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42화
성검의 비밀
‘아니, 어? 알페리온? 이게 왜 또 있어?’
세계관에 하나뿐인 유니크한 아이템도 게임에서라면 입수 조건을 만족시킨 유저의 수만큼 존재할 수 있다.
그야 게임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현실이 된 이곳에서 어떤가?
알렉스는 다급히 자료를 뒤적였다.
관련된 정보가 있기는 했다.
남서관구의 성유물 보관소에서 확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검으로 추정되나 극심한 손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다 정도의 기록이 전부였지만.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복잡한 표정으로 또 다른 성검을 내려다보던 알렉스는 이내 그것을 쥐고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지이잉!
강한 떨림과 함께 망가진 칼날이 산산이 부스러지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어서 빛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알페리온과 똑같아. 하지만 어떻게 동일한 장비가 또 있을 수 있지?’
물론 완전히 똑같은 기능을 가진 아이템이 두 개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준이 높은 물건일수록 희귀해지는 건 사실이나, 아무리 대단한 물건이라 해도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유일하다고 판정된 물건이라 해도 복제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건 아니긴 하다.
‘흐음?’
두 번째 알페리온이 내뿜는 빛의 칼날을 주시하던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신성력의 칼날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밝아져 갔다.
동굴 안이 한순간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가, 이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
‘뭐야?’
알렉스는 황당한 얼굴이 되어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신성력이 담긴 빛을 방출했던 두 번째 알페리온이 온데간데없이 소멸되어 버렸다.
“알렉스? 왜 그러고 있습니까?”
“아니, 방금 빛이…… 검이 사라졌…….”
“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멍하니 서 있는 알렉스의 곁으로 다가왔던 이사벨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돌려 일행들의 얼굴을 본 알렉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방금 전의 강렬했던 빛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사벨과 길 안내를 맡았던 다른 사내까지도 아무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성유물들을 구경하며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원.’
기이잉.
알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던 알렉스는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엇?’
기존의 성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알페리온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다.
외형은 낡은 검 손잡이 그대로지만, 그 내부에는 분명 이전까지와는 다른 강맹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알렉스에겐 익숙하기만 한 신성력의 기운이었기에 딱히 미지의 현상에 대한 경계심을 느끼진 않았지만, 자연스레 의문이 뒤따르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뭐지? 뭔가 굉장히 강렬한 힘이 느껴지긴 하는데…… 설마 성검이 다른 성검의 힘을 흡수한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알페리온을 노려보던 알렉스는 일단 성검에서 눈을 떼고 다른 일부터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검의 비밀을 파헤쳐 보는 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하는 편이 낫다.
지금으로선 이곳에 쌓여 있는 성유물들의 처리가 우선이다.
그렇게 기이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잠시 억누르고, 알렉스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사벨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애써 변명하며 동굴을 빠져나왔다.
* * *
동굴에서 수거한 성유물의 처리는 순조로웠다.
사람을 모아 성유물들을 영지로 옮겨온 알렉스는 곧바로 교단의 고위층에 연락을 넣었다.
물론 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갑옷과 괜찮아 보이는 성유물 몇 개는 따로 빼둔 상태로 말이다.
‘어이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에 의해 성유물 몇 개가 내 창고의 물품과 뒤섞여 버렸네? 하하! 결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회수한 성유물의 수가 많아서 그렇게 빼먹어도 딱히 티가 나지 않았다.
전쟁 통에 암흑교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추측되는 다량의 성유물을 찾아냈다는 소식에, 교단에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적극적으로 알렉스와의 협상에 임했다.
다른 팔라딘이었다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적당히 치하하고 넘어갔겠지만, 명성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존재감이 커진 알렉스가 연관된 일이기에 몇 마디 사탕발림 따위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지루할 정도의 밀고 당기는 시간이 오간 후에, 알렉스는 교단을 통해 원하던 보상을 만족스러울 만큼 얻어낼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이 부족하지.’
동부의 교구들이 암흑교와의 전쟁으로 초토화되었기에, 다시 새로 신전에 사람을 채워 넣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각지에서 넘어온 사제들로 최소한의 구색을 갖추고 있지만, 고위사제는 물론 교단의 무력인 성기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알렉스의 요청은 그런 사제와 성기사들을 최대한 충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영지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겠지.’
싸울 수 있는 자들과 그들을 치료할 사람들.
개인적인 이득을 보상으로 얻기보다는, 영지의 미래를 생각해서 꼭 필요한 인력들을 채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언제까지고 자신이 영토 전체의 방위에 나설 수는 없으니, 어정쩡한 재물보다는 항상 부족하게만 여겨졌던 인력을 수급하는 편이 낫다.
다른 영지들 역시 성직자의 수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알렉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던 교단은 결국 타 교구들을 쥐어짜 내 그의 영지로 인력을 보내주었다.
‘교구의 병력과 영지의 병력은 별개로 쳐야 하지만, 사실 내 손아귀에 들어왔으면 내가 써먹을 수 있는 패나 마찬가지지.’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영지 내 신전에 기거하는 성직자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다.
다른 영주들이라면 도움이 필요할 때 협력요청을 보내는 정도가 최선.
