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50화 (150/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50화

사도 알렉스(7)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한 존재들의 음험한 간계에 대적하기 위해, 주께서 내려주신 갑주를 입고 내가 세상에 섰나니…….”

기도문을 외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혼란에 잠겨 어두워져 있던 알렉스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이사벨?’

“신께서 내 안에 깃드사 그분의 은혜로 강건하여지고…….”

관통된 갑옷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중상을 입고 있음에도, 안간힘을 쓰며 바닥을 짚고 몸을 바로 세운 이사벨이 알렉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올곧은 눈빛에 실린 마음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투지.

그리고 몇 번이나 함께 고난을 헤쳐 나온, 동반자인 알렉스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담긴 눈빛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수치심을 느낀 알렉스가 이를 악물고 검을 치켜세웠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절망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는 이사벨의 곁에서, 부끄러운 파트너로 남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역으로, 내가 제안하지.”

이글거리는 투쟁심을 되찾은 알렉스가 악마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인간의 지배자는 별로야. 그보다는 악마의 지배자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참에 너희들이 내게 복종하고, 날 섬기는 충견이 되어보는 건 어때?”

“…….”

황당한 제안에 악마군주의 입이 다물어졌다.

“물론 난 그다지 다정한 주인은 아니라서, 매질을 좀 심하게 가할지도 몰라.”

“……제법 가치 있는 기념품일 듯싶어 은혜를 베풀어줄 생각이었거늘. 어리석은 인간답게 기회를 줘도 잡질 못하는구나.”

코웃음을 친 악마군주는 더 이상 알렉스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육신을 재생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사벨과 알렉스가 투혼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악마군주의 입장에선 어차피 다 죽어가는 것들의 헛된 발버둥일 뿐.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괜히 힘을 소모하느니 관심을 끊고 본인의 육신을 돌보는 쪽을 택했다.

으드득.

‘흐으…….’

알렉스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해내야 해.’

피가 흘러나오는 구멍을 틀어막고 서 있는 이사벨은, 솔직히 의지는 대단하지만 전력으로 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제로에 가까운 승산이라도 만들어내려면, 자신이 악마군주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놈이 회복하고 나면 끝이야. 오로지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악마군주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놈에게 타격을 입힐 기회가 다시 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이나 나중이나, 당장 쓸 만한 방법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고위급 악마에게도 위협적인 살상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스킬인 디바인 크로스는 여전히 쿨타임에 걸려 있고, 검술과 방패술을 기반으로 한 다른 스킬들은 악마군주에게 치명타를 입히기엔 위력이 부족하다.

작은 피해라도 여러 번 중첩되면 타격을 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몸 상태가 이래서야 그런 방식으로는 가망이 없다.

뿌득.

“으윽.”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뭔가 해보고자 악마군주를 향해 나아가던 알렉스는, 발목에서 들려온 좋지 않은 소리와 함께 몸을 휘청거리다가 바닥을 짚었다.

‘쓰읍…… 걷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나.’

공격은커녕 운신조차 쉽지 않은 상태.

알렉스는 이를 갈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능력한 아군들의 모습이 보여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른다.

가만히 있지 말고 치유의 성법이라도 걸어준다면 도움이 될 텐데.

악마군주가 내뿜는 강대한 기운에 위축되어 있던 성직자들은, 놈의 파멸적인 무력을 목격한 후로 완전히 저항 의지를 잃은 채 하나같이 바닥에 엎드려 신의 이름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욕이 절로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비난의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이런 압도적인 절망 앞에서 마음이 꺾였다고 지탄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에.

알렉스 본인조차도 이사벨이 아니었다면, 싸움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자신에겐 놈의 유혹을 따른다는 선택지라도 있었지, 다른 이들은 그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결말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 비난은 하지 않으마. 그렇지만 뭐라도 도움이 되어줄 순 없는 건가?’

숫자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몇백에 달하는 수의 성직자들.

이만한 전력이 신에게 기도하며 구원을 바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알렉스는, 문득 어떤 가능성이 번뜩이며 떠올라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이런 멍청한!’

알렉스는 황급히 스킬창을 띄웠다.

악마군주가 등장하기 전, 잡졸이긴 하지만 상당수의 악마들을 격퇴하며 레벨이 하나 올랐었다.

