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5화 (15/271)

15 : 마음 따스해지는 이야기 (1)

나는 학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곳에 앉아 있었다.

인문관으로 올라가는 도로 옆 벤치.

일주일 전에도 여기 앉아 있었더랬지.

그때는 보통의 대학교 2학년이었지.

5평 하숙집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통장에는 30만 원 정도가 남아 있고, 부족한 용돈을 충당하기 위해 커피집에서 알바하는 대학교 2학년 한수였었지.

어제도 여기 앉아 있었지.

수호신 예비 후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5평 하숙집, 잔고 133만원, 여전히 알바하는 흔하디흔한 21살의 대학교 2학년이었지.

그런데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작은어르신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70평 갤러리 포레스트에서 아침을 맞이했고, 지갑에는 한도 3천만 원의 신용카드가 들어 있는, 절대로 흔하지 않은 21살 대학생.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 보았다.

한수, 내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 신용카드가 보였다.

그랬구나. 난 거기서 아침을 맞이했구나.

***

오늘 아침. 정확히는 새벽.

어젯밤 알 수 없는 두근거림 때문에 늦게까지 잠을 뒤척거렸는데, 평소보다 이른 새벽에 눈을 떠 버렸다.

그렇게 눈을 뜨고도 한참동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선 풍경과 공간감. 처음 보는 천장의 무늬. 비싸 보이는 전등, 나 같은 놈 네 명은 눕고도 한 명 더 누울 수 있을 거대한 침대, 그리고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실크 이불.

강 회장님이 말하던 비단 금침이 비유가 아니었군. 이런 걸 덮고 주무셨단 말이지?

아무튼, 낯선 환경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 상태로 다시 생각을 복기했다.

승환이랑 게임방에 갔을 때, 전화가 왔지. 전화가 와서 서초동에 가서 회장님을 만났고.

거처를 옮기자는 이야기를 들었지. 알겠다고 했고, 호텔 센트럴 남산 이그제큐티브 플로어에서 밥을 먹었지.

아. 씨 발음도 어렵네.

전무이사급이라는 호텔 총지배인님께서 준비해 주신 비싼 밥을 먹고, 배웅을 받고, 공중 부양 차를 타고 이곳으로 왔지.

강서현 님과 같이.

강서현.

서초동 중앙그룹 본사에서 처음 서현 님을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첫눈에 반한다.’ 이런 걸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자는 외모보다 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처음 만난 사람에게,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눈과 마음을 홀라당 빼앗겨 버렸다.

그런 사람과 한 지붕 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미니미에 피가 모여든다.

음. 이건 모닝우드(아침 발기)야.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지.

아마도.

뭐, 실제로는 각자의 방에서 각각 잔 거지만.

참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한류 스타가 사는 70평 초고급 주상복합, 한도 3천만 원의 신용카드. 삼각별 달린 차 키.

그런 거 다 의미 없다.

그런 것 보다 강서현 그녀가 나와 같은 공간에. 물론 벽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고, 가장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미니미에 더욱 피가 몰린다.

음. 건강하군.

나는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미니미를 애써 무시한 채, 요 며칠간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천천히 복기해 보았다.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고, 내려가서 가업이 수호신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고, 내 스쿠터가 불타올랐고.

훗. 스쿠터 따위.

서울로 올라와 회장님을 만났고, 서현 님을 만났고. 그리고 지금 이 방, 이 침대.

아무리 해도 현실감이 안 드네.

예전에 복학생 형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군대에 처음 입대했을 때, 입대하고 훈련소에서 자고 일어난 첫날 새벽에 느꼈던 이질감에 대한 이야기.

내가 왜 여기 있지? 나는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런 이질감을 느꼈다고.

그 이질감이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과 같을까?

아니지. 지금 이 기분과 입대 첫날 기분을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거 아냐.

군대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 ‘어서 와, 지옥은 처음이지?’ 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악마를 바라보며 지옥문 앞에 서 있는 것이라면, 오늘 아침은 천사들이 울려 주는 팡파르 소리를 들으며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것 아니겠는가.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당첨금을 수령하고, 당첨금이 들어 있는 통장을 꼬옥 안고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이런 기분일까?

흐음. 모르겠네. 로또 1등이 돼 봤어야 알지.

훗. 로또 1등 따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겁나 큰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데, 내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똑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의식이 현실로 파팟 하고 돌아왔다.

