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마른하늘에 날벼락(靑天霹靂) (4)
“헉!”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새벽의 미명이 온 세상을 덮지 못한 이른 새벽,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났다.
뭔가 무서운 꿈을 꾸었는데, 뭔가, 끔찍한 꿈이었는데,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마치 누군가 기억을 지운 것처럼.
그 순간 내 눈에 익숙하지만 이질적인 모습이 들어왔다.
내 방. 고향집 내 방.
서울 하숙집 내 방이 아니라, 내가 대학 가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거친 사랑 아래 성장하던 내 방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기억이 돌아왔다.
내려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내려왔고, 할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이으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구름이 모여들었고, 번개가 쳤고, 내 스쿠터…. 크흑. 아무튼 내 보물 1호가 역사가 되어 버렸고. 그 다음에 투명인간. 그리고 딱밤. 연속기. 의식이 끊겼고.
“헉! 꾸… 꿈이 아니었나?”
나는 코에 손을 가져갔다. 부었다. 확실히 부었다. DNA 어디 한구석에 코카소이드의 폴리펩타이드가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코가 확실하게 커졌다.
아팠다. 현실이다. 꿈이 아니다.
잠깐. 그렇다면. 나는… 신의 손자?
그렇다면 예비 신?
그렇다면 투… 투명인간도…?
갑자기 아픔이 가셨다. 고통도 사라졌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세상이 변했다.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축하의 팡파르를 울려 주는 것 같았다.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한 달에 몇 명이나 나오는 로또 1등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투명인간. 투명인간이 가능하다니!
그래. 나는 이 능력을 한껏 발휘해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정의를 구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후후후. 후후후후후후. 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
-시끄럽다. 새벽부터 이 무슨 소란이냐!
참아야만… 했다.
***
일찍 일어난 김에 이른 아침을 먹고 할아버지와 다시 마주 앉았다.
“헛험. 어제 못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꾸나.”
할아버지는 마치 어제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말을 꺼냈다.
“마저 이야기하면, 우선 네가 가업을 잇는다고 해도, 바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절차가 남아있느니라.”
할아버지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말했다.
“절차…라니요?”
“나이가 스물이 넘었다고 성인이 아니고, 자식을 낳았다고 부모가 아닌 것처럼, 우리 가문에 태어났다고 해서 가업을 이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자격이요? 어떻게요?”
“그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생각에는 네 녀석에게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구나.”
할아버지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드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서 빨리 투명인간이 되어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단 말입니다! 세상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왜… 왜요?”
“인성이 아직 덜됐어.”
아니. 이 양반이 이상한 말씀 하시네.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 손자예요. 제 인성은 100%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가 망나니면 그게 다 할아버지가 망나…. 이렇게 말하면 또 기억이 끊기겠지.
“불민하긴 하지만, 할아버님의 가르침 속에 성장했다는 것을 소손은 언제나 잊지 않고 있사옵니다.”
나는 최대한 사극 톤을 살려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놈이 투명인간을 말하고, 로또를 운운하며 예지력을 탐하는 것이냐!”
“아니, 꼭 로또를 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사실 돈이 필요하긴 하잖아요.”
그치. 돈은 필요하지.
“까놓고 말해서 제가 우리 할아버지 기쁘게 해 드리려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으니까 할아버지가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대학 등록금이 얼만지 아세요? 아무리 국립대라고 해도 그거 무시 못 해요. 거기다가 제가 일부러 싼 하숙집에 들어가서 살고 있지만, 요즘 애들처럼 원룸에다가 밥도 사 먹고 그러면 생활비도 어마무시하게 들어간다고요.”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와 돈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책방을 운영하며 선비처럼 고고하게 사는 할아버지가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어떻게 사는 거지? 돈 못 버는데?
책방이야 내가 어릴 때나 손님들이 조금 있었지, 그 이후에 확 줄었고.
“아니. 잠깐만. 할아버지. 그런데 우리 어떻게 먹고 사는 거야?”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이냐?”
