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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32화 (132/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2화

에른가스트(3)

“갑시다.”

“네?”

품에 안겨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벨을 향해, 알렉스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놈한테 갑시다.”

“아…… 하지만-”

“뭐가 두렵다고 피해야 합니까? 거절한다고 해서 깔끔하게 떨어져 나갈 것 같지도 않은데, 이참에 확실하게 과거와의 매듭을 지읍시다.”

알렉스의 말에, 가만히 눈을 마주하던 이사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라면 계속 피하려 했겠지만…… 이제 제 곁에는 알렉스가 있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했던 것이기에 길을 조금 헤매긴 했지만 유년기를 보냈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사벨은 공작이 거주하는 영주성으로 알렉스를 안내했다.

“팔라딘 이사벨이 찾아왔다고 기별하라.”

날이 저문 시간이기에 잠깐의 기다림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곧 경비를 지나쳐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배부른 귀족답게 살집이 두툼하긴 했지만, 처음 만나본 에른가스트 공은 생각보다 평범한 외형을 지닌 남자였다.

‘때려죽여도 싼 놈이라기에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싶었더니. 하긴 그런 악질이라고 해서 얼굴에 범죄자라 써놓고 다니는 건 아니긴 하지.’

아무튼 이사벨에게 들은 말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

소파에 앉아 거만한 태도로 이쪽을 바라보는 공작의 얼굴이, 알렉스의 살기 어린 시선을 느끼고 찌푸려졌다.

“남자를 데려왔다고 하더니, 태도가 굉장히 불손하군.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따위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이냐!”

공작의 호통에 알렉스는 조용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홧김에 튀어나가 그를 때려눕히기라도 하면 일이 곤란하게 될 테니, 일단은 분노를 다스리고 있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았습니까?”

이사벨이 입을 열자, 공작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흐음. 많이 컸구나. 이사벨.”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용건을 말하십시오.”

“하, 건방진 년. 신전으로 도망쳐 십 년을 숨어 살더니, 이제는 목에 제법 힘을 주는구나.”

“말조심하시오. 당신 앞에 있는 이가 교단의 팔라딘임을 모르지 않을 터.”

“크흐흐! 성기사가 되었다고 해서 네년의 이름 뒤에 따라 붙는 에른가스트의 성이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웃음을 흘리며 내뱉어진 공작의 말에, 이사벨은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가문에 다시 발을 들인 이유가 뭔지나 말해보아라.”

“……외조부께 인사를 드리러왔을 뿐. 날이 밝으면 조용히 떠날 것이니 당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흥! 옆에 있는 그자 때문이겠지. 어릴 때부터 색기를 줄줄 흘리며 나를 유혹하더니, 신전에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남자를 꼬셔낸 모양이지?”

꽉 움켜진 이사벨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알렉스도 입을 쩍 벌리고 사고를 멈추었다.

대체 저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 뭐지? 어지럽네.’

다행히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어린아이를 강제로 범하려 했던 자가, 마치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말을 하니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좋다. 이제는 딱히 흥미가 동하는 몸뚱이도 아니니, 어떻게 굴리던지 내 알 바는 아니지. 너를 부른 것은 네가 내 기억에 남긴 오점을 지우기 위함이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머리가 도무지 따라가지 못해 가만히 멈춰서 있는 이사벨을 보며,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가문의 후계자였던 이 몸에게 상처를 입히고, 공연히 일을 크게 만들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뻔한 죄.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해라. 그럼 넓은 아량으로 지난 일은 용서해 주겠다.”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일 진데, 내뱉는 말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사람의 말을 쓴다고 해서 모두 사람인 것은 아니듯, 저것은 인간 대접을 해줄 필요가 없는 종류의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손목과 어깨를 돌려 관절을 풀며, 알렉스는 이사벨의 앞으로 나섰다.

어디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찾아왔는데, 더는 듣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자고로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라 했지.”

“뭣? 뭐냐?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이다. 외부인이 나설 때가 아니니 빠져라!”

“엄밀히 따지면 나도 외부인은 아니지 않나? 우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차오르는 분노로 숨을 몰아쉬던 와중에, 알렉스의 말을 들은 이사벨의 뺨이 붉어진다.

“네놈, 교단의 성직자라고 하여 이따위 무례가 허용될 것 같은가!”

공작이 소리를 지르자 곁에 있던 호위기사가 끼어들며 알렉스의 앞을 막아섰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흠.”

고위귀족인 공작가의 기사답게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 기도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물론 알렉스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거 요즘 자꾸 비무장으로 싸울 일이 생기네.’

슈테판의 손님으로 머물던 와중에 곧바로 찾아온 것인지라, 갑옷은 벗어두었고 방패 역시 개량 건으로 맡겨둔 상황.

휴대가 간편한 알페리온은 항시 소지하고 있어 아주 비무장인 건 아니지만,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 조금 아쉽다.

‘뭐…… 상관없나.’

그렇지만 이제는 기사 하나 상대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장비가 없어도 별로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알렉스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자, 호위기사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검 손잡이에 손이 올라갔다.

스르릉.

날카롭게 벼린 롱소드가 뽑혀 나오며, 접근하는 알렉스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정말로 목을 베는 공격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검을 들이대어 움직임을 멈추게 할 생각.

검술을 펼치는 상대의 자세와 근육의 움직임, 동작에 실린 무게 분배 등을 한눈에 읽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알렉스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오히려 보폭을 크게 내디디며 날아드는 칼날 앞에 목을 들이댔다.