“넵!”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입대 첫날은 아니더라도, 긴장 강도는 입대한 신병의 그것과 같을지도.

-일어나셨어요?

문 너머에서 서현 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루의 시작을 저 목소리와 함께 할 수 있다니! 신이시여. 감사드리나이다!

잠깐. 신은 우리 할아버지라며?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건 좀 싫은데….

-작은어르신. 일어나셨어요?

문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넵! 일어났습니다.”

나는 이불을 재빨리 걷으며 말한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신다고요? 그럼요. 됩니다. 되고 말굽쇼.

서현 님을 막고 있는 문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제든! 원하실 때는 언제든 들어오세요!

“넵! 들어… 아! 잠시만요.”

나는 빠르게 침대에서 뛰어 내렸다.

아 씨. 침대 드럽게 크네. 허우적거리다 떨어질 뻔했네.

옷은?

다행히도 트레이닝복 입었군.

나는 원래 고향집에서는 팬티 하나만 입고 잤는데, 작년부터 다 벗고 자는 것으로 바꿨다.

대자연의 상태로 자는 것이, 미니미의 성장에 좋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물론 다 컸으니 성장해 봤자 얼마나 더 성장하겠냐마는, 그리고 솔직히 내 미니미가 어디 가서 밀리는 편은 아니다. 나름 목욕탕 가서도 어깨 펴고 다닐 정도는 된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1mm라도 성장하면 좋잖아?

다다익선(多多益善), 아니, 많으면 안 되지. 촉수 괴물도 아니고. 대대익선(大大益善). 크면 클수록 좋은 거 아냐?

아무튼 그렇게 대자연의 상태로 자는 습관이 있음에도, 다행히 어제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잤나 보다.

문과 벽으로 막혀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뭔가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느꼈던 것이다.

경계심? 내가? 왜? 내가 왜 경계해야 하지?

아무튼, 우선 옷은 입고 있고. 오케이.

다음은 방. 빠르게 방을 살폈다.

컴퓨터 꺼졌고. 화면도 꺼져 있고. 방에 널브러진 이상한 거 없고. 뭐 딱딱해진 휴지 같은 거.

있을 리가 없지! 아직까지는 말이지.

특별히 이상한 거 없다. 괜찮군.

나는 다시 한번 방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눈이, 눈이 부시다.

찰랑거리는 머리. 옅은 화장기마저도 감출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 몸의 곡선을 감추면서 살려내는 보랏빛 실크 블라우스, 여성성을 한껏 드러내는 체크무늬 스커트.

나는 새로운 물리 이론을 발견했다.

완벽한 얼굴과 완벽한 몸매와 완벽한 옷이 조합되면 빛이라는 에너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는 이 이론을 ‘서현 님 통일장 이론’으로 이름 붙여야겠다.

서현 님이 어제 입은 옷보다 아름다운 옷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아름다움이 있다니.

이런 카멜레온 같은 여자. 아니 같으신 서현 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서현 님의 모습에 넋을 잃어버린 나에게 서현 님이 미소를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신다.

‘서현 님 통일장 이론’은 수정이다.

서현 님이 다시 물었다. 완벽한 얼굴과 완벽한 몸매와 완벽한 옷에 서현 님의 미소가 더해지면 빛의 에너지는 강력한 물리력을 담는다.

눈. 눈이 멀 것 같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죄를 지었다. 서현 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서현 님에게 두 번이나 같은 말을 시키게 된 죄를 지었다.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검사로서의 나는 나를 기소하고, 감히 서현 님에게 같은 말을 두 번이나 시킨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형벌로 사형을 구형할 것이다. 그러면 배심원인 나는 사형이 옳다고 건의하고, 판사로서의 나는 사형을 확정 지을 것이다.

변호사로서의 나는 최후 변론을 통해 이렇게 말하겠지.

그 누가 저토록 완벽한 아름다움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할 말을 잊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런 자가 있다면,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있다면 돌을 들어 피고를 쳐라.

변호사인 나의 그 말에, 판사인 나도, 변호사인 나도, 검사인 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죄송해요. 주무시는데 깨워서. 그래도 수업이 11시니까 슬슬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수업? 11시? 지금 몇 시지? 오늘 무슨 요일이지?

“아침은 드시죠? 가볍게 준비했으니 씻고 나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음. 맞네. 신병의 자세가 맞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내 수업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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