“나야 학비는 장학금 받고, 생활비야 알바 뛰고 하니까 그렇다 치고. 할아버지 이 집이랑 책방 전기세나 수도세 같은 관리비랑, 할아버지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랑. 아 그리고 내 하숙비. 그것도 할아버지가 내 주는 거잖아? 그 돈 어떻게 버는 거야? 책방으로? 책방에선 돈 안 벌리는 거 누가 봐도 자명한데?”
할아버지는 나를, 하나뿐인 이 손자를 언제나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심한 자식아, 그런 눈빛으로.
“왜? 이 할애비가 어디서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 같으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잖아. 신이라고 해도 밥은 먹잖아. 밥도 먹고, 추울 때는 보일러 틀고, 더울 때는 에어컨 틀고. 그럼 다 돈인데. 돈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니. 혹시 할아버지 돈 만들어? 그런 거야?”
“이 녀석아! 대학생이라는 놈이 경제 흐름에서 무분별한 화폐 생산의 부작용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느냐?”
“왜? 돈 못 만들어? 우리 집안 신인데?”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더니 품에 손을 넣어 물건을 하나 꺼냈다.
“이런 거 말이냐?”
금. 골드바. 금괴. 1kg짜리, 스위스 UBS 은행의 로고가 찍힌 골드바가 할아버지 손에 들려 있었다.
“아니면 이런 거 말이냐?”
골드바를 들고 있던 손이 다시 할아버지 품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그 손에는 종이 쪼가리가 들려 있었다.
종이 쪼가리 위에 선명하게 적혀 있는 글자.
‘THE UNITED STATE OF AMERICA TREASURY NOTE’
“미국 연방정부 국채?”
내가 외쳤다.
입이 떡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떡 벌어진 내 입을 보며 만족스럽게 씨익 웃고는 다시 품에 넣었다.
잠깐만. 타임. 잠시만요!
저 아직 국채에 적혀 있는 가격을 못 봤는데?
“어디 격 떨어지게 돈에 집착한단 말이냐.”
나는 아직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것치고 액수가 너무 큰데요? 처음 보여 준 1kg 골드바 5천만 원이 넘는데요?
“에이. 손자라는 놈이 이렇게 부족해서야. 어찌할꼬.”
금괴와 채권이 들어간 품은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듯 편안해 보였다.
종이 쪼가리인 국채야 그렇다 치고, 1kg짜리 금괴는 품에 넣고 다닐 무게는 아니지.
“하…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육친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 아니겠는가?
“에잉. 못난 놈. 이놈을 어찌한다….”
어찌하긴요. 얼른 능력을 물려주시고, 이제 손주의 보필 받으면서 편하게 여생을….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직 시간이 멀었는데, 일찍도 오는군. 가서 맞이해라.”
할아버지는 마치 누군가 찾아올 것을 알았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손님이 오시기로 했어?”
“시끄럽고, 어서 빨리 문이나 열어 줘라.”
나는 투덜투덜 거리면서 문으로 향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방해꾼이 나타나다니.
그런데 누구지? 올 만한 사람이 딱히 없는데.
우리 가족, 하늘 아래, 단 두 사람. 할아버지와 나.
나는 남들과 달랐다. 엄마, 아빠가 없었고, 삼촌, 고모, 이모가 없었다. 형과 누나가 없었고, 동생도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할아버지가 유일했고,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름을 나는 인정하며 살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외로움의 의미도 깨닫게 된 이후부터는 덤덤해했다.
설이나 추석 명절에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았고, 어디 한 곳 찾아갈 곳 없어도 크게 서운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생각해 보니, 다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도 남들과 달랐다.
봉양해 주는 자식이 없었고, 같이 늙어 가는 형제가 없었다.
손주들이 자식들을 품에 안겨 찾아오는 명절에도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방 문을 열고 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온 조손은 그 외로움을 각자의 영혼 한편에 안고 살고 있었다.