“엇!?”

당황한 호위기사가 급하게 팔에 힘을 주며 검을 세우려는 순간.

상대방의 자세가 흔들리며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서, 알렉스는 호위기사의 손목을 낚아채며 팔을 비틀었다.

“크읏!”

이어서 반사적으로 붙잡힌 손을 빼기 위해 잡아당기는 호위기사의 움직임을 역으로 이용한 알렉스는,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며 손바닥으로 턱 아래를 후려쳤다.

갑옷을 입었지만 투구는 쓰지 않고 있던 탓에, 정확한 타점을 통해 흘러 들어간 충격이 상대방의 머리를 흔들었다.

맥없이 풀썩 쓰러지는 자신의 호위기사를 본 공작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놈! 미친 것이냐? 네놈 역시 저년처럼 교단의 팔라딘인 모양인데, 에른가스트와 척을 지고도 무사할 성싶은가!”

“그 말은 교단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인지?”

“뭣? 일개 팔라딘 하나 따위가 되도 않는 소리를…… 네놈이 무슨 추기경이나 교황이라도 된단 말이냐!”

교단의 위세가 대륙을 뒤흔든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팔라딘 한 사람이 일으킨 트러블 때문에 일국의 공작가와 적대하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설사 그 공작가의 수장이 저런 미친놈이라 해도, 귀족의 핏값은 무거운 법이었다.

신권이 왕권의 위에 있다고는 하지만, 교단이 귀족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귀족사회 전체가 반발하게 될 수도 있다.

공작 정도의 대귀족이라면 이교와 얽힌 정황이 발견되는 사건이 아닌 바에야, 교단에서도 어지간한 일은 양보를 해주더라도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길 선호할 것이었다.

‘근데 내가 또 그냥 평범한 팔라딘은 아니라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자 하였기에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진 않았으나, 알렉스는 교황에게 신이 직접 지목한 사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괜히 알렉스와 대립하려 했다간 손에 쥔 모든 권력을 잃을 수도 있었기에, 교황은 어떤 상황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사실 교황도 내 앞에선 내 눈치를 봐야 해.”

“미, 미친놈이었군. 네놈도 이사벨과 같은 교구의 소속이냐? 내 너를 붙잡아 넘기고, 그곳 교구장에게 무례함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도록 하겠다!”

“흐음. 안 믿어주나.”

“알렉스. 그만하세요.”

어깨를 으쓱이며 공작에게 다가가던 알렉스의 발걸음이, 이사벨의 목소리에 붙잡혀 잠시 멈추었다.

“이사벨?”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제가 사과하면 끝날 일이에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죄는 저자가 이사벨에게 해야죠.”

“…….”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젓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입을 다물었다.

‘아.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런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슈테판이 공작가의 가신으로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 혹여나 현 공작과의 트러블로 인해 외조부에게 폐를 끼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교황이 뒤를 봐줄 것이기에 한바탕 난리를 치고 튈 생각이었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가족이 걸린 일에까지 차마 제멋대로 날뛸 수는 없었기에 혀를 차며 몸을 돌려야만 했다.

“에른가스트 공. 원하는 게 사과 정도라면 해드리지요. 그것으로 우리 사이의 관계는 그만 정리하도록 합시다.”

“웃기지 마라! 감히 내 성에서 이런 난리를 피워놓고, 몇 마디 말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제 와서 또 말을 바꾸겠다는 겁니까?”

“거기 네놈! 네놈도 같이 꿇어라! 둘이서 진심 어린 사죄를 한다면, 자비를 베푸는 것도 고려해 보도록 하지.”

“허어?”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나 있던 알렉스는 공작의 말에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던 차인데, 저 인간은 자기가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것도 모르고 계속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닥쳐라!”

“뭣!?”

속이 끌어올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는, 옆에서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이사벨의 모습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분은…… 알렉스는 당신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입에 올리고 더럽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쓰, 쓰레기? 이년! 반쪽짜리도 핏줄이라고 크게 양보해 주려 했더니, 감히 네까짓 게 이 몸을 모욕해!”

“……앗.”

목소리를 높였던 이사벨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억울한 상황임에도 굴욕을 감내하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던 이사벨이지만, 사랑하는 이에게까지 모욕을 주려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말았다.

알렉스는 그런 이사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음을 지었다.

“이사벨. 애써 참으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저런 놈이 쿨하게 끝내고 넘어갈 리도 없잖아요? 분명 개소리를 지껄이며 다시 또 질척거릴 텐데.”

“그건…….”

“같이 사고 한번 칠까요? 외조부께서도 사실을 알면 이딴 가문에 붙어 있으려 하진 않으실 겁니다.”

당시의 이사벨은 신성력을 각성한 사실을 외조부에게 알리고, 신전에 들어가 교단에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과정에서 후계자였던 현 공작의 강간미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에, 슈테판은 그날의 사건에 대한 전말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가족에게 꺼내기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 자신만 떠나면 조용히 덮여질 일이라 생각했을 테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내뱉고 있는 공작을 앞에 두고, 알렉스와 시선을 교환하던 이사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저 쓰레기 같은 새끼. 이제야 패줄 수 있게 되었군.’

아무리 그래도 공작을 살해하는 것까지는 교단에서 커버해 주기 어려울 터.

일단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어루만져 주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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