하지만 알렉스는 주교의 품계를 지녔고, 그가 지배하는 주교령 내의 신전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재치권이 없는 명의주교인 그는 원칙적으로는 다른 성직자들에게 관여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전관예우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교구장과 같은 주교위의 품계이자 이 땅의 영주이며 성전의 영웅이기까지 한 그의 입김에, 성직자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기사의 수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충원된 인력은 대부분 사제들로, 성기사는 고작 두 명을 보내왔다.
그 두 사람마저도 나이가 거의 50에 가까운,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노인들이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도 교단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따로 별말을 하진 않았다.
사실상 동부에서 현재 제대로 된 성기사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교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나마 알렉스와 이사벨, 그리고 그 뒤를 따라나선 쥬시온과 그의 부하단원들이 더해진 루빌랑 도시가, 동부에서 가장 많은 팔라딘을 보유하고 있는 영지였다.
“알렉스. 생도들과 함께 주변 타운들을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 부탁할게요. 나도 같이 가고 싶기는 한데.”
“알렉스는 이제 영지의 일에 집중해야지요. 매번 영주가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 정상은 아니었으니까요.”
집무실에 앉아 있던 알렉스는 보고를 전하는 이사벨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문서와 씨름을 하는 것보단 외부에서 칼질이나 하는 게 속이 편하긴 하다.
그래도 의무를 내팽겨 칠 순 없으니 귀찮아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생도들의 수준은 쓸 만하던가요?”
“나쁘지 않습니다. 새로 오신 선배님들이 훌륭한 교관이 되어주셔서 훈련도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사벨은 영주성이 위치한 루빌랑 교구의 성기사단장이 되었다.
단장직을 수행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지만, 그녀 역시 성전에서 제법 공적을 쌓았기에 아주 무리한 인사는 아니었다.
물론 다른 교구였다면 그래도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알렉스의 영지 내였기에 그의 영향력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했다.
편제도 제대로 유지되지 않은 교구의 성기사단장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냥 무의미한 감투는 또 아니긴 하다.
교단에서 보내준 인력 중 대부분은 사제이고, 정식 팔라딘은 겨우 2명을 지원해 줬을 뿐이지만, 대신 팔라딘 수련생들을 수십 명 추가로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수련생이기에 아직 성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전투력도 어정쩡한 이들이지만, 그렇다 해도 영지에 큰 도움이 되는 무력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거의 견습기사에 준하는 수준을 갖춘 이들이기에.
사람이 부족한 동부에서는 병사 한 사람도 아쉬운 판국이니, 팔라딘의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지만 견습기사 수준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건 분명 큰 쓸모가 있었다.
교구에 속한 병력이기에 그들을 영지의 사병과 똑같이 부릴 순 없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알렉스의 영토 내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알렉스의 가장 든든한 아군인 이사벨이 성기사단장이 되었기도 하니, 훈련 명목으로 영지의 자잘한 일들에 수련생들을 투입하기도 쉬웠다.
말하자면 영지의 방위체계 일부를 교단에 위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식 팔라딘으로 몇 사람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내겐 훨씬 이득일지도. 단장인 이사벨이 어리다고 뻣뻣하게 나오는 놈도 없어 다루기가 쉬우니.’
질 대신 양으로 때우는 것이기에 부족함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영지 주변에 출몰하는 마수와 몬스터들을 처리하기엔 충분한 무력이다.
외부의 위협이 줄어든 만큼 영지가 더욱 안정되고 발전이 빨라질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이번 알렉스의 나들이는 굉장히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영주님. 여기 다음 분기 상단들에 발주를 요청할 물품들과 지난번 논의했던 조세법의 일부 변경에 관한 안건, 그리고 노후 시설물에 대한 보수 계획과 관련된 서류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점차 나아지는 영지의 사정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던 알렉스는 보기에도 끔찍한 문서들을 한가득 안고 다가온 헥터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행정 쪽의 일처리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영주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정말 한숨도 못 자고 일만 했습니다. 이제 이리 돌아오셨으니 저도 조금은 쉴 수 있겠군요.”
“고생이 많았네, 헥터. 빠른 시일 내로 어떻게든 영지의 행정관을 더 구해와야겠군.”
“그래주신다면 저야 감사하…… 영주님? 어디 가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스는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단지 서류가 보기 싫어 헥터에게 업무를 떠넘길 생각인 것만은 아니었다.
행정업무를 볼 수 있는 인력을 보충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 발로 뛰고자 함이다.
‘교구에 들러서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물어볼까? 이번에 사제들도 새로 많이 들어왔으니, 한두 명쯤은 어떻게 빼볼 수 있을지도.’
문맹률이 높은 이 세계에서 관리가 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바꿔 말하자면 글을 배운 이들이라면 행정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것.
사제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글을 알아야 하니, 아무나 붙잡아도 관리의 업무가 가능한 이들이긴 하다.
‘문제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사제들에게 관리업무를 도우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는 건데.’
이사벨의 휘하로 둔 팔라딘 수련생들은 그나마 훈련이란 명목으로 부려먹을 수 있었지만, 사제들에겐 그런 방식으로 일을 시킬 수가 없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자신의 요청이라고 해도, 사제들이 영지의 관리업무를 대행해 주겠다고 나서진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말을 잘하면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진 않을까 생각했기에, 알렉스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신전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