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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33화 (133/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3화

에른가스트(4)

“이, 이놈. 물러나라!”

“싫다.”

뒷걸음질 치는 공작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간 알렉스는 곧장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터엉!

“음?”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무언가 단단한 것이 알렉스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공작의 몸 주변으로 뿌연 막이 생겨나 외부에서의 접근을 차단한다.

알렉스의 시선이 공작의 손으로 향했다.

그가 끼고 있던 반지 하나에서 하얀 빛무리가 반짝거리며 회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티팩트? 하긴, 당연한가.’

공작위를 지닌 대귀족이라면 몸을 지킬 수단으로 아티팩트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만하다.

불투명한 장벽에 막혀 멈춰선 알렉스를 보며, 공작은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나를 공격하려 들다니. 하지만 더는 행패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은 감히 고귀한 핏줄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야.”

그렇게 말한 공작은 본인의 옷깃에 달려 있던 브로치를 잡아 뜯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발을 들어 강하게 짓밟았다.

콰직.

정교하게 세공된 장식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망가진 브로치에서 작은 불덩어리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저것도? 아티팩트를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군.’

혹시 공격마법의 일종인가 싶어 잠시 자세를 낮추며 경계하고 있자니, 손톱만 한 크기의 불덩어리들은 공작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창문을 뚫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퍼버벙!

삐이이익-!

‘……경보마법이었나.’

방패도 들고 있지 않은 터라 위력적인 공격마법이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단순히 빛과 소음으로 신호를 퍼뜨리는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맥이 빠진 알렉스가 자세를 풀고 공작을 바라보자,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치켜세웠다.

“곧 내 기사들이 들이닥쳐 네놈을 무릎 꿇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걸해 보는 게 어떻겠나?”

“흐음. 자신만만하시네. 근데 댁네 기사들과 붙는 건 뭐 그렇다 쳐도,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준다고 누가 그러던가?”

“크흐흐! 그럼 뭘 어찌할 거지? 이 아티팩트는 무려 오우거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배리어 마법이 각인된 국보급의 보물이다. 네까짓 놈이 아무리 두들겨봐야 결코 깰 수 없는 방벽이지!”

“아아, 그러셔?”

공작의 앞에 펼쳐진 방어막을 툭툭 건드려보던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기절한 호위기사의 롱소드를 주워든 이사벨이, 냉기를 풀풀 풍기는 얼굴로 공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능하면 더 튼튼한 걸로 준비하지 그랬나? 오우거의 파워에 견디는 정도로는 부족할 텐데.”

이사벨의 머리카락이 백금색으로 물들며 신성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디바인 익시드.

일반적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강맹한 힘이 그녀의 몸에 깃들었다.

콰앙!

굉음이 터져 나왔다.

벼락같은 일격과 동시에 이사벨의 손에서 롱소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과도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검날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진 것이다.

“오? 진짜 국보라고 할 만한 물건이긴 한가 보네.”

이사벨의 공격에도 여전히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는 불투명한 방벽을 보며, 알렉스가 약간 감탄한 어투로 말했다.

다만 버텼다고는 해도 꽤나 아슬아슬한 수준이었는지, 방벽은 처음과 달리 거미줄이 쳐진 것처럼 금이 잔뜩 생겨난 모양새였다.

한눈에 봐도 박살나기 직전인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아앗…… 이렇게 가벼운 무기는 오랜만에 다루다 보니, 힘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손잡이만 남은 롱소드를 내던진 이사벨이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배리어를 일격에 부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모양.

이어서 그녀는 손을 뻗어 금이 간 방벽을 후려쳤고, 내구도가 간당간당했던 마법방벽은 추가적인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와장장하는 소리와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

마법이 파괴되자 공작의 손가락에서 맴돌던 빛무리 역시 광채를 잃고 사라졌고, 국보급 아티팩트라던 반지도 마찬가지로 삭은 나뭇잎처럼 부스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더럽게 비싼 걸 텐데, 아까워서 어쩌나?”

