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7화
동부의 영주(3)
동부 출신의 용병부족은 알렉스가 한눈에 보기에도, 용병 업계의 평균치를 상회하는 실력자들로 보였다.
아직 어려보이는 소년이나 머리가 희끗한 노인까지 하나같이 맹수와도 같은 기세를 풍긴다.
야성미가 너무 넘쳐 보여서 과연 병사로 써먹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스럽기는 한데, 통제만 된다면 능히 정예병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재목들이라 여겨졌다.
“나, 머스크족의 대전사 펄이다. 당신이 헥터가 말한 영주?”
알렉스의 앞으로 누군가 나섰다.
“이, 이런! 펄! 영주님께는 더 예의를 갖추게!”
“당신들의 예법, 나는 익숙하지 않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전신의 털이 북슬북슬한 외형의 사내가 자신을 막아선 헥터와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깃털이나 뼈로 된 기묘한 장식들을 걸치고 있는 것이, 꼭 무슨 인디언 추장 같은 생김새였다.
‘생긴 게 딱 바바리안이네. 대전사라고? 대표로 나선 것도 그렇고, 부족에서 가장 강하다는 뜻이려나?’
흥미로운 시선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알렉스는, 이내 헥터를 뒤로 물리고 사내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만. 내가 이야기하지.”
“죄송합니다, 영주님. 이들 같은 소수의 부족들은 공용어 대신 자신들만의 옛 언어를 주로 사용하던 이들이라 예절교육이…….”
“알겠으니 되었네.”
이제는 사실상 귀족이나 다를 바 없는 신분이지만 그렇다고 귀족적인 선민의식에 물들어 있진 않은 알렉스는, 사내의 격식 없는 말투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고대의 야만전사를 연상케 하는 외모의 사내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알렉스는, 이윽고 입을 열어 그들 부족의 처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땅을 원한다고?”
“그렇다. 강이나 호수와도 가까워야 한다.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기름진 땅, 원한다.”
“그렇게 하지.”
“……정말인가?”
망설임 없이 조건을 수락하는 알렉스의 모습에, 펄이라 이름을 밝힌 사내의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서렸다.
“난 내 밑에서 일하겠다는 이들에게 옹색하게 굴 마음은 없다. 단!”
그런 펄을 지그시 바라보며, 알렉스는 힘이 실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려면 먼저 그만한 가치를 증명해야겠지?”
“실력을 보여주겠다. 누구든지 상대할 수 있다.”
“좋아. 덤벼봐.”
“……?”
덤덤하게 내뱉어진 알렉스의 말에, 펄은 무언가 잘못들은 건가 싶은 표정으로 멈칫했다.
“내가 상대해 준다는 말이야.”
“……고용주 다치는 것, 안 된다.”
머뭇거리며 말하는 펄의 모습에 알렉스는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날 쓰러뜨릴 수 있다면 땅뿐만이 아니라 더한 조건이라도 들어주지. 음…… 가축은 어떤가? 너희 부족민의 수만큼 양을 내어줄 수 있다.”
알렉스의 제안에 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양은 매우 가치 있는 가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생활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주를 갖추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다.
털로는 옷감을 만들고 젖은 귀중한 식량이 되는 양은, 말과 더불어 인류의 동반자나 마찬가지인 귀중한 가축이었다.
그런 가축을 단번에 수백 마리나 얻을 수 있는 기회라니.
누구라도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사실 아무리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알렉스라 해도, 정말 그만한 재물을 선뜻 내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로는 뭐든 못하겠는가?
‘어차피 내가 질 가능성은 제로인데.’
끔찍한 괴물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과의 대련일 뿐이다.
일대일 대결로는 누구와 싸워도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가 없으니, 어떤 조건을 걸어도 알렉스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정말 약속하는 건가?”
“물론. 전투로 인해 내가 부상을 입게 된다 해도, 그대들에겐 어떤 불이익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신까지 들먹이는데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펄은 흥분으로 몸을 떨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머스크 부족 용병들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무기를 가져다주었다.
1미터가 살짝 넘는 심플한 형태의 단창이다.
다른 용병들도 대부분 비슷한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부족 전체가 창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준비되었다.”
창을 들고 사나운 기세를 흘리는 펄을 보며 알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한 창날이 당장이라도 미간을 찔러 들어올 것 같다.
‘역시 제법 실력이 있군.’
이미 직감적으로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하긴 했지만, 확실히 자세만 봐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보자…….”
고개를 돌린 알렉스가 주위를 살피는가 싶더니,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 따라 움직였다.
잠시 뒤, 알렉스의 발길이 멈춰 섰다.
“난 이거면 되겠군.”
알렉스가 땅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길이가 30㎝쯤 되어 보이는 삐뚤삐뚤한 생김새의 나뭇가지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중들의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즐기며, 알렉스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펄의 앞에 섰다.
열 살짜리 아이의 팔 힘으로도 부러뜨릴 수 있을 법한 나뭇가지를 들고 돌아온 알렉스를 보며, 말문이 막힌 펄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뭐 하는 건가?”
“실력 테스트.”
“나뭇가지로 싸운다? 나와?”
“오냐. 이거면 충분하지.”
펄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입장에선 모욕을 당한 것과 다름없으니, 분노가 치미는 것이 당연했다.
“후회해도 늦었다!”
당장 제대로 된 무기를 가져오라고 외치는 대신, 펄은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번개 같은 속도로 창을 내질렀다.
