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치트키 봉인! (2)
“생태학자인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을 여러분도 다들 읽어 봤을 겁니다. 현대 환경윤리학의 시작이라고 주목받는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어떻게 공유지의 비극과 연결하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유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학생들에게 수업이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크으. 명강의다. 언제 들어도 가슴을 울리는 명강의다!
교탁에 서 있는 저 기품 있는 자세, 은은히 퍼져 나오는 선비 같은 고고함. 크으. 진짜.
잠깐만. 그나저나. 침묵의 봄? 그거 드럽게 재미없는데. 서점 손자인 나도 버티질 못할 정도로 진짜 개 재미없는데.
읽어 봐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날 부르는 유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수 군.”
고개를 드니 존경해 마지않는 유 선생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
“네? 네! 선생님!”
선생님. 학생들은 유주원 교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교수라는 것은 직책명이죠. 하지만 사실 나는 선생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합니다. 말 그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태어나 인생을 조금 더 산 선생(先生). 그러니 교수라는 직책 대신 저를 선생이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1학년들과의 첫 만남에서 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어디 무슨 체대에서는 교수님이라고 안 하고 선생님이라고 했다고 뺨을 맞았다고 하던데,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유 선생님은…. 크으.
아니지. 그런 인간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유 선생님에 대한 실례다. 실례.
“한수 군? 요즘 별일 없나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모두 같은 인격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계시는 유 선생님은 학생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를 쓰신다.
멋지시지? 멋지시다니까?
“네. 선생님.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한수 군이 지금 2학년 대표 맞나요? 조만간 학생들과 식사를 같이 하고 싶으니 서로 논의해서 괜찮은 시간을 과 사무실에 알려 주세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건강 유의하고.”
그렇게 말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상태로 뒤돌아 가시는 유 선생님의 뒷모습에 나는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선생님! 사… 사… 사….
이건 아닌가.
***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니,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스포츠 쿠페가 보였다.
소문으로는 튜닝 비용까지 포함하면 1억이 넘는다고 하던데, 1억 넘는 차를 사 주는 부모는 어떤 마음으로 저런 차를 사 주는 걸까?
“사랑받는 자식이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랑받는 자식. 쿠페의 주인, 내 전 여친의 현 남친, 김민우, 미국이름 앤디 킴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가진 검은머리미국인이다.
정확히는 원정 출산이지만.
아무튼,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태어남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을 받은 천조국 시민 김민우는 다른 여느 검은 머리 외국인처럼 한국에서 외국인 학교를 다녔다.
학생들 모두 검은 머리에 한국말 쓰는구만, 그게 무슨 외국인 학교야.
아무튼, 그렇게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고, 특례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야기지.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한국대는 외국인 전형 조건이 빡쎄기로 유명한데, 그걸 통과했으니 있는 집 자식은 있는 집 자식인가 보다.
아무튼, 미국 시민권 덕분에 군대도 안 가는 김민우는 2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가셨다.
참나. 미국 시민권자가 무슨 어학연수야. 미친.
아무튼, 1년간 미국에서 놀다가, 작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그런 그 자식에 눈에 여자 한 명이 들어온 거지.
신지수,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자랑이었고, 칭찬받는 모범생이었고, 완벽한 내신 점수와 수시 준비를 통해서 자랑스럽게 이 학교에 들어온 새내기 중 제일 예쁜 새내기.
문제는 이 예쁜 새내기가 동기 남학생과 사귀고 있었다는 거지.
바로 나.
다른 놈들은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저 나에게 저주만 퍼붓고 있었는데, 미국 시민권자, 검은 머리 외국인 앤디 킴은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거지.
적극 대시. 물량 공세. 기타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신지수를 흔들었고. 그 이후로는 뭐 뻔한 이야기.
시골의 코딱지만 한 책방 손자보다는 돈 많은 미국인 오빠의 품으로.
그게 작년 11월 29일. 젠장. 날짜도 안 까먹네.
이유도 모른 채 이별을 선언받고, 한참을 아파하다, 저 비싼 자동차에서 내리는 신지수를 봤을 때, 그때, 내 몸을 관통하던 비참함이란….
미칠 것 같은 분노도 느꼈고, 초라한 내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었고, 저런 여자였다면 차라리 잘되었다 싶은 안도감도 있었고. 여러 가지 복잡스러운 마음이 들었더랬지.
그중에서 가장 날 괴롭힌 것은 초라한 내 모습이었던가.
뭐 이제는 떠나간 사람인데. 어쩌겠어.
결혼이라도 했다면 민형사상 책임을 물리겠지만… 아니. 간통죄 없어졌으니 형사상 책임은 못 물리겠네.
아무튼 뭐 민법상의 책음으로 엮인 부부도 아니고, 생각하면 할수록 나만 비참해지는 거지.
뭐. 잘 살아라. 신지수.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살짝 찝찝한 기운을 안고서, 게임방으로 간 나는 헤드셋을 끼고 열심히 전장을 뛰어다니는 승환이에게 다가가 헤드셋을 살짝 벗기고 귀에다 공기 반 소리 반으로 속삭였다.
“전자 발찌는 파밍 했냐?”
“으드아으악!”
나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흥분한 박승환은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럼에도 시선은 모니터에. 손은 마우스와 키보드에 고정된 것을 보니 이놈은 뭘 해도 할 놈이다.