“허억!”

알렉스의 이죽거림에 반응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창백해진 안색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공작은 앞에 선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마, 말도 안 되는! 이런 괴물 같은 년이……!”

“맞습니다. 페도놈, 당신이 만들어낸 괴물이죠.”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그려내며, 이사벨은 공작의 욕설에 대꾸했다.

이사벨의 이복오라비인 현 에른가스트 공작은, 그녀가 신성력을 각성하게 만든 계기가 된 인물이다.

비록 미수로 그쳤다곤 하나 그 끔찍했던 경험의 탓이었을까?

이사벨의 성법은 다른 계통에는 전혀 재능을 보이지 못하면서 오로지 신체능력, 특히 근력의 강화 쪽으로만 지나칠 정도로 치우친 발달을 해왔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그녀에게 가해진 제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의식 속에 깊게 새겨졌던 힘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조금은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사벨은 알렉스에게로 힐끔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혹은 만났다 해도 그의 곁에 나란히 설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크윽! 무슨 알 수 없는 소릴, 너 따위가 날 조롱하는 것이냐!”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바닥을 기며 이사벨에게서 멀어지려던 공작은, 이내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너희 모두 멀쩡히 내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번쩍!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공작의 모습이 사라졌다.

‘……블링크? 공간전이 마법이라고? 아니, 뭔 아티팩트를 몇 개를 가지고 있는 거야?’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뒷목을 주물렀다.

조금 전 공작이 손목에 걸린 팔찌를 움켜쥐자 무언가 반응이 일어났는데, 그 역시도 마법이 부여된 아티팩트였던 모양이다.

‘아주 황금 고블린이 따로 없네.’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 주제에 타고난 자리가 자리인지라, 분에 넘치는 물건들을 참 많이도 가지고 있다.

“아앗! 이런…… 알렉스, 이제 어쩌지요?”

“흐음.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겠네요.”

공작이 어디로 도망친 건지는 모르지만, 마냥 이 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은 선택은 아닐 터.

알렉스와 이사벨은 서둘러 공작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아까 공작을 부르실 때 말입니다.”

“네? 아, 페도놈 말입니까? 그자의 이름입니다.”

“어? 페도 놈인 게 아니라 이름이 페도놈이라고요?”

“네에…… 앗?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크흠. 아닙니다. 제가 조금 착각을 했네요.”

알렉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를 건드리는 소아성애자 놈이라고 욕하는 줄 알았는데, 타고난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닉값 오지게 하는 새끼였네.’

“저쪽이다!”

“침입자를 제압하라!”

마냥 우연이라기엔 기가 막힌 네이밍에 잠시 감탄을 하고 있자니, 저 앞에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페도놈이 발현한 경보마법에 달려온 공작가의 병사들이었다.

‘딱 그 자식만 손봐주고 후다닥 빠져나가는 게 베스트였는데. 이거 어쩔 수 없이 싸움이 커지게 되어버렸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몰려온 것을 보면, 그래도 공작가의 병력답게 잘 훈련된 병사들인 모양이다.

하지만 기사단도 아니고 일개 경비병들 따위가 두 사람을 막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이사벨이 다치면 곤란하니, 최대한 내가 나서서 처리하는 편이 낫겠지.’

맨몸이라 해도 기사가 병사에게 당할 리는 없지만, 그나마 성검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와 달리 이사벨은 아예 비무장이다.

“이사벨. 잠깐 멈춰요.”

“에, 넷?”

갑옷을 입지 않은 그녀가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면 자신의 마음이 아플 것이기에, 알렉스는 이사벨을 불러 세우고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며 병사들의 진형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하늘거리는 몸놀림으로, 알렉스는 창을 찔러오는 병사들의 공세를 파고들었다.

이어서 간결한 움직임으로 섬전과도 같은 찌르기를 반복하며, 알렉스는 병사들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크악!”

“악! 내 팔이!”

‘병사들이 무슨 죄겠냐. 적당히 제압해야지.’

