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51화
현실 속 성기사
[실드 차지]
다리에 힘을 주어 바닥을 박찬 알렉스의 신형이, 공간을 도약해 악마군주의 앞에 도달했다.
평소의 돌진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각력을 이용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마치 공간이동 마법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알렉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발을 디뎠던 땅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깊게 파인 족적 위로 가라앉기도 전에.
콰앙-!
잘려 나간 하반신을 이어 붙이며 본래의 형상을 거의 회복해 가던 악마군주의 상체가,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수십조각의 육편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 어찌 인간 따위가!
발성기관을 통한 것이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가, 분노와 경악의 감정을 담아서 알렉스에게 전해져 왔다.
“그런 발언은 너무 식상한데.”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알렉스도 꽤 놀라는 중이다.
게임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치를 기록 중인 능력치가 발휘하는 힘은, 그로서도 전혀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 정도 파워라면 어지간한 보스몹들은 스킬 없이 평타만 쳐도 다 때려잡겠네. 게임이었다면 핵 프로그램을 사용한다고 신고를 먹었겠어.’
강한 건 좋지만, 너무 강해도 문제긴 하다.
실드 차지 한번으로 악마군주의 육체 절반을 산산이 파괴했지만, 그 반동 때문에 방패 역시 수리하기 전엔 못 써먹을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다.
자가복구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라 해도 한순간에 원형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니, 적어도 이번 전투에서는 더 이상 방패를 써먹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현재의 능력치라면 장비하나 없는 맨몸이라 해도, 충분히 악마군주를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이기에.
퍼버벙!
바닥에 흩어진 악마군주의 파편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검은 불꽃이 피어올라 살아있는 것처럼 알렉스를 향해 움직였다.
저주와 마법피해를 동시에 입히는 복합적이고 강력한 흑마법의 일종.
그러나 악마군주가 사용하는 대단한 흑마법도, 알렉스에게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갑옷의 전면부가 손상되며 맨살이 곳곳에 드러날 지경이었으나, 알렉스는 끽해봐야 모기에 물렸나 싶을 정도의 통증밖에 느낄 수 없었다.
월등히 높아진 능력치로 육신의 내구도나 마법저항력 같은 수치들도 덩달아 껑충 뛰어올랐으니, 사실상 반쯤은 무적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입는 피해보다 회복되는 속도가 더 빠르니 타격이 있을 리가 없다.
-대, 대체 어떻게!? 설령 화신체라 하여도 이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닐 수는 없는 법이거늘!
“어, 미안. 나도 이게 진짜 될 줄은 몰랐다.”
본인이 지닌 스킬의 힘이긴 하지만, 성검의 도움이 없었다면 알렉스도 이만큼의 강화 효과를 받진 못했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여 보인 알렉스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악마군주의 파편들 중, 맥동하고 있는 심장을 찾아내 그 앞으로 다가갔다.
사악한 힘의 정수가 담긴 악마군주의 심장 앞에 선 알렉스는, 괜히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대신 곧바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대! 잠시 내 말을 들어…….
“됐고, 곱게 가라.”
강화의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알렉스는 괜히 여유를 부리지 않고 그대로 놈의 심장을 짓밟아 터뜨렸다.
-캬아아악-!
머릿속을 울리는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온 후.
알렉스는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암흑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난 건가.’
군주급 대악마의 악명에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결말이었다.
하긴 저만한 존재가 고작 한 사람의 인간에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짓뭉개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레벨 업도 안 시켜 주나?’
마땅히 떠오를 거라 생각한 알림이 잠잠했기에, 알렉스는 의문을 느끼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물론 놈을 만나기 직전에 이미 레벨 업을 경험했으니 다시 레벨이 오르길 바라는 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명색이 악마군주라는데 그만큼의 경험치는 줘야 맞지 않나 싶었다.
“어엇!”
그런 생각을 하며 상태창의 경험치 바를 확인하던 알렉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상태창에 경험치 표기가 없어졌다.
정확히는 경험치 뿐만 아니라 상태창에 떠올라야하는 모든 항목들이, 물에 젖어 번져버린 글자처럼 형태를 잃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이어서 고장 난 TV처럼 상태창 전체가 깜박거리는가 싶더니, 화면이 꺼지듯이 알렉스의 눈앞에서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알렉스가 다급히 다시 상태창을 띄워보려 시도했으나, 스킬 목록이나 알림 메시지 등 그 어떤 기능들도 더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라지는 것은 상태창뿐만이 아니었다.
파스스슷.
무언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옮기자, 손에 쥐고 있던 성검이 빛을 잃고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성검까지? 왜……? 설마 내게 주어진 역할이 전부 끝났다는 의미인가? 그럼 이제 내 성기사의 능력도 사라지게 되나?’
털썩.
당혹감 속에서 멍하니 서있던 알렉스가,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심한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알렉스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이사벨이,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화들짝 놀란 알렉스는 머릿속의 의문을 전부 던져 버리고, 한 달음에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성검이니 상태창이니 하는 것 따위는 더 이상 알렉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사벨!”
