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8화
동부의 영주(4)
퀴퀴한 죽음의 향기만이 감돌던 황폐해진 동부에도 어느덧 활기가 찾아왔다.
성전의 종료 후 각 국가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국민들을 빈 땅으로 이주시켰고, 한번 무너졌다고는 하나 도로와 건물, 개간된 경작지 등 최소한의 인프라는 갖춰진 동부는 빠르게 기존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국토를 넓히고자 하는 욕심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지만, 몬스터와 싸워가며 아예 새로운 개척지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국력을 소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그에 비하면 적은 투자로 훨씬 효율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이 확실해 보였기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동부의 땅에 자원과 인력을 보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영지도 처음에는 무너진 시설들을 복구하는 데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교단의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이제는 그럭저럭 사람이 살 만한 땅이 되었다.
다만 문제점이 아예 없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영주님.”
“……또야?”
“예. 시스턴에서 마수의 습격으로 작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시스턴이…… 남쪽 세 번째 마을이던가?”
“맞습니다. 본성을 기준으로 가장 외곽 쪽에 위치해 있습죠.”
헥터의 보고를 들은 알렉스는 검토하고 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지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토벌을 행하는데 어디서 자꾸 마수가 튀어나오는 건지. 일이 자꾸 쌓여서 쉴 틈이 없군.”
“……저도 요즘 기력이 딸려서 자꾸 눈앞이 침침해지곤 합니다. 어제 꿈에 죽은 옛 동료들이 나와서, 조만간 자기들과 함께할 것 같다 말하며 웃더군요.”
영주성이 위치한 도시 루발랑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비대장 헥터가 알렉스의 투덜거림에 동조하여 덩달아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할 말을 잃은 알렉스는 그의 눈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직책은 수비대장이라 부르지만, 영지 내에서 헥터만큼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영지 내의 민원들은 대부분 그를 통해 일차적으로 처리되며, 병사들의 관리뿐 아니라 물자보급과 인사행정, 외부 상단과의 거래 등 영내에서 헥터를 거치지 않는 업무가 오히려 드문 편이었다.
영지 내에 관료라고 할 만한 이가 워낙 부족하다 보니 벌어진 사태였다.
‘시키면 또 일을 잘하니까 안 시킬 수도 없고.’
전투원으로서의 무력은 평범한 용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잡무를 소화해 내는 능력은 의외로 탁월한 헥터였다.
용병대장으로 오래 생활했기에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사람을 다루는 법도 능숙한 편이고, 상단과 관련된 의뢰를 주로 취급한 덕분에 그쪽 인맥을 영지로 끌어와 쓰기도 있다.
상인들을 자주 접해서 그런지 계산에도 밝은 편이고, 임기응변에 능해 자잘한 사건사고가 발생해도 원만하게 처리하는 편.
인재가 부족한 알렉스의 영지에선, 다방면으로 부려먹기에 아주 유용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머스크족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나고 날 추종하는 팔라딘들까지 있으니, 헥터와 기존 용병대 출신 병사들의 무력이 뒤처진다 해도 별로 상관이 없지.’
사실상 영지의 실질적인 군사행동은 머스크 부족 용병들을 순찰대로 편성하고, 대전사인 펄을 순찰대장으로 임명해 그에게 일임해 두었다.
특수 훈련을 받은 레인저처럼 영지 곳곳을 정찰하며 경계망을 유지하는 머스크족 전사들은, 개개인이 충분히 정예병사라 부를 만한 실력들.
머스크 부족 출신 병사들이 영지 전역에서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나머지들은 도시 내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뭐 아무튼…… 또 영지 바깥을 돌면서 근처의 위험요소들을 제거하고 와야겠군.”
마을을 침입한 마수는 병사들이 처리했다지만, 그런 일이 발생했으니 주변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임무는 아무래도 위험도가 클 수밖에 없기에, 영지 내에서 가장 큰 무력을 가진 알렉스가 직접 나서서 행하는 편이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번에는 좀 빨리 돌아와 주십쇼. 영주님이 안 계시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난단 말입니다…….”
“크흠. 노력해 보겠네.”
울상을 짓는 헥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알렉스는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고 나도 뭐 빠지게 노력하고 있는데, 좀처럼 영지의 상태가 안정되질 않는단 말이지.’
기대와 달리 그다지 여유롭고 풍족하지만은 않은 영주생활을 돌아보며, 알렉스는 콕콕 쑤시는 통증이 느껴지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영지의 경영이 어려운 이유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첫째는 관리직을 맡겨 업무를 분담할 인재가 부족한 탓이고, 둘째로는 땅 자체의 문제 때문이다.
‘사람은 지금 있는 인력을 어찌어찌 돌려쓴다고 쳐도, 땅이 진짜 문제란 말이지.’
제발 그와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교황의 속마음인 건지, 알렉스가 받아낸 영지는 동부에서도 가장 끝자락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알렉스가 성전에서 가장 활약했던 곳이자, 멸망한 알바니아 왕국이 존재했던 땅이다.
