯 광소를 퍼붓고 있는 내게 서현 님이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신다.

“작은어르신. 죄송한데 휴대폰 좀.”

“네?”

“저는 작은어르신 번호를 알고 있는데, 아직 제 번호는 모르시죠? 번호 알려 드릴게요.”

“네? 넵! 부디!”

나는 바보같이 허둥대다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고3 수능 끝난 기념으로 할아버지 친구이신 고물상 박가이버 할아버지가 사 주신 내 중저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안 그래도 성능도 떨어지고 겁나 느린데, 거기다가 내가 술 먹고 여러 번 떨어트려 금이 좍좍 가 있는 핸드폰에 또 충격을 주면 아마도 영면에 드실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 전화기를 떨어트리지 않고, 서현 님에게 넘겼다.

서현 님은 내 전화기를 받아 들고 잠시 말없이 바라보신다.

그렇게 보니 갑자기 내 전화기가 부끄러워진다.

생각해 보니 저거 중앙전자에서 나온 전화기네. 자사 제품을 함부로 썼다고 눈으로 욕하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액정 금이 간 전화기는 청춘의 표상 같은 거다. 부끄러워 말자!

잠시 내 핸드폰을 바라보던 서현 님이 가늘고 긴 손가락들 들어 번호를 꾸욱 꾸욱 누른 후, 나에게 돌려준다.

잔뜩 거미줄이 가 있는 액정에는 01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숫자가 찍혀 있다.

생각해 보니, 친구 아니고, 동기 아니고, 처음 딴 여자 번호다.

여러분! 제가 드디어 번호를 땄습니다!

행복한 삶이여!

찬란한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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