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5화
동부의 영주
소속구인 글라즈번 교구로 돌아온 알렉스는, 교구의 통신망을 이용해 교단의 본청으로 연락을 넣었다.
교황과의 핫라인을 연결한 알렉스는 그에게 에른가스트 공작가에서의 사정을 전했고, 알렉스를 사도라고 믿고 있던 교황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가 벌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본인의 정치적 역량을 극한으로 발휘해야만 했다.
-에른가스트가는 마이로스 왕국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가문이다 보니 그쪽 관계자들의 항의가 꽤 거셉니다만, 그럭저럭 원만하게 합의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래요? 고생하시네요.”
-……그리고 이제 동부에서의 전쟁이 완전히 종료되어, 모든 연합군들이 회군하겠다는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곧 교단의 이름으로 성전의 종결을 선포할 예정이니, 알렉스 경께서는 교황청으로 복귀해 이후 개최될 행사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사? 뭐 개선축제라도 한답디까? 소란스러운 자리는 거북해서 별로인데요.”
그런 사람이 왜 공작가에서 행패를 부려 소란을 만들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교황은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입을 통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래도 저희 쪽에서 분배할 영지의 관리와 지원에 대한 사안에 대해 여러모로 논의가 필요하니, 일단 조용히 방문하셔서 그 부분만 처리하도록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교황은 괜히 알렉스가 더 사고를 치지 않고 동부로 빨리 꺼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알렉스 역시 기다리던 일이었기에 그의 영주임명에 대한 절차는 매우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이사벨. 이것 좀 보세요. 여기 도시를 기준으로 저쪽까지, 그리고 이쪽 마을들하고 저기 강을 따라 쭉 아래까지도 제 관할이라네요.”
“앗! 영지의 규모가 상당하군요. 이 정도면 남서부 전체를 통틀어도 어지간한 백작령 이상입니다. 역시 교단에서도 알렉스의 대단한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나 봅니다!”
“제가 제법 날아다니긴 했죠.”
그보다는 교황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협박한 것이 더 주요하게 작용된 것 같긴 하지만, 알렉스는 굳이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크기가 백작령급 이상이라 해도, 전쟁으로 황폐화된 땅이라 다른 지역의 영지들과 비하면 모자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상 땅만 넓지 개척영지나 마찬가지인 셈.
그나마 교단에서 세금면제나 농토의 소유권분배 등을 미끼로 타 지역의 주민들을 끌어들이고, 다양한 물자와 인력의 지원을 약속했기에 개발이 어렵진 않을 거란 점이 다행이었다.
그런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 알렉스 혼자의 능력으로는, 작은 남작령 수준의 영지 하나를 꾸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연구만 하다가 고향 땅에 묻힐 줄 알았거늘. 이렇게 먼 길을 떠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구나.”
교단에서 넘겨받은 영지를 돌아보고자 동부로 향하던 알렉스는, 근처에서 들려온 슈테판의 목소리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슈테판 님. 갑자기 저희의 사정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후우, 아닐세. 아티팩트의 연구와 개발에 대한 지원금이 풍족하게 나와서 관심을 끄고 지내긴 했어도, 솔직히 페도놈 그 인간이 가주가 된 뒤로 문제가 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네.”
오랜 기간 정착해 살던 땅이고 죽은 딸아이와의 인연이 있기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라 말하며, 슈테판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윽한 눈길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먼저 떠난 이는 어쩔 수 없으니 산 사람을 생각해야지. 이제 남은 삶은 내 손녀딸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만을 보다가 눈을 감고 싶구먼.”
“아직 정정하신 분이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증손들이 크는 모습도 보셔야죠.”
“증손? 네 이놈, 설마 벌써!?”
“……아닙니다. 미래의 이야기를 한 겁니다.”
“크흠! 연구실을 다시 차리게 되면 가장 먼저 줄리안느부터 수리해야겠군. 내 자네를 지켜볼 것이야.”
“…….”
뭐지.
이사벨과의 관계를 허락받았던 게 아니었나.
왜 또 그런 흉흉한 물건을 언급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렉스는 입맛을 다시며 주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아티팩트 말이 나와서 생각났습니다만, 이거 혹시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아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슈테판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어엇!? 그건 분명 에른가스트가의 가보 중 하나인…… 그게 어째서 자네한테 있나!?”
“그러게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어쩌다 보니 제 품속에 들어왔네요?”
“공간계 술식이 부여된 초고가의 아티팩트라, 내가 연구 좀 하게 빌려 달라 그렇게 사정해도 만져보지 못한 보물인데…….”
말을 들어보니 과연 비싼 물건이긴 한 모양이다.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넘겨받은 슈테판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거 내가 좀 연구해 봐도 되겠는가?”
“망가뜨리지만 않으시면요?”
“크흠! 연구를 하다 보면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법일세. 그리고 어차피 이건 자네가 쓰지도 못할 물건이야.”
“예? 저는 왜 못 씁니까?”
“에른가스트의 혈족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일세. 차라리 낱낱이 분해해서 술식 하나라도 건지는 게 이득 아니겠나?”
슈테판의 말에 알렉스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근거리라도 무려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보물이니, 분명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거늘.
‘하필이면 핏줄로 주인을 가리는 귀속아이템이라니.’
기껏 챙겨온 보람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내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알렉스는 실망감을 지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만, 그러면 이사벨은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흐음. 이사벨이라면 자격은 되지.”