분명 쓰러뜨리면 큰 재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지 일단은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오! 제법인데? 이 정도면 견습기사가 아니라 평기사도 비벼볼 만하겠어. 용병 중에서 이만한 인재를 찾기는 진짜 어려운 일인데.’
창에 실린 힘과 속도를 통해 펄의 실력을 가늠한 알렉스는, 속으로 감탄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작 찌르기 한 수에 불과했지만, 알렉스의 경지에선 그것만 봐도 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스크 부족 용병들 중 몇 사람은 견습기사 정도는 되어 보이는 실력으로 느껴져 마음에 들었었는데, 그들 중 가장 강한 대표인 펄은 당장 기사서임을 받아도 될 정도의 수준임이 눈에 보였다.
‘이들을 병사로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믿음직스럽겠는걸.’
물론 마음이 흡족한 것과는 별개로, 알렉스는 이 대결에서 펄에게 철저히 힘의 격차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힘의 논리를 따르는 용병들을 완벽하게 휘어잡아 통제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강자인지 뼛속 깊숙하게 새겨주어야 한다.
검 대신 나뭇가지를 든 것도 이를 위한 퍼포먼스였다.
쉬이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창격에 정신을 집중하던 알렉스는, 이내 팔을 움직여 손에 쥔 나뭇가지를 창날의 옆면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힘의 방향에 교묘하게 간섭한 그 한 수로 인해, 창날은 알렉스의 옆구리를 스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입가를 씰룩거린 펄이 재차 창을 회수하며 다시금 찌르기를 펼쳤으나, 알렉스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공격을 회피하며 나뭇가지를 휘둘러 펄의 어깨를 때렸다.
찰싹!
“크윽!?”
굵기가 두껍지 않은 나뭇가지다 보니, 둔기로 맞았다고 생각하긴 어려운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들려온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펄은 기이할 정도로 묵직한 통증을 느끼고 절로 신음을 흘렸다.
안색이 붉어진 펄이 한층 더 사나운 투기를 뿜어내며 창을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그의 공격이 알렉스의 몸에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서로 박자에 맞춰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알렉스는 펄의 움직임에 따라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가 가하는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읽고 회피와 반격을 반복했다.
펄은 분명 기사급의 실력자였지만, 알렉스는 그런 기사 여럿을 동시에 상대해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있다.
당연히 대등한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찰싹! 찰싹!
오로지 나뭇가지가 펄의 온몸을 여기저기 후려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머스크 부족 용병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크아악!”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두르던 펄이 어느 순간 고함을 지르며 몸을 휙 돌렸다.
부아악!
무언가 비장의 한 수를 펼친 것인지, 회전하는 몸을 따라 휘둘러진 창날이 공기를 거칠게 찢어발기며 알렉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어렵지 않게 흘려낸 알렉스는, 나뭇가지를 휘둘러 펄이 무게중심을 잡고 있던 다리 쪽의 오금을 때렸다.
“으윽!?”
무릎이 접힌 펄은 한순간에 자세가 무너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고개가 아래로 꺾이며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농락을 당했단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압도적인 차이를 보인 패배였다.
적막한 바람이 주변을 맴돌았다.
머스크 부족은 중부로 넘어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부에서는 뛰어난 용병부족으로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던 이들이다.
전사들 중 몇몇 특출한 실력자들은 영지전에 고용되어, 무려 기사를 상대해 사로잡은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대전사 펄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물론 전장의 혼란을 틈탄 기습으로 이룬 성과였지만, 기사를 제압할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강자의 반열에 발을 걸쳤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기에 펄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알렉스와의 대결 결과는 그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망이군. 날 더 놀라게 해주길 기대했는데.”
알렉스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몸을 떤 펄이 고개를 들었다.
“난 부하 대우를 인색하게 하는 사람은 아닌데, 아무래도 가축까지는 안 되겠어. 내 밑에서 충실히 구르며 실력과 공적을 더 쌓고 난 뒤면 또 모를까.”
멍하니 알렉스의 입을 바라보고 있던 펄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으며 알렉스의 앞에 부복했다.
“머스크 부족의 대전사 펄이, 위대한 전사를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저희 부족민들에게 몸을 누일 수 있는 작은 땅 한쪽만 허락해주소서. 충심을 다해 영주님의 명을 따르며 보필하겠습니다.”
어차피 누가 되었던 고향인 동부로 돌아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적당히 대가를 받고 따를 생각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험난한 땅이 되었을 고향으로 돌아가 살아가려면, 자신들 부족민의 힘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힘들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
한데 그들을 고용하겠다는 영주가 이렇게 엄청난 강자였다니?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보가 아닌 펄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알렉스에게 부족의 미래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음. 너희들을 거두어주겠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알렉스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눈가를 찌푸렸다.
“응? 뭐야? 말을 잘하는데?”
“아…… 무식하고 예의는 없지만 시킨 일은 잘한다는 이런 식의 이미지가, 이전의 고용주들에겐 잘 먹히는 듯하여…… 헤헤. 저희가 부족민끼리는 아직까지 옛말을 쓰긴 해도, 정말로 공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아, 그래.”
“먹고살려면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은지라…… 험험, 처음에 무례하게 굴었던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아까와는 달리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는 펄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 야만인처럼 굴더니 컨셉충이었네. 복장도 일부러 저렇게 꾸민 건가?’
근처에 서 있던 헥터 역시 사기당한 사람의 표정이 되어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렇게 알렉스는 용병부족인 머스크족을 휘하로 거두게 되었다.
일반적인 용병들의 평균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실력자들이 다수인 이들이었기에, 급하게 모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훌륭한 성과를 보인 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