기왕이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좋은 쪽의 일을 해 줬으면 좋겠건만. 그럴 놈은 아니지.
“뭐 해. 어서 빨리 자리 잡고 쪼인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기분 더러울 때 총 쏘는 것만큼 속 풀리는 것이 없지.
나는 승환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 넘어 있는 놈들아. 오늘 형이 기분이 안 좋다. 오늘 니들 다 죽었어.
그렇게 마음먹으며 막 게임을 실행시키려는데, 책상위에 올려놓은 전화기가 겁나게 떨어 댔다.
뭐지? 오늘 알바 가는 날인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다.
스팸? 보이스 피싱? 받지 말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여보세요?”
-작은어르신, 강녕하셨는지요? 혹시 통화 괜찮으신지 여쭈어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잘못 걸려 온 전화인가?
“저기, 전화 잘못… 아!”
작은어르신. 이렇게 날 부르는 사람이 있었지.
“회… 회… 회… 회…장님?”
중앙그룹 강민철 회장님. 그분께서 나를 그렇게 부르셨지.
-그렇습니다. 노복입니다.
노복이란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글로벌 이코노믹스 선정 글로벌 기업 7위 중앙그룹의 정점에 계시는 강민철 회장님이 스스로 늙은 노비란다.
“아, 안녕하십니까!”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저기. 그. 오히려. 저기. 그.”
아씨. 뭐라고 하지? 환장하겠네.
누구라도 그럴 거다.
차라리, 한수냐. 할아버지 친구 강민철이다. 그렇게 말해 주면, 아, 네, 안녕하세요, 할 텐데, 노복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데, 옆자리 승환이가 나에게 손짓을 한다.
누구야? 빨리 끊어, 임마! 지금 전화 받을 때야?
그런 의미의 수신호다.
나는 그런 승환이에게 닥치라는 의미를 담은 수신호를 보냈다.
이 멍청한 자식아! 이 전화가 누구에게서 온지 알면 넌 임마 오줌 쌌어, 자식아!
아닌가? 이 미친놈은 별로 당황하지 않을지도. 어쩐지 그럴 것 같은데?
원래 위아래가 없는 금수 같은 자식이니까.
-작은어르신. 저희는 그저 어르신을 모시기 위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 부분은 차차 좋아지겠지요. 쓸데없이 서설이 길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제가 뵈러 가도 괜찮을지 여쭈어보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회장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확 돌아온다.
아. 그러셨구나. 그런 이유로 전화 주셨구나. 만나러 오신다고 하시니. 오늘 수업도 다 끝났으니 괜찮은데…까지 생각했다가 다시 화들짝 놀란다.
오신다고? 만나러 오신다고?
“오늘요? 지. 지. 지, 지금요?”
-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이 노복이 마음이 급해서. 벌은 나중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급하시면 안 되죠. 항상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아니지. 내가 먼저 좀 차분해지자.
“아. 알겠습니다. 그럼 몇… 몇 시에 어… 어디서…?”
아. 나 왜 이러냐.
-작은어르신. 이 노복의 청을 들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혹시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아. 진짜 적응 안 되네.
“아… 지금. 저기. 그. 학교 근처….”
차마 게임방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혹시 수업 중이셨습니까?
“아니. 아니요. 아니. 아니요가 아니고 아닙니다. 수업은 끝났습니다. 학교 근처에서 친구 만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
어버버 하는 나를 옆자리 박승환이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학교 근처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친구분들과 만남이 끝난 후, 연락을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안 그래도 저 극존대 때문에 불편해 죽겠는데. 와서 기다리시겠다고?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찾아뵐게요. 제가 뵈러 갈게요. 어디로 언제까지 가면 될까요?”
-아닙니다. 어찌 감히 작은어르신께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지금 가방 들었습니다!”
돌파해야 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한다.
-허허. 참. 작은어르신의 아량은 큰 어르신을 닮았습니다. 이 노복은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아이고, 이 양반, 아니 이 회장님 누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어, 어디로 찾아뵐까요?”
-그러면 제가 차를 보내겠습니다. 어디로 보내드리면….
“아니요!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만 주시면!”
-그리 말씀하신다면…. 여기 서초동 중앙그룹센터로….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직접 찾아뵙는 것이.
“서초동 중앙그룹센터!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뭐야 이 상황은…. 마치 내가 잘못한 사람 같잖아.
“승환아. 나 잠깐 어디 가 봐야겠….”
나가 봐야겠다고 말하려는데 승환이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다. 할아버지가 ‘한심한 놈’ 하며 쳐다볼 때의 그 눈빛이다.
“사채?”
“뭐?”
“사채 썼냐고.”
“뭔 개소리야?”
“지금 사채업자 아냐? 회장님이라 그러고, 그렇게 쫄고 당황해서 막 가겠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쇼.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그랬잖아.”
살려 달라고는 안 했어! 임마!
하지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개당황하고, 말 더듬고, 쫄고. 그랬으니까.
“돈 필요하면 말해라.”
승환이가 무심한 듯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너 이 자식.”
나는 그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했다.
고작 21살밖에 안 된 내 동기 승환이에게 이런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니.
“아는 사람 중에 돈 빌려주는 사람 있다. 이자가 쌔지만 거기서 대환대출하면 며칠 더 살 수 있을 거다.”
“야 이! 자식아!”
나는 키보드를 들어 승환이의 머리를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