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46화
사도 알렉스(3)
사건이 벌어진 곳은 알렉스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도시, 서부 지방의 바이로크 교구였다.
소속구인 글라즈번을 떠나 순례행을 돌던 시기에 들렸던 교구들 중 하나.
그곳의 성직자들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모두 증발해버렸다.
연락이 끊어진 바이로크 교구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의 다른 교구에선 인원을 파견했고, 이내 신전을 비롯한 도시 내 여러 장소에서 악마의 것이라 추정되는 농도 짙은 흑마력의 흔적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만 그 뒤로는 꽤 많은 인력을 투입했음에도 수사에 영 진전이 없다는 소식이다.
이야기를 전해 듣던 알렉스는 곧바로 바이로크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꽤나 특별한 일을 경험했던 장소이기에 잊히지 않는 선명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진다.
‘거긴 고대유적이 있던 곳이잖아? 게다가 그 안에서 마계화 현상을 발견했고.’
잡몹 중의 잡몹인 고블린을 소탕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유적지.
그리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위험요소인, 암흑의 기운으로 가득 찬 공간.
‘분명 그쪽 교구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떠났었는데.’
마계화가 진행되어 환경이 변질된 땅에는, 쓰레기통에 파리가 꼬이는 것처럼 자연스레 악마가 등장하게 된다.
대륙에 그런 장소가 발견되면 교단은 전력을 다해 정화와 봉인의 작업을 진행하여, 그곳을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켜야 한다.
알렉스는 그 당시 자신의 보고를 받은 바이로크 교구의 성기사단장이, 당연히 윗선에 알려 필요한 과정들을 진행시켰을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한데 그에 관해 교황에게 질문을 건네자, 그는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식의 반응이 나왔다.
-마계화? 교단에 보관된 고대의 서적들 중에 그런 명칭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만…… 으음, 그게 설마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마계화 현상을 옛 전설 속에나 나오는 괴담의 일종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알렉스는 뻣뻣해져 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바이로크 성기사단장의 반응이 어째 너무 밋밋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교단 사람들이 마계화 현상 자체에 대해서 전혀 모를 거라곤 생각을 못 했지.’
게임의 세계관 설정과 이곳 현실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한다.
교황조차도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표현이 아니냐고 묻는 판국에, 일개 지방 교구의 성기사단장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알렉스의 경고에도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게 당연했다.
‘마계화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면 그냥 유적탐사 정도로만 생각하고 가벼이 여겼을 텐데. 제대로 된 조치가 취해지지도 않았을 테고.’
이번에 발생한 사건이 악마와 관련된 것이 확실하다면, 유적지의 마계화 지역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본다.
발견 당시 그곳의 오염도는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 미지의 유적 자체가, 마계화의 진행을 억제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조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렇게 아무런 대응도 없이 내버려 둔 뒤로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악마가 있으면 때려잡고 마계화 지역은 정화와 봉인을 진행해야겠지. 하아, 조용히 영지에 처박혀 지내고자 했는데 세상이 내버려 두질 않는구만.’
정화 및 봉인 작업은 교단의 사제와 성유물들을 갈아 넣어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탐색과 전투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마와 교전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교단에서 가장 강력한 팔라딘인 그가 빠져선 안 되지 않겠나.
평범한 팔라딘들로 그런 임무를 수행하려면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할 확률이 높고, 어쩌면 제때 악마를 격퇴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상황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괜히 교단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뒀다가, 아예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번지면 그게 더 문제다.
이번 사안의 위험도에 대한 경고와 함께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하라는 뜻을 교황에게 전하고, 알렉스는 서부로 떠나기 위한 채비를 갖췄다.
* * *
“이사벨은 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알렉스를 혼자 보내진 않을 겁니다.”
“혼자라뇨. 영지에서 데려가는 성직자들만 백이 넘는데.”
“제가 그들보다 못 미덥다고 여기십니까?”
“그런 소리가 아니잖습니까…….”
둘째아이를 낳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산모가 따라나서는 것에 찬성하고 싶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이사벨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악마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로 이사벨을 막는 것은, 같은 팔라딘인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반대로 입장을 바꿔 이사벨이 안전하지 못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 자신도 컨디션이 나쁘다는 이유로 쉬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알렉스가 휘하의 성직자들을 이끌고 바이로크에 도착할 때 즈음.
도시 안에는 교황의 지시로 타 교구에서 모여든 수백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한 규모의 성직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성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인원으로도 알렉스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교구 하나의 성직자들이 전부 증발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수준 낮은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예기치 못한 상황에 갑작스레 공격을 당했다고 쳐도, 고작 하급 악마 따위라면 교구 하나를 전멸시킬 정도의 피해를 입히진 못했을 것이다.
최소로 잡아도 중급 이상.
상급에 달하는 악마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상대가 상급의 악마라면 이만한 전력으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어.’
알렉스는 과거 성전에서 마주쳤던 상급 악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인간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파괴력과 생명력을 한 몸에 지닌 존재.
강철보다 단단한 방어력을 지닌 알렉스 본인과 극강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사벨의 연계로 결국 격퇴에 성공하긴 했지만, 조금만 운이 나빴어도 당하는 것은 자신들 쪽이 되었을 터였다.
