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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48화 (148/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48화

사도 알렉스(5)

“흥미롭구나. 인간의 육신으로 그 정도의 힘을 다루는 게 가능한 것이었던가.”

나긋한 목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누구 하나 눈조차 깜박거리지 못하는 적막한 상태였기에, ‘그것’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잘 들려왔다.

그나마 인간들 중에서는 영웅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지를 지닌 알렉스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정지해 있던 사고기능을 움직였다.

‘저건 대체…… 어떻게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압박감이…….’

상급 악마라면 이미 상대해 본 경험이 있고, 마계화 현상으로 강화되었다고 해도 지금의 전력이라면 어찌어찌 격퇴가 가능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단지 근처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만드는 저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창백한 얼굴로 ‘그것’의 모습을 주시하던 알렉스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인지하고 입안의 살을 씹었다.

으직.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짐과 동시에 등줄기로 전기가 흐르는 듯한 쓰라린 통증이, 흐려져 있던 그의 정신을 다시금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어서 알렉스의 입에서 핏방울이 내뱉어지며, 투박한 운율을 지닌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장의 찬가]

이지가 흐려진 눈으로 멍하니 멈춰 있는 다른 아군들을 깨우기 위한 스킬.

소량의 능력치 상승과 정신계통 상태이상의 내성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진 노랫소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던 사제와 성기사들이 반응을 보였다.

“으으…….”

“허억, 훅!”

하지만 그럼에도 상황은 그다지 긍정적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것’이 내뿜는 기운에 휩싸여 있던 성직자들은,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알렉스와 다르게 도무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전력의 8할 이상이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나머지 역시 간신히 몸은 일으켜 세웠지만 명백한 두려움으로 물든 눈을 하고 있었다.

전의를 잃지 않고 저항의 뜻을 내보이는 사람은, 알렉스가 가장 신뢰하는 이사벨을 포함해 고작 두 자릿수도 되지 않는 극히 일부뿐이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대로는 전투에 돌입해도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 자명했기에, 알렉스는 아군이 마음을 다스릴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고자 ‘그것’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정체를 밝혀라, 악마. 필시 이름 없는 잡졸은 아닐 터.”

“이름이라…….”

진지하게 소통할 생각이 아니라 단지 시간이 필요해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지만, 상대는 꽤나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은 악마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때는 마족들을 지배하던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나, 너무도 오랜 시간을 갇혀 지내며 많은 부분이 소실된 지금은 과거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몸에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낀 알렉스는, 손아귀의 힘이 풀릴 것만 같아 다급히 성검을 꽉 움켜쥐었다.

‘악마군주? 지랄하지 마! 그런 놈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악마군주라면 마계화 현상이 벌어지는 지역 따위가 아니라, 진짜 마계의 심처에서나 등장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게임을 즐길 당시의 정보를 떠올려 보자면, 군주라는 명칭을 단 악마들은 하나같이 이벤트 형식으로만 가끔 등장하는 특수한 보스 몬스터였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가장 쉬운 난이도의 악마군주조차도, 만렙 유저 12명이 모인 파티로 공략을 시도해야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바이로크의 성직자들이 사라진 것은 네놈의 짓인가.”

“음? 아아, 아무것도 모르고 바깥의 봉마진을 건드려 나를 깨워준 인간들 말인가. 내겐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지.”

자칭 악마군주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알렉스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거에 지녔던 위격의 일부를 되찾은 후에,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그들의 흔적을 쫓아 인간들의 도시까지 찾아갔었지. 한데…….”

갑자기 얼굴의 웃음기를 싹 지운 악마군주가 재차 말을 이었다.

“아직은 완벽한 자유를 되찾은 게 아니더군. 친숙한 환경을 떠나 너희 빛나는 벌레들을 몇 마리 잡아먹었을 뿐인데,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더란 말이지. 슬프게도 회복을 위해 다시 이 공간으로 돌아와야 했느니.”

신세한탄을 하듯 떠들어대는 악마군주의 말을 들으며, 알렉스는 주위의 아군들의 상태를 곁눈질로 살폈다.

여기저기서 신성력이 흐르며 성법이 발현되고, 두려움에 짓눌려 있던 안색들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가는 게 눈에 보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해본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저놈이 상급 악마를 뛰어넘는 존재인 것은 확실해.’

아마도 놈의 정체가 악마군주란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유저들로 가득했던 게임이 아닌 이곳의 전력으로는, 악마군주와 맞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도 거짓은 아닐 거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오랜 세월 자신을 구속한 봉인시설에 다시 돌아와 처박혀 있을 리가 없긴 하다.

완전히 힘을 회복한 군주급의 악마가 아무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면, 대륙은 진즉에 멸망하고도 남았을 테니.

오랜 세월 봉인되어 약화된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육신의 그릇이 그 막강한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여물지 못한 것이라 짐작된다.

무릎을 살짝 굽혀 자세를 낮춘 알렉스가 악마군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실드 차지]

어차피 싸우지 않고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달아나 목숨을 부지했다고 쳐도 결국 시간이 흘러 놈이 모든 힘을 회복하고 바깥에 나오게 된다면, 그 순간이 바로 인간세계의 종말을 고하는 날이 될 것이다.

싸워볼 만한 기회는 오직 지금뿐.