“알렉, 스…… 해낼 거라, 믿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황급히 구멍 난 그녀의 복부에 손을 올리고 치유의 손길을 사용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강화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은 덕분에, 막대한 신성력이 손끝에 모이며 이사벨의 부상을 빠른 속도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치유의 손길 자체는 치유계 중에서도 기초라 할 수 있는 수준인 스킬이지만,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뻥튀기된 능력치의 영향 때문에 발휘되는 성능이 고위사제의 성법에 맞먹었다.
“하아…….”
전력을 다해 이사벨을 치료하던 알렉스는, 이윽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긴 한숨을 흘렸다.
파이어티 링크의 지속시간이 다한 것이다.
이사벨의 부상을 말끔히 치료한 직후 벌어진 일이기에,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통을 견디며 체력을 극심하게 소모한 끝에 결국 치료 도중 정신을 잃어버린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이사벨…… 다행이야.’
악마군주, 상태창, 성검.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아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그래도 다른 무엇보다, 이사벨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심상에 큰 위안을 심어주었다.
* * *
악마군주를 무찔러 세상을 구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노래나 시가 되어 대륙에 퍼지지는 않았다.
악마에 관한 소문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은 교단에서, 임무에 참가한 성직자들의 입을 단속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이에 대해선 딱히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지로 돌아온 알렉스의 생활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상태창이 먹통이 된 탓에 더는 레벨을 올릴 수도 없게 되었으나, 그다지 아쉬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인간들 중에선 대적할 자가 없는 힘을 지닌 알렉스이니, 굳이 더 강해져야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에 매달려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에, 마음에 얹어진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에 성검이 사라지며 더 이상 타인에게 신성력을 각성시켜줄 수 없게 되었기에, 이제는 전처럼 사람들이 몰려와 귀찮게 하는 일도 크게 줄어들었다.
“아쁘아아-!”
“어어! 뛰지 마, 뛰지 마. 넘어질라 우리 딸.”
물론 영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가정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삶은 바빠지기에 충분했지만 말이다.
“아쁘아, 반짝하는 거 보여죠.”
“신성력? 그거 하면 아빠 피곤해지는데?”
“이잉! 보여죠!”
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에, 알렉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성안에서 굳이 검을 차고 다닐 이유는 없지만 기사의 습관 때문인지 허리춤이 비어있으면 영 허전해, 가벼운 숏소드 하나를 항시 패검하고 다니는 게 버릇이 되었다.
[홀리 웨폰]
검을 뽑아 든 알렉스가 신성력을 불어넣자, 칼날 위로 환하게 타오르는 성스러운 빛이 일렁인다.
“와아-!”
잠시 입을 벌리고 빛을 바라보던 아이는, 이내 알렉스의 주변을 빙빙 돌다가 몸을 돌려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에리카! 어디 가니?”
“엄마한테!”
“어, 그러냐…….”
어린애다운 집중력이라고 해야 할지 금방 흥미를 잃고 떠나는 딸의 모습에,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신성력을 거두어들였다.
‘그나저나 이제 홀리 웨폰을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신성력이 눈에 띄게 줄어드네.’
검을 집어넣은 알렉스는 자신의 내부를 관찰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상태창이 사라지며 잠깐 걱정하긴 했으나, 자신이 지닌 힘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스킬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로 몸에 깃들어 있던 막대했던 신성력이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점점 줄어들어,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에 와서는 기초 스킬인 홀리 웨폰을 쓰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비단 알렉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모든 성직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신성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자신 정도 되니까 아직 이만큼의 신성력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교단에는 더 이상 성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성직자의 수가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옛 명성에 기대어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 때문에 교단의 힘은 빠르게 쇠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대로 신성력의 존재가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의문의 생겨나긴 하지만 딱히 걱정되진 않는다.
애초에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갔던 또 다른 세계에도, 신성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힘이었으니까.
성법이나 마법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없어도, 인간의 문명은 충분히 찬란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게 이 세상에 있던 신의 마지막 안배 같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들에게서 신성력을 회수하기 전에, 대륙에 퍼져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제거하라고 자신을 불러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신을 직접 만나본 게 아니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만약 이런 상상이 사실이라면 실컷 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셈이니 불쾌해야겠지만…….’
“아빠앗- 엄마가 오래!”
멀리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상념에서 깨어나 몸을 돌렸다.
솔직히 신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크게 불평하거나 따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은 지금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제는 오히려 이 몸을 두고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지기도 하면 더 문제일 것이다.
“엄마 지금 화났어!”
“……헉!? 왜, 왜지.”
가볍게 움직이던 발이 갑자기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사도 알렉스.
이후 예루스 교단 최후의 성기사로 역사에 기록될 이름을 지닌 남자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표정을 드러내며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는 알렉스의 머릿속에, 더는 레벨이나 신성력 같은 사소한 요소들 따위가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The end
작품 후기
게임 속 성기사의 이야기는 이렇게 결말을 맺었습니다.
원래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더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못난 작가가 몸 관리도 못 하고 계속 잦은 휴재를 하는 바람에….
악순환을 반복할 바에야 이른 완결을 보는 것이 낫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루한 글을 마지막까지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 그리고 실망을 느끼고 떠나간 분들께도.
아마 몇 번씩 사죄를 드려도 모자를 것 같습니다.
이제 시간이 생겼으니 다시 몸을 추스르고 나서, 이번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차기작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매력적인 소설을 만들도록 분발하고, 휴재 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