“그럼 고민할 것도 없네요. 이사벨에게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커흠! 어디까지나 자격이 된다는 것뿐이지, 이걸 이사벨이 착용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닐세. 자네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긴 어렵네만, 소유주 이전을 위한 복잡한 각인 절차도 필요하고…….”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한참 늘어놓던 슈테판은, 아무튼 자신이 좀 알아보겠다고 말하며 팔찌를 챙겨갔다.
‘……어째 느낌이 싸하네. 마법사들은 연구와 실험에 목숨을 건 족속들이라던데.’
설마 손녀에게 주겠다는 선물을 가로채서 이상한 짓을 하진 않겠지만, 알렉스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아티팩트를 살피던 슈테판의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차피 바로 사용할 순 없는 물건이라고 하고 자신이 마법에 대해서 뭘 아는 것도 아니니, 아는 인맥 중에서 유일한 마법사인 그에게 아티팩트를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던데, 외조부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온 이사벨의 모습에, 알렉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이사벨에게 선물을 하나 하려고 했는데…….”
“앗! 제게 말입니까? 어떤 겁니까?”
눈을 반짝이며 기대를 보이는 이사벨의 얼굴을 마주하며, 알렉스는 비어있는 양손을 들어보였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슈테판 님이 잠깐 살펴본다고 가져가셨습니다.”
알렉스는 사정을 설명하며 슈테판을 가리켰고, 이사벨은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자신의 선물이 될 예정인 팔찌를 보여 달라며 요구했다.
‘이사벨에게 이렇게 다 말해놨으니, 연구를 한답시고 마구 실험하다가 아티팩트를 망가뜨리진 않겠지?’
손녀인 이사벨을 꽤 아끼는 듯하니, 아무리 연구가 고파도 슈테판이 팔찌를 마음대로 다루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사도시여. 길이 조금 어긋난 것이 아닌지요?”
저 앞에서 슈테판이 이사벨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던 알렉스는,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았다.
“……아니. 그렇게 호칭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동부로 떠나는 일행은 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청에 들러 영지의 수여와 이후의 지원에 대한 협의를 마쳤던 알렉스는, 예상치 못했던 인원들까지 뒤에 달고 동부로 떠나야만 했다.
교황청 직할대에 속해 교황의 도구가 되어 부려졌던 성기사들이, 신의 사도로 여겨지는 알렉스의 추종자가 되어 그에게 헌신할 것을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근위단장이던 쥬시온과 휘하의 단원들까지 총 12명의 팔라딘들이, 알렉스를 따르기 위해 교황청을 떠나왔다.
교황의 입장에선 노예처럼 부리던 손발을 잘라 바치는 격이라 분통이 터졌겠지만, 사도를 수행하겠다는 팔라딘들을 막을 순 없었다.
괜히 여태까지 그랬듯이 강제로 그들을 통제하려 들다가 자칫 알렉스와 또 분쟁을 일으키게 되기라도 한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본인이 될 것이기에.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반적인 가신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열두 명의 팔라딘과 알렉스의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다.
‘영지를 꾸리려면 인재가 항상 부족할 테니 나야 거부할 이유가 없고.’
두 자릿수의 기사를 휘하에 두는 것은 대귀족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중세의 기사란 현대의 전차와 비교할만한 전력이고, 유지비 역시 비슷하게 나간다고 생각해야 하는 존재다.
그런 기사들을 무려 열두 명이나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알렉스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먹이고 입히고 관리하는 것만도 돈이 제법 들겠지만, 다른 영주들의 일반적인 봉신관계와 비교하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지.’
진짜로 계시를 받은 예루스의 사도가 된 것은 아니기에, 이들을 속여서 이용한다는 점이 좀 미안하기는 하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리하게 쓸 수 있는 건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는 쭉 영주로 호칭하십시오.”
“예. 죄송합니다, 영주님.”
“그런데, 무슨 용건이었죠?”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조금 우회하시는 것 같아 여쭈었습니다.”
“아하,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들려야할 곳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죄송합니다. 높으신 뜻이 있으셨군요.”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았기에, 알렉스는 그냥 가볍게 손을 저어 쥬시온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헥터 대장이 과연 일을 잘했으려나?’
알렉스는 사람을 모으라며 투자금을 내주었던 헥터 용병대에 대해 떠올렸다.
목적지인 동부로 가는 길에 미리 제안을 해두었던 그들과 합류해, 자신의 영지로 데려가야 한다.
뜻하지 않게 팔라딘들을 주워서 세력에 큰 보탬이 되긴 했지만, 원래는 용병들을 모아 병사로 만들어 자잘한 무력이 필요한 영지의 일들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기사와 병사는 또 쓰임새가 다르니, 그쪽 일은 그대로 계속 진행하는 편이 좋겠지. 헥터 대장이 용병대 규모를 크게 키워놨으면 좋겠는데.’
사실 투자라는 게 제대로 수익을 거두려면 장기적으로 보고 진행을 해야 옳겠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대부분은 단기간에 대박이 터지기를 바라는 법이다.
알렉스의 전 재산이라고는 하지만 쌈짓돈일 뿐이라 엄청난 거액도 아니었고, 그 뒤로 고작 두어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기에 용병대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을 리는 없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심 당장 병사로 활용할 수 있는 인재들이 대량으로 모여 있기를 기대하며, 알렉스는 일행들을 이끌어 헥터 용병대가 활동하고 있다고 연락을 받은 지역을 향해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