검술의 달인이 된 알렉스는 인체의 수십 가지 급소가 절로 눈에 보였지만, 그를 피해 팔이나 다리의 근육에 일정한 손상만을 입히도록 검을 움직였다.

당장은 전투를 속행하기는 어렵겠지만 상처가 아물면 딱히 후유증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히 검을 컨트롤해 부상의 범위를 한정시킨 것이다.

“끄으윽…….”

“괜히 무리하게 움직여서 상처가 덧나면 영구적인 손상이 될 수도 있으니, 그냥 가만히 누워들 있도록. 그리고 이건 내가 좀 빌려 쓰도록 하지.”

경비들은 대부분 창과 방패로 무장한 상태였기에, 알렉스는 쓰러진 병사의 곁에 떨어진 방패를 주워들어 내내 허전했던 왼팔에 착용했다.

원래 사용하던 방패와는 형태나 품질에서 꽤나 차이가 있지만, 방패의 유무만으로 전투력이 엄청나게 갈리는 알렉스에겐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후우, 이제야 좀 안정감이 드네.”

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자꾸 비무장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전투에 대비해, 예비용으로 쓸 수 있는 방패 하나쯤 더 가지고 있어야할까 싶다.

‘소형 방패라도 좋으니까 평소에는 팔찌 같은 장신구 모양이고, 필요할 때만 방패로 변하는 그런 아티팩트는 없나?’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런 물건을 수소문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이사벨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제가 다칠까 봐 일부러 막았던 겁니까?”

“아, 그냥 좀 몸을 풀고 싶어서. 우리 두 사람이 다 나설 만한 전력도 아니었잖습니까? 하하!”

“흐응…….”

못마땅하다는 듯이 알렉스를 흘겨보던 이사벨은, 이내 신음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걸어가 떨어진 무기들을 주워들었다.

마침 중병기를 선호하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장비가 있었다.

“병사들이 쓰는 무기라 그런지 질이 썩 좋지는 않네요. 무게감도 조금 이상하고…….”

“에이, 그야 이사벨의 애병인 성유물과 비교하면 당연히 품질이 떨어지겠죠. 그래도 공작가의 사병이라 그 정도 장비를 쓰는 거지, 정말로 하급품이라면 이사벨이 그냥 쥐기만 해도 부러질 텐데요?”

“……제가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힘을 주진 않습니다!”

길쭉한 핼버드를 쥐고 한 번 휘둘러본 이사벨은 내키지 않다는 듯 무기를 노려보다가, 이내 바닥에서 핼버드 한 자루를 더 주워들었다.

부아악.

창대 두 개를 한 번에 쥐고 휘둘러본 이사벨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쓰러진 병사 한 명의 허리춤에 매인 가죽 띠를 풀러 창대를 하나로 묶었다.

“이제 좀 휘두르는 맛이 있네요.”

“아, 음. 그래요.”

쌍날 핼버드라는 흉악한 무기를 만들어 어깨에 걸치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뺨을 긁적거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병사들의 장비로나마 무장을 갖추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잘그락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와, 알렉스와 이사벨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기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익숙한 소음이었다.

‘전신갑옷의 금속음이다.’

아니나 다를까 완전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숫자는 일곱.

거기에 더해 꽤나 우습게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사들의 뒤에서 걸어오는 페도놈의 모습까지 보였다.

‘기껏 도망쳐 놓고 다시 돌아왔네?’

공작가의 기사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두 사람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란 계산을 한 모양이었다.

“건방진 것들! 감히 이 땅의 적법한 통치차인 나를 모욕하며 검을 들이댔으니, 그에 마땅한 응징을 한다 해도 교단에서 내게 책임을 묻지 못할 터!”

“이야, 자기가 유리한 것 같으니까 고새 기가 살았네.”

“저 무뢰배들을 붙잡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허헛, 참.”

알렉스의 입장에선 찾아다닐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페도놈을 쳐다보던 알렉스는, 이윽고 날카로운 기세를 발하며 접근하는 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무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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