워낙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번의 레벨 업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알렉스 Lv 90]

[잔여 스킬 포인트 1]

45레벨에 배운 디바인 크로스.

70레벨에 배운 천상의 가호.

습득조건에 레벨 제한이 있는 이런 스킬들은, 궁극기라고 따로 호칭될 정도로 다른 스킬들보다 뛰어난 성능과 효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90레벨에 도달한 현재.

알렉스는 세 번째의 특별한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한 상황이었다.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목록을 떠올린 상태에서, 알렉스의 두뇌가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물론 스킬 트리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이미 구상해 둔 것이 있긴 하다.

다만 여러 경험을 쌓으며 이전의 계획이란 것도 조금씩 변경되고 수정되었기에, 90레벨의 스킬에 대해서도 무조건 이거다! 라고 확정하기가 조금 애매했다.

그래도 육성 방향과 전혀 맞지 않는 스킬은 어차피 습득조건에서 미달되기에, 선택지는 딱 두 개로 나뉘게 된다.

‘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뭘 찍어야 하지?’

첫 번째 후보는 임모탈 아바타.

알렉스가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스킬로, 신의 힘을 받아 죽지 않는 불멸의 화신이 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모든 디버프 상태이상 및 물리 공격과 마법 공격 가리지 않고 어떠한 피해에도 면역이 되는, 소위 무적이라고 말하는 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스킬.

다만 게임 속 모든 스킬을 통틀어서 가장 사기적인 능력인 만큼, 지속시간이 매우 짧다는 단점이 있었다.

‘현실이 된 지금은 어떨까? 몇 초 단위의 무적은 지금 상황에선 무의미해. 내 힘으로는 적어도 몇 분 정도는 되어야 악마군주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텐데.’

무적 버프를 본인이 아니라 타인에게 걸어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임모탈 아바타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사벨에게 스킬을 써서 몇 초라도 시간을 벌어준다면, 충분히 악마군주를 썰어버릴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할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끝내주는 특수 스킬은, 디바인 크로스나 천상의 가호처럼 본인을 중심으로만 발동하게 되어 있다.

‘이게 아니면…….’

두 번째 후보는 인스퍼레이션 스킬.

성령 감응이라는 버프를 받아 모든 스킬 위력이 대폭 증가하고 쿨타임을 크게 감소시켜 주는, 성기사의 최상급 보조스킬이었다.

‘인스퍼레이션도 훌륭한 스킬이지. 다만 이걸로 과연 악마군주에게 맞서는 게 가능할까?’

공격력을 끌어올린다는 측면에서는 합격이다.

문제는 컨디션이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알렉스가, 악마군주의 반격을 버틸 수 있겠냐는 점.

만약 디바인 크로스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쿨타임 감소 효과가 적용된다 해도 지금 바로 디바인 크로스가 다시 충전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한방에 놈을 끝낼 수 있다면 모를까. 필살기라 할 수 있는 디바인 크로스가 없는 지금 상태로는, 공격력을 끌어올리는 게 완벽한 해답이 될 순 없어.’

임모탈 아바타와 인스퍼레이션.

둘 다 아주 유용한 스킬인 것은 맞지만, 현 상황을 헤쳐 나가기에는 각각의 부족한 점들이 있었다.

‘그래도 어차피 이 둘 중에서 골라야만 하…… 엇?’

짧은 순간 동안 더없이 깊은 고뇌에 빠져 있던 알렉스는, 문득 스킬 목록을 다시금 확인하고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스킬이지만, 선택지가 하나 더 있기는 했다.

파이어티 링크.

독실한 유대라는 의미를 지닌 이 스킬은, 성기사들 사이에서 궁극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쓸모없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인 스킬이었다.

효과는 간단하다.

동일한 신앙을 지닌 아군이 근처에 있을 경우,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증가하게 된다.

대상 아군의 수가 늘어날수록 능력치의 증가 폭이 점점 커지기에, 효과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스킬처럼 보인다.

‘하지만 따져보면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지.’

일단 신앙을 지닌 직업군이라고 해봐야, 성기사와 사제 두 개의 클래스가 전부일 뿐이다.

