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31화 (131/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1화

에른가스트(2)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방문이 열리며 찻잔을 든 이사벨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글거리는 슈테판의 눈빛과 함께 후끈하게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차를 타러 갔던 이사벨이 돌아오며 다시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이야기들은 잘 나누고 계신…… 앗? 그건 뭔가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이 올라간 쟁반을 내려놓은 이사벨이,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물건을 발견하고 궁금증을 드러냈다.

“아아, 이건 줄리안느라고 한단다. 오랜 연구 끝에 최근에야 만들어낸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병기지.”

“그렇습니까? 무기처럼 보이진 않는데 신기하군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들고……?”

“크흠. 기사라면 이런 물건에 관심이 있을 테니, 잠깐 구경시켜 주려던 참이었단다.”

“아하, 저도 좀 살펴봐도 되겠죠?”

“어엇!”

스스로에게 강화마법을 걸지 않는 이상, 신체능력이 일반인보다 뒤떨어지는 마법사 노인이 기사의 손길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순식간에 줄리안느를 빼앗긴 슈테판이 당황하며 표정이 급변했다.

이사벨은 손에 든 줄리안느를 이리저리 돌리며 만지작거렸고, 슈테판이 미처 제지할 사이도 없이 약간의 힘을 주어 총신을 활처럼 휘어지게 만들었다.

끄기깃!

“으허억!”

“앗? 무슨 무기가 이렇게 강도가 약하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불량품인가 보군요. 할아버지께서 실수하실 때도 다 있습니다.”

“부, 불량품…… 그건 내부에서 발생하는 압력을 견디도록 힘의 방향을 안쪽으로 집중하는 술식을…… 아니, 하지만 그렇게 악력으로 망가질 만큼 무르게 만들진 않았는데…… 분명 외부의 충격을 방지하는…….”

허탈한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슈테판을 보며, 위험에서 벗어난 알렉스는 이사벨의 어깨를 토닥거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잘하셨습니다.”

“……예?”

영문을 알 수 없던 이사벨은 갑작스러운 칭찬에 두 눈 가득 의문을 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마 아끼는 손녀에게 화를 내진 못하겠는지 표정만 살짝 우울해진 슈테판은, 아까까지와 달리 부드러운 태도로 대화에 임했다.

자부심이 컸던 본인의 작품이 망가진 것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는지, 힘이 많이 빠진 모양새였다.

“저, 죄송하지만 이 방패 말입니다.”

“음? 뭔가?”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알렉스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슈테판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에 기능을 더 추가할 순 없습니까?”

“뭐야? 지금 내가 만든 아티팩트가 만족스럽지 않단 소리인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방패와 거리가 떨어졌을 때 제자리에서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아티팩트의 제작이 가능한 인챈트 계열의 마법에 특화된 전문가.

게다가 자신의 방패를 만들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자리에서 꺼낼만한 소리는 아니지만, 솔직히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마법사를 만나 개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나.

그렇기에 알렉스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슈테판에게 방패의 개량 여부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 그런 기능이 있다면 알렉스에겐 매우 유용하겠군요!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알렉스의 방패 던지기를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던 이사벨은, 그가 그런 질문을 꺼내는 이유를 이해하고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끄응…… 마법이 부여된 장비에 또 다른 마법을 추가하는 건 굉장히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손녀가 짝이랍시고 데려온 녀석이 자신을 부려먹으려고까지 하는 게 얄미웠지만, 이사벨의 반짝이는 눈빛 앞에서 마음이 약해진 슈테판은 알렉스의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공간계 전이마법…… 텔레포트 같은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사용자에게 되돌아오는 리콜 주문 정도라면, 으음…… 어떻게 우겨넣을 수 있을 지도…….”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던 슈테판은, 생각을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품질의 마력석에 온갖 희귀시약까지…… 재료비가 엄청나게 들겠지만, 간신히 가능은 하겠구나.”

추가적인 마법부여가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답변이 들려왔기에, 알렉스의 눈에도 이채가 서렸다.

‘이사벨! 도움!’

물론 관계가 서먹하기만 한 슈테판에게 직접적으로 방패의 개조를 부탁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간절함이 한껏 담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사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 이사벨은 이내 알렉스의 마음을 알아줬는지, 꼬물거리던 손을 맞잡아 깍지 낀 채 슈테판을 지그시 응시했다.

“……크허흠! 알았다. 내 한번 손을 보도록 하마.”

손녀의 애틋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슈테판을 결국 헛기침을 하며 승낙의 의사를 밝혔다.

처가에 와서 생각지도 않은 혼수품을 받아먹게 된 알렉스는, 더 좋아진 방패를 쓸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게이머의 습성이라고 해야 할지, 가끔 장비에 대한 욕심이 강하게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준비할 게 많으니 못해도 한 일주일은 시간이 걸릴 터인데, 완성품은 글라즈번 교구로 보내주면 되겠느냐?”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냐.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다말고 끝을 흐리는 슈테판을 보며, 이사벨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용히 떠날까 합니다.”

“……그래. 그 편이 낫겠구나. 미안하다.”

“할아버지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허헛…… 그럼 슬슬 어둑한 시간이 되기도 했으니, 푹 쉬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자꾸나. 떠나기 전에 오랜만에 함께 오붓하게 식사 한 번쯤은 해야지.”

“네. 그리하겠습니다.”

“거, 자네도!”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옮긴 슈테판은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예?”