한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암흑교의 교도들은 지금은 모조리 토벌되었지만, 당시에도 죽음의 기운에 오염되어 언데드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정도였던 땅은 악마까지 강림하며 마기가 스며들어, 좀처럼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영주성이 위치한 대형도시 루발랑 인근은 교단의 사제들이 나서서 정화의 성법을 펼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영지 전역의 면적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환경이 크게 변해 버린 이 대지에서는 마수의 출몰이 극도로 잦아졌고, 여전히 외진 곳에서는 자연적으로 언데드 몬스터가 발생하곤 한다.
‘하필 줘도 이딴 땅을 주냐. 뭐 그러니까 이리 넓은 영지를 받은 거긴 하겠지만.’
아마 알바니아 왕국이 아니라 대지의 오염이 없는 루미츠 왕국의 영토였다면, 끽해야 남작령 크기 수준의 영지를 받았을 것이다.
아무리 교황이 적극적으로 밀어준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동부점령을 위해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다른 국가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리 골머리를 앓느니 차라리 작더라도 안전한 땅을 받는 편이 좋았을지도. 물론 문제들만 해결한다면 이쪽의 성장잠재력이 훨씬 크겠다만…….’
만약 머스크족을 병사로 받아들이지 못했었다면, 수시로 출몰하는 마수의 위협이 크게 문제가 되었을 터다.
지금은 다른 수가 없어 계속 이렇게 꾸준히 영지 주변으로 사냥을 나서고 있지만, 본질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오염된 대지를 최대한 빠르게 정화해야만 했다.
교단에 정화에 능한 사제나 성유물을 더 많이 보내 달라 꾸준히 요청하고는 있지만, 사실 지금도 이미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는 터라 요구가 받아들여지긴 어려워 보였다.
“영주님. 외출하십니까?”
“음. 그렇…… 자네 안색이 왜 그러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이동하던 알렉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쥬시온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교황의 종복에서 알렉스의 추종자로 갈아탄 전 교황청 직할 기사단장 쥬시온은, 얼굴이 창백하고 살이 쭉 빠져 광대뼈가 도드라진 것이 마치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근 영주님께서 주신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다 보니…….”
“아아, 그랬지. 고생이 많네.”
앞서와 같은 이야기였다.
알렉스를 따라나선 쥬시온과 나머지 팔라딘들은, 현재 루발랑을 중심으로 천천히 영토 내의 오염된 땅을 정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팔라딘인 그들이 보조계통인 정화의 성법에 능통할 리는 없었지만, 교단에서 정화의 효능을 지닌 성유물 하나를 지원받은 것이 있기에 그들에게 맡겨둔 참이었다.
다만 효율이 썩 좋지는 않은지, 12명의 팔라딘들이 번갈아가며 신성력을 쥐어짜 내야 간신히 작은 범위의 오염지대를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저런 걸로는 어림도 없지. 내 영지 전체와 주변까지 전부 정화하려면…… 아마 사제 몇백 명쯤은 갈아 넣어야 어려울 텐데.’
“외부로 나가신다면 저희가 보필하겠습니다.”
뒤를 따르며 공손하게 말하는 쥬시온을 쓱 쳐다본 알렉스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굳이 여러 사람이 나설 일도 아니니, 경들은 하던 일을 마저 하도록.”
보통은 신성력의 탈진으로 몸 상태가 저리 나빠지진 않아야 정상이지만, 한두 번이 아니라 수차례의 반복이 이어지다 보니 신체에까지 적지 않은 부담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효율이 나빠도 조금이나마 정화구역을 늘리는 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보단 낫다.
그렇게 생각한 알렉스는 격려의 의미로 쥬시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몸을 돌렸다.
지쳐 보이는 얼굴이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으리라 판단했다.
몬스터와 목숨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닌데, 뭐 조금 지친다고 큰일이야 나겠는가?
“……알겠습니다.”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진 쥬시온은 과로사로 죽어도 순교로 쳐주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떠나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담아 대답했다.
그의 마음속에 사도를 따르기로 한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이 살짝 피어올랐다.
알렉스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영지를 위해 가신들을 갈아 넣는 훌륭한 악덕영주가 되어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방패가…….”
외부로 나가기 위해 무기고에서 무장을 챙기던 알렉스는, 자신의 방패가 눈에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가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최근 영주성 근처에 내어준 저택에 연구실을 차린 슈테판이, 이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던 아티팩트의 회수마법을 부여해 주겠다며 방패를 받아갔던 게 떠오른 것.
‘요즘 계속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그 양반하고 만나본 지도 좀 되었네.’
장인어른 포지션을 하고 있는 슈테판은 아무리 영주라 해도 알렉스가 이런저런 지시를 하며 부려먹기가 조금 곤란했기에, 영지에 도착한 뒤로는 만남이 뜸한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참에 얼굴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슈테판의 저택으로 발길을 향했다.
* * *
“자네 왔는가?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죄송합니다. 영지의 일로 정신이 없다 보니…….”
“아닐세. 바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갈까 생각하던 참이었네만, 마침 이리 찾아와주었군.”
알렉스는 앉혀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슈테판은, 이내 익숙한 방패를 들고 돌아와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때 부탁했던 아티팩트의 개량이 완료되었네.”
“아, 말씀하셨던 그 리콜 주문이 추가된 겁니까?”
“후후! 단순히 리콜 따위가 아닐세.”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는 표정을 한 슈테판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알렉스에게 개량된 방패의 성능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