게다가 게임 속에선 유저들의 시작 지점이 제각각이고, 국가가 다르면 종교 또한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신앙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어찌어찌 같은 국가의 성직자 클래스를 모은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아군이라는 판정을 받으려면 결국 같은 파티에 소속이 되어야 하는데, 한 파티에 성직자의 수요가 많아 봐야 몇이나 있겠나.

한 명이나 두 명을 대상으로 링크가 적용되어 봐야, 능력치의 증가폭이 다른 궁극기들을 포기하고 선택할 정도로 매력적일 순 없다.

‘그렇다고 파티를 전부 성직자로 채우면, 당연히 헬 파티가 열리는 거고.’

아무리 모든 능력치가 높아진다고 해도 동일 직업군으로만 파티를 이루어서야, 상위 던전의 공략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물론 제법 효율이 나오는 사냥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리품의 배분 문제로 넘어가면 또 엄청나게 골치가 아파지게 된다.

정상적인 파티에서야 직업군 별로 필요한 장비가 나뉘지만, 같은 성기사와 사제만 모여 있는 파티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에 90레벨의 여러 특수 스킬 중에서, 파이어티 링크는 계륵이란 말도 아까운 쓰레기 스킬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라면……?’

알렉스는 의지를 잃고 허수아비처럼 널브러져 있는 성직자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신이 여럿 존재하는 게임 속과 달리, 여긴 모든 성직자들이 예루스를 섬기는 단일종교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다.

그리고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아군이라는 조건이, 번거로운 파티 시스템의 제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을 것이었다.

‘물론 확실한 게 아닌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어쩌면…….’

[파이어티 링크 Lv 1]

잠시 망설이던 알렉스는 이내 포인트를 지르고야 말았다.

어차피 다른 스킬들을 찍어도 승산이 높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아예 좀 더 모험심을 가지고, 도박에 올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단을 내렸다.

성검을 바닥에 꽂고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알렉스는 간절한 희망을 발산하며 새로 익힌 스킬을 사용했다.

‘연결이…… 된다!’

알렉스는 마치 고결한 헌신 스킬을 사용했을 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떠한 끈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몸속에서 약동하는 새로운 힘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모든 능력치의 증가.

힘이 빠져가던 손아귀의 악력이 되살아나며, 무겁기만 하던 몸이 조금씩 가벼워져 간다.

그러나 희열은 금세 좌절로 변질되었다.

파이어티 링크의 능력치 증가 효과는, 아주 약간의 상승 폭만을 보인 채 멈춰졌다.

이유는 명확했다.

주변에 있는 수백 명의 성직자들 중에서, 링크가 유지되는 것은 오직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제자리에 서 있는 이사벨 한 사람뿐이었다.

‘염병…… 다른 조건이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건가? X발…… 아아악!’

고작 한 사람분의 상승효과로는 무의미하다.

괜한 희망으로 들떴던 탓에 정신의 충격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도박에 실패한 알렉스가 목구멍 밖으로 울분의 감정을 터뜨리려는 찰나.

지이잉!

손에 쥔 성검이 맹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알렉스의 시선이 성검 알페리온으로 향했다.

마치 디바인 크로스의 신성력이 폭발하는 순간처럼, 정면으로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빛이 성검에 모여들고 있었다.

‘이건……?’

이윽고 사방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신을 부르짖던 성직자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루스 님…….”

“신…… 신의 사도…….”

“아아, 사도시여!”

깜깜한 암흑 속에서 횃불을 들고 무리를 이끄는 자.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광명을 발견한 성직자들이, 신의 이름에 이어 사도 알렉스라는 명칭을 부르짖었다.

유대가 이어진다.

성직자들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파이어티 링크의 효과가 발동되며 알렉스의 몸속에 새로운 힘들이 채워졌다.

“허, 흐하핫.”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도박이 성공했다.

파이어티 링크의 효과가 수백 명 분량의 능력치 강화를 중첩시켜 준 덕분에, 육신의 자연재생력 또한 비상식적으로 높아졌다.

고작 몇 초가 지난 사이에, 알렉스는 자신의 부상이 더는 움직임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넘쳐흐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힘이 전신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네놈…… 지금 뭘 한 거지?”

무언가 분위기가 급변했음을 파악한 악마군주가, 혼란스러운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전해왔다.

스스로의 몸에 담긴 힘의 크기를 가늠하던 알렉스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적이다 X새야. 넌 뒤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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