“크흠!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합세.”

“아, 예. 편히 쉬십시오.”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몸을 숙여 인사를 하자, 못마땅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던 슈테판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외조부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구는 분이 아니신지라.”

“아뇨. 이런 자리에선 당연한 태도시라. 사실 이 정도면 대단히 호의적인 거죠.”

“그렇습니까? 사실은 누군가를 소개해 본 것도 처음인지라, 많이 어색했습니다만.”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거닐던 때였다.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난 누군가가 길을 막아섰다.

“이사벨 님.”

“엇? 무슨 용건인가?”

누가 봐도 내성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보이는 복장의 사내는, 이사벨의 앞에서 허리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사내의 말에 이사벨의 몸이 경직되었다.

가문의 가주가 두 명 일리는 없으니, 그가 말하는 가주란 당연히 현 에른가스트 공작을 말함일 터.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준 전대 공작이 그녀의 친부이니, 현 공작은 이사벨에겐 이복오빠가 되는 사람이다.

“이사벨?”

호흡조차 멈춘 채 굳어 있는 이사벨의 모습에, 알렉스는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아…… 괜찮, 후우, 괜찮습니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내성으로 들어왔으니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군요.”

숨을 몰아쉰 이사벨은 이윽고 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고 여독이 쌓여 많이 피곤하기에, 지금은 갈 수 없다 전하시게.”

“예엣!? 아, 그, 하지만…….”

대귀족들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만큼은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다.

귀족가문의 일원으로서 직계라곤 하나 가장 밑의 서열에 있는 이가, 가주의 호출을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것은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인은 크게 놀라며 무심코 몸을 세워 이사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엇! 죄, 죄송합니다.”

“뜻은 이미 밝혔으니 당장 물러나도록.”

이사벨은 살기마저 느껴지는 싸늘한 태도로 하인을 노려보았다.

체구가 워낙 작은 탓에 겉모습은 귀여운 소녀 같지만, 손가락으로 사람을 눌러 죽일 수도 있는 이사벨이다.

그런 그녀의 기세를 일개 하인 따위가 태연히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 하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으나, 결국 더 따지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부친도 그렇고 친가 쪽과는 전체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것 같기는 했는데. 반응을 보니 짐작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양이네.’

알렉스는 뺨을 긁적이며 얼음처럼 냉기를 풍기는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긴 했어도 잠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닌데, 공작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을 보니 가문과의 관계가 상상 이상으로 안 좋은 편인 듯하다.

“이사벨. 괜찮은 거 맞죠?”

“아, 네…….”

복잡한 심정이 담긴 얼굴로 대답하며 멍하니 움직이던 이사벨은, 한참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알렉스. 제가 언제부터 교단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는지, 알려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어, 그런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군요.”

“사실 저도 알렉스처럼 교단에 들어오기에 앞서, 신성력을 먼저 깨우친 유형입니다.”

“아?”

신성력은 신앙을 기반으로 생성되는 힘이다.

하지만 마냥 신실하다고 해서 남들보다 빠르게 각성하거나, 신앙의 크기에 비례해서 위력이 강해지는 능력은 또 아니다.

수십 년을 교단에 헌신해온 독실한 신자가 늦은 나이에 신성력을 각성하기도 있고, 엄마의 손을 잡고 신전을 몇 번 들락거렸을 뿐인 어린아이가 신성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신성력을 몸에 품는 것도 결국은 일종의 재능이라 할 수 있는 영역.

그리고 최연소 팔라딘으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이사벨은,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신성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계기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알렉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사벨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주…… 그러니까 저와는 이복남매인 현 공작은 저보다 나이가 꽤 많습니다.”

“예, 뭐. 그렇겠죠?”

부친과 모친의 나이 차가 35년이나 된다고 했으니, 첫째 부인의 장남과 이사벨의 차이 역시 적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인간이기에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마 지금의 저와는 두 배쯤 되는 나이 차일 겁니다.”

이사벨의 설명에 알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30대 후반쯤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사벨의 이야기에, 알렉스는 심장이 조여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자가…….”

“네. 저를 겁간하려고 했었습니다. 이제는 십 년쯤 지난 이야기군요.”

역겨운 욕망을 드러내며 힘으로 자신를 내리누르고 강제로 옷을 벗기는 추악한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열 살도 되지 못한 어린 나이의 이사벨은 두려움에 떨며 간절히 기도했다.

신께서 그 악몽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자신에게 내려주기를.

세상 곳곳에서 생겨나는 무수히 많은 참혹한 절망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짓밟힌다.

이사벨은 그런 면에선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몸 한구석에서 따스하게 피어오른 신성력은 첫 발현인 만큼 작고 보잘것없었지만, 어렸던 그녀에게 성인 남성조차 뿌리칠 수 있는 근력을 잠시나마 부여해 주었다.

“만약 신께서 그때 응답해 주시지 않았다면…….”

알렉스는 작게 중얼거리는 이사벨을 힘껏 끌어안았다.

“아앗! 알렉스!?”

그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포옹이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다지만 여동생을 덮치려고 했어? 그것도 당시 나이가…… 허허! 그런 새끼도 후계자랍시고 작위를 물려받았고? 집안 꼬라지가 아주 지랄이네?’

이사벨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외조부인 슈테판 외에는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들었기에 이사벨의 가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현 공작이라는 그놈이 어떤 면상인지는 한번 봐야 할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