‘하물며 이번에는 유적지에서 발견했던 마계화 지역을 조사해봐야 할 것 같고.’
제물을 바치는 소환의식을 통해 물질계에 발을 들이는 경우와 달리, 마계화가 진행된 지역 안에서 악마들은 본신의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적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이 튀어나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괜한 위험에 뛰어들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 망할.’
마계화 지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며, 시체에 꼬이는 파리 떼처럼 자연스럽게 악마들이 나타나게 된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대륙을 집어삼키는 위기로 자라나게 될 테니,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결국 자신이 발 벗고 나서서 확인과 조치를 취해야했다.
이미 전해 들은 대로 도시 내에선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알렉스는 곧바로 사람들을 이끌고 예의 그 유적지를 발견한 장소로 향했다.
고블린 소굴이었던 동굴을 지나 유적지 안으로 들어선 알렉스는, 훅 하고 풍겨오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피부 위로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엉겨 붙는 느낌.
입구의 통로에서부터 벌써 좋지 않은 분위기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공기부터가 이전과 다르군요.”
“그래요. 심상치 않습니다.”
곁에 붙어 있는 이사벨과 짧게 몇 마디를 주고받은 알렉스는, 경계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채 안쪽을 향해 발을 디뎠다.
길이 좁기에 수백의 인원들이 들어서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느낌이 영 좋지 않았기에, 선두에 선 알렉스는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지난 일행들은 이어서 넓은 방에 도달했다.
알렉스와 이사벨이 몇 년 전에 박살 냈던 리빙 아머들의 파편이 그대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다만 추억을 되새길만한 그런 흔적들은 알렉스의 관심을 조금도 끌지 못했다.
“이런 씁…….”
그런 것들보다 먼저, 진흙 같은 색을 띤 점액질이 바닥과 벽면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황의 향과 비슷한 퀴퀴한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군데군데 자라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생김새의 식물들을 살펴본 알렉스는, 이곳에 조성된 환경이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게임 속 마계 던전들의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계화의 진행도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 모양인데.’
사방에서 혐오스러운 흑마력의 기운이 한가득 풍겨온다.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들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환경이기에, 사제들이 스스로와 아군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지런히 성법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 안을 잠시 둘러보던 알렉스는 반대편에 있는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안쪽에서 스톤 골렘과 싸웠었지. 그 방의 중심부 아래에서 마기가 흐르는 걸 감지했었고.’
유적의 시설을 만든 관계자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남긴 사념 같은 게 나타나, 잠깐 대화를 했던 것도 기억난다.
입구가 아닌 고블린 땅굴을 통해 들어왔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이야기를 멈춘 사념체는, 알렉스에게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때 어찌어찌 말을 잘해서 이곳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차던 알렉스는, 이내 출입구를 지나 스톤 골렘이 튀어나왔던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리빙 아머의 파편들과 마찬가지로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방 한쪽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어서 방 안의 중앙에 위치한, 두꺼운 철판으로 뒤덮여있던 바닥 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으음!”
“알렉스. 저건…….”
거대한 구덩이가 일행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바닥의 철판은, 안에서 폭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찢겨져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안에서 뭔가 나오긴 했나 보군.’
알렉스가 구덩이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자, 바닥을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이 그를 반겨주었다.
잠시 가만히 어둠을 내려다보고 있자, 꾸물거리는 촉수 하나가 안에서 튀어나와 그의 다리를 잡아채려 들었다.
콰직.
발을 들어 촉수를 짓밟아 터뜨린 알렉스는, 인상을 구긴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런 썅. 무저갱의 입구가 열렸잖아?’
마계화가 일정 수준 이상 진행된 지역은, 그 특유의 환경 때문에 공간 자체가 물질계도 마계도 아닌 중간의 무언가로 변이를 일으키게 된다.
무저갱의 입구란 마계화로 변질된 공간과 연결된 통로의 명칭을 뜻한다.
익숙한 게임식으로 표현하자면 마계화 지역은 일종의 인스턴트 던전이며, 무저갱의 입구란 그 던전으로 넘어가는 게이트나 포탈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마계화가 이 정도까지 진행이 되었다면, 악마 한 마리만 상대하고 나오면 끝나는 일이 아닌데.’
땅이 오염된 것을 넘어 새로운 공간이 생성될 정도라면, 마계화의 진행도가 거의 최대치에 달했다는 소리다.
운이 좋으면 중급 운이 나쁘면 상급 악마와 싸워야겠거니 하는 생각만 하고 왔는데, 예상보다 위험도가 더욱 높아졌다.
안쪽의 공간이 얼마나 확장되었는지는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가 알기로 이렇게 통로를 넘어 들어선 공간에는 하급과 중급의 악마가 수십 마리쯤 우글거리는 게 기본이었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상급 악마까지도 여러 마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알렉스는 자신을 따르는 일행들에게 몇 가지 경고를 전한 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어차피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해결이 늦어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기에.
이윽고 신성력으로 무장한 수백의 전사들이, 신의 가호를 외치며 알렉스의 뒤를 따라 무저갱의 입구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