아니. 나는 그랬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신이었다고?
가슴에서 골드바와 채권이 막 나오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감색 양복을 차려입은 노년의 신사분이 서 계셨다.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선가 뵈었는데? 누구지? 동네분은 아니신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사분이 나를 보더니 활짝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나는 당황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흔은 넘으셨을 것 같은 노인분이 읍을 하리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나도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허리를 숙였다 폈는데도 노인분은 아직 허리를 펴지 않고 계셨다.
재빨리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대치 후. 노인분의 허리가 펴지는 기색이 느껴지자 나도 얼굴을 들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중후한 목소리다.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네? 아. 네. 들어오세요.”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무슨 용건이십니까? 이런 질문도 없이 나는 옆으로 몸을 틀었다.
노인분이 들어오시기 편하도록.
노인분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그 옆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히 아는 사람 같은데.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분명히 몇 번 뵀는데….
누구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할아버지 친구?
아니다. 내가 여기서 20년을 살았는데 할아버지 친구 얼굴을 모를 리가 없지.
설사 모른다 쳐도 할아버지 친구분이 양복을 차려입고, 나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할 이유는 없지.
그럼 혹시 이 지역 정치인이나 유지나 그런 높은 사람?
선거철의 정치인이라면 그런 공손한 인사가 말이 되는데, 내가 그런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선거철도 아니잖아.
누구지? 저분은?
노인은 문을 잡고 있는 나를 천천히 지나쳐 집으로 들어왔다.
그라지 노인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보였다.
우선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다음에 예쁜 여자라는 사실도 확인했고, 마지막에 정말 예쁜 여자라는 사실을 막 인지했을 때, 거실 쪽에서 철푸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거실을 바라보았다.
방금 문을 통해 들어온 노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어르신!”
무릎을 꿇은 신사분이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조아리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래. 먼 길 왔는가. 일어나게.”
할아버지는 마치 이런 장면을 예상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어르신.”
노인분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고는 무릎걸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무릎걸음? 무릎걸음이라니!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태국 군부가 태국 왕에게 쿠데타 허락을 받으러 갈 때 무릎걸음으로 가더라.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쿠데타를 허락받으러 가는 것도 웃기지만, 다 큰 어른이 무릎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가는 모습이 더 웃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우리 집 거실에서 재현되다니!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노인은 할아버지 앞에 도착해서 그 자세 그대로 두 손을 땅에 짚고 머리를 조아렸다. 큰절이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다.
뭐야? 이거 뭐야? 뭐지? 이거?
“그래. 간만에 보는군. 편하게 앉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찌 감히. 어르신 앞에서.”
“무릎도 시원치 않으면서. 어서 내 말에 따르게.”
그제야 그 노인분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일어날 때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정말 무릎이 시원치 않나 보다.
“너 뭐 하냐?”
할아버지가 날 보며 물었다.
나는 문 옆에 비켜선 채로 그대로 문을 잡고 굳어 있었다. 그 노인분이 무릎을 꿇던 그 순간부터.
“예? 아. 네. 지금. 저기.”
나는 무슨 소린지도 모를 부사어를 내뱉으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서야 생각났다.
문 뒤에 사람 한 명 있었는데! 여자였는데! 예뻤는데! 그것도 아주 겁나 예뻤던 것 같은데!
“이리로 와라.”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머리로는 다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명령에 따라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인사하게. 손주 놈일세. 그냥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노인에게 말했다.
다시 무릎을 꿇으려던 노년의 신사는 그 말에 소파에 앉은 그 자세 그대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작은어르신. 노복 강민철이 이제야 인사를 올립니다.”
그래. 강민철. 강민철. 맞다. 아는 이름이다.
내가 아는 얼굴이라고 했지?
맞다니까! 분명 아는 얼굴이야. 이름 들으니 딱 알겠네.
강민철. 강민철.
잠깐만….
강민철?
중앙그룹 회장 강민철?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중앙그룹의 강민철 회장? 아니,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