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5화 (5/271)

5 : 마른하늘에 날벼락(靑天霹靂) (5)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버스 안,

나는 멍한 표정으로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보았다면 분명, 멍한 표정이라고 할만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제 오전만 해도 나, 한수라는 이름의 청년은 그냥 보통의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랬는데, 하룻밤 사이에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마치 어제 맑았던 날씨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버스 창밖으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잠깐만.

혹시. 할아버지가 먹구름 만든 거. 그거 그냥 우연 아니었을까?

오늘 비 오는 거 보니 딱 분위기가 비 올 분위기였는데, 마침 아다리가 맞아서 그때 먹구름이 막 몰려든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어진 사건들이 너무 절묘하다.

불타 버린 내 스쿠터. 크흑.

아니, 스쿠터는 둘째 치고라도, 나를 끌어당긴 무형의 힘. 갑자기 안 보인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품속에서 나온 골드바와 미국 재무부 국채.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강민철 회장님.

신문이나 뉴스에서만 보던 대한민국 최대 재벌그룹, 아니 세계 최대 전자회사인 중앙전자를 보유한 중앙그룹의 강민철 회장님이 우리 집 거실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연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생각을 몇 시간 전으로 되감았다.

***

“이놈이 내 뒤를 이을 것이네.”

할아버지가 말했다.

“노복이, 그리고 노복의 후손들이 목숨을 다해 모실 것입니다.”

강민철 회장님이 말했다.

“뭐. 목숨까지야.”

할아버지가 말했다.

마치 이 녀석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하나뿐인 손자인데, 그런 표정은 좀 그렇다. 할아버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강민철 회장님도 내 생각에 동의하시는가 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담겨 있다.

역시 훌륭하신 분.

“작은어르신. 노복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응? 갑자기 이건 무슨 시나리오?

“작은어르신께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부디, 이 노복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더니 다시 무릎을 털썩 꿇는다.

“어? 어어? 어어어?”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강민철 회장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셔? 무릎도 안 좋으시다면서!

“아니. 저기. 아니. 회장님?”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깊게 고개를 숙이신다.

아니, 이 양반, 아니지, 회장님, 평소에 얼마나 좋은 거 드셨길래 이리 힘이 좋아?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담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헬프 미!

내 눈빛을 이해했는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일어나게.”

“예. 어르신. 죄송합니다.”

강민철 회장님은 그제서야 다시 머리를 들었고, 힘겹게 일어나 다시 소파에 앉았다.

“오늘 자네를 이렇게 부른 것은, 얼굴을 보이기 위함일세. 자네에게도, 그리고 저 녀석에게도. 이렇게 안면을 익혔으니 이제부터 저 녀석을 지켜봐 주게.”

할아버지가 말했다.

지켜봐 주라고? 나를?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강민철 회장님이 말했다.

감사한 말씀?

“그동안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모시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야 제 할 일이 생겨 기쁠 따름입니다.”

강민철 회장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아 말했다.

정말 기쁘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기업인 특유의 처세인지 모르겠지만, 미소만큼은 일품이시네.

가까운 데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고?

“저를… 알고 계셨다고요?”

중앙그룹 회장님이 나를 알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작은어르신. 작은어르신이 서울에 계신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작년 대학 진학하시면서 서울로 오실 때부터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네?”

“어르신의 명이라 차마 가까이 가지 못했지만, 그렇게 엄혹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생활하시는 작은어르신의 모습에 이 노복은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엄혹한 환경?

“이제 어르신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앞으로는 불편함이 없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 누구야?

직원만 40만 명이 넘는 대기업 총수가 나를 알고 있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이 사람 누구야? 사기꾼이야?

“당장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는 거처부터 마련하겠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아니, 지금 바로 연락해 오늘부터 거주하실 수 있는 거처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맞네에~. 회장님 맞네. 중앙그룹 회장님 맞으시구만!

내가 참 괜한 사람을 의심했구나.

아이고, 이 못된 버릇 고쳐야지.

글로벌 경제의 한축을 담당하는 중앙그룹, 국내 재계 서열 1위 중앙그룹 회장님의 선의를 의심하다니.

“그럴 것 없네.”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네?”

“네?”

나와 회장님의 머리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럴 것 없네. 그냥 지금처럼 살게 두게.”

“어르신!”

나도 할아버지!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아 냈다.

왜냐? 아플 거거든.

경험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하지만 어르신. 작은어르신이십니다. 지금 얼마나 가혹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생활하시는데, 어찌 종복 된 입장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소서.”

또 나왔다. 가혹한 환경, 아니 이번엔 ‘혹독한’까지 붙었다.

뭐가? 밥 잘 나오고 밑반찬 맛있는 우리 하숙집? 아니면 내가 알바하는, 시급 괜찮고 매니저 누님이 엄청나게 이쁜 커피집?

“되었네. 저 녀석은 아직 수호신이 아닐세. 설사 수호신이라고 해도 나를 보게. 내가 언제 물질을 탐하던가?”

할아버지! 시대가 바뀌었단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란 말입니다! 디스 이즈 캐피털리즘!

“어르신. 제가 가진 모든 것이 어르신의 것이고, 또한 작은어르신의 것입니다. 주인 되는 분께서 찬 이슬을 맞고 주무시는데, 종복이 비단 금침을 덮는 법은 없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재고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찬 이슬 맞고 자 본 적은 없는데…. 아니다. 여자친구랑 깨지고 슬퍼서 졸라 술 퍼마시고 길에서 한번 잤구나. 서… 설마, 그것도 보신 건가?

“그만하게.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아닐세. 그냥 내버려 두게. 그리고 이번에 자네를 부른 것은 ‘그것’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이지, 저 녀석을 보살피라고 부른 것은 아니야.”

“그것이라면…. 설마. 그것 말입니까?”

회장님의 얼굴이 화악 펴졌다.

뭔데? 그것이 뭔데?

“그렇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자네를 아니 볼 수는 없으니. 그래서 부른 것일세.”

회장님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됐습니다.”

뭐지? 뭐야? 지금 뭐 이야기하는 거지?

“일단 이야기를 전해 두게. 날을 잡고 올라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준비를 부탁하네.”

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얼굴에 감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기쁨, 희열, 감동, 뭐 그렇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바로 준비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회장님은 당장 뛰어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할아버지가 말한 알 수 없는 ‘그것’을 당장 준비하겠다는 듯.

느낌이 싸하다.

내 직감이, 알 수 없는 ‘그것’이 분명 나와 관련돼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니. 지금 당장은 말고. 오랜만에 왔는데 자네는 술이나 한잔하고 가지.”

술이라는 소리에 회장님의 얼굴이 더욱더 환해졌다.

근데 술이라고요? 지금 오전 8시입니다만…?

“감사합니다. 어르신. 당장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회장님은 다시 고개를 숙인 후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무언가 지시를 시작했다.

“저기. 근데… 할아버지.”

내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회장님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준비한다는 ‘그것’이 뭔데요?”

할아버지 눈빛이… 좋지 않은데. 저거 좋지 않은 시선인데.

“너는 이제 올라가도록 하여라.”

할아버지가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맥락 없이?

“응? 올라가라고? 지금?”

“그래. 올라가서 학업에 매진하고 있거라. 조만간 내가 올라갈 것이다.”

단호한 대답.

“아니. 그건 그거고. ‘그것’은 뭐냐니까?”

꺾이지 않는 나의 의지.

“올라가. 지금. 당장.”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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