방패를 앞세워 달려 나간 알렉스가 악마군주와 부딪힘과 동시에, 성직자들의 성법이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며 신성력이 물결치듯 흘러 넘쳤다.

알렉스가 시간을 끄는 동안 두려움의 일부를 떨쳐낸 성직자들이, 그의 돌진을 신호 삼아 호응해 온 것이었다.

아군을 강화하고 사특한 힘을 제압하는 성스러운 힘들이 알렉스와 악마군주가 서 있는 자리에 집중되었다.

“음? 대화는 이제 끝인가? 그게 너희들에게 베풀어주는 내 마지막 자비였거늘.”

그러나 쏟아지는 성법의 포화 속에서, 악마군주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심판의 일격]

까가각.

놈을 향해 검을 휘두른 알렉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꺼운 철판 위를 긁는 것처럼 불쾌한 소리만 들려올 뿐, 빛의 칼날은 녀석의 피부조차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뭐가 이리 단단해!?’

사제들이 전력을 다해 발휘한 성법도, 반쯤 비명이나 다름없는 기합을 지르며 달려와 무기를 찔러 넣는 성기사들의 공격도.

악마군주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성검으로 가하는 알렉스의 검격조차 튕겨낼 정도이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완성되지 않는 육신으로도 이렇게 수준 차이가 난다니. 이래선 승산이…….’

공격능력을 제법 갖추었다고는 하나, 결국 탱커 포지션에 특화된 그의 능력으로는 악마군주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애초에 게임에서도 만렙 파티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악마군주이고, 이런 보스급 몬스터의 레이드는 철저한 역할 분담이 필요한 법이다.

흔히들 딜이 박힌다고 표현하는 유의미한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것은, 공격능력에 특화된 딜러 직업군.

그것도 악마계열에 추가 피해를 가하는 옵션의 장비들로 도배를 해야 악마군주의 레이드가 가능하니, 알렉스의 힘으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신의 이름으로 사악한 존재를 멸할지어다!”

‘그래, 이사벨이라면!’

익숙한 고함소리에 절망감에 물들어 흐릿해지던 알렉스의 눈빛이 다시금 번뜩였다.

자신의 공격은 먹히지 않았지만 이사벨의 괴력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비록 게임 속 만렙 딜러들의 화려하고 위력적인 스킬들에 비교하면 손색이 있을지언정, 이사벨의 공격능력은 충분히 딜러 직업군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탱커 하나와 딜러 하나가 갖춰졌다고 해도 여전히 전망은 밝지 않지만, 악마군주의 상태도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희망을 가져봄직도 하다.

“심판하노라!”

알렉스의 영지에 머무르는 몇 년 새 기존의 단발에서 중장발에 가까운 길이로 자라난 이사벨의 머리카락이, 신성력을 머금은 백금발로 변하며 아름답게 휘날렸다.

디바인 익시드.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힘을 담은 이사벨의 몸이, 악마군주의 머리 위쪽으로 솟구쳤다.

콰직!

“그렇지!”

벼락처럼 내리꽂힌 이사벨의 폴액스가 악마군주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것을 본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크아아악-”

좌우로 갈라진 머리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온다.

밝아진 안색으로 재차 환호하려던 알렉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섰다.

악마군주의 비명이 이내 웃음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아아악, 학! 푸하하하핫! 이런 반응을 원했나?”

당황한 이사벨이 무기를 회수하고 다시금 몸을 돌리며 회전력이 실린 공격을 가했으나, 그보다 먼저 악마의 꼬리가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콰앙.

“크읏!”

“이사벨!”

이사벨의 갑옷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그녀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치명상은 면한 것 같지만 안색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아하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유물인 갑옷에 디바인 익시드로 강화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방금 그 한방으로 몸뚱이가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조각난 머리가 하나로 합쳐지며 처음의 형태로 돌아온 악마군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인간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어찌 이리도 나약한 존재인 것인지.”

악마군주는 얼굴 앞에 자신의 손을 펼치고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자라난 길쭉한 손톱들을 감상하듯 바라본다.

“과거에는 너희를 어여삐 여긴 신들이 우리 악마족의 행사를 방해했었으나, 지금의 세상에는 더 이상 주시자들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는군. 남은 것은 그저 잔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초월자들이 남긴 찌꺼기뿐인가. 물론 미물에 불과한 너희들은 그런 거대한 변화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은 악마군주는, 이윽고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너는 다른 인간들과는 조금 차이점이 있구나. 관찰할 가치가 있어 보이니, 네 생명을 거두는 것은 가장 나중으로 미뤄주마.”

그렇게 알렉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을 둘러싼 성직자들을 향해, 악마군주는 펼쳐져 있던 손바닥을 휘둘렀다.

가벼워 보이는 손짓이었으나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것처럼, 사람들의 육신이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단 한 번의 손짓에 어림잡아 백 명에 달하는 인원의 목숨이 사라졌다.

대량의 핏물이 사방으로 튀며,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악마군주가 내뿜던 존재감을 견디며 싸우고자 마음을 다잡았던 아군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서렸다.

‘저게 뭐야…… 저런 걸,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 건데.’

알렉스는 자신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격차가 너무 심하다.

어떤 강적을 만나도 매번 전력을 다해 부딪쳐 돌파해 온 알렉스지만, 이번만큼은 저항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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