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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30화 (130/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0화

에른가스트

“저는 가문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말 두 마리가 오르자 꽉 들어차는 숲속의 오솔길을 나란히 따라 걸으며, 알렉스는 이사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친께선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가지신 탓에, 제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문에 있던 시절엔, 주로 외조부께서 저를 돌봐주셨지요.”

“음? 외조부께서 친가에 같이 머물러 지내셨단 말입니까?”

“아! 제 외가는 귀족가문이 아닌지라. 그분께선 에른가스트의 가신으로 본성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마법사시죠.”

“아하.”

“사실 알렉스에게 선물한 그 방패도 외조부께서 도움을 주신 겁니다.”

“그래요? 이번에 뵙게 되면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가문에 들르고자 하는 이유도 외조부께 인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교단에 들어간 후에도 항상 신경 써주시며 많은 도움을 주셨고…… 제게는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시기에.”

이사벨의 말에 알렉스는 입을 다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만을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건, 역시 친가 쪽의 사람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다는 말이려나.’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자신이 알아야 할 사정이라면 어차피 이사벨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기에, 알렉스는 굳이 캐묻진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제 부친은…….”

잠깐 동안 고민하던 이사벨의 입이 열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이,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일러 에른가스트.

에른가스트 공작가의 전대 가주.

이사벨의 부친은 알렉스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거물이었다.

‘공작가 출신이라 해도 승계 서열에서 밀리는 방계 혈족이려나 싶었는데, 아빠가 공작이었다고?’

생각보다 이사벨의 신분이 비범했다.

“그런데 전대…… 라면 이미 다른 이에게 작위를 물려주셨단 말입니까?”

“예. 첫째 부인의 장남이 현 에른가스트 공작입니다. 제게는 이복남매간이 되지요.”

의혹이 생기는 말이었다.

권력은 피붙이와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귀족들이 자식에게 작위를 일찍 물려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보통은 노쇠하다 못해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나 승계를 논의하려는 경우가 대부분.

‘그런데 벌써 은퇴하고 자식에게 작위와 영지를 물려줬다고?’

그에 대한 의문은 이어지는 이사벨의 말에 해소가 되었다.

“그…… 제 친부 되는 사람의 나이가 외조부님보다 더 많습니다.”

“엥?”

“어머님과의 나이 차가 35살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

나이가 35살인 것도 아니고 35살 차이가 난다니.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생각해보면 딱히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긴 하다.

나이 많은 권력자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를 건드리는 일이야, 고대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도 흔히 있었던 일이 아닌가.

‘이사벨이 지금 18살이니까…… 부친이라는 사람은 못해도 70은 넘겠군. 그럼 자식이 작위를 물려받을 만도 하네.’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듣진 않았지만, 고위귀족의 자녀인 이사벨이 어떻게 교단에 투신하게 된 건지 대강 짐작이 갔다.

‘집안 분위기가 개판이었겠지 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지켜줄 어른이라고는 외조부가 유일했다는 모양인데, 그마저도 귀족도 아닌 가문의 가신에 불과한 신분이니 발언권이 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부친이라는 전 공작이 어린 딸을 잘 챙겨줬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를 언급하는 이사벨의 태도를 보아하니 더 듣지 않아도 대우가 어땠을지 알만 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습니다. 그래도 알렉스에겐 알려야 한다 생각해서…….”

“그래요. 더 자세히 말하진 않아도 됩니다. 아무튼 그러면 공작가문의 사람들과는 굳이 만날 필요 없고, 그 마법사시라는 외조부님께만 인사드리고 나오면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이들을 피해 조용히 외조부님만 뵙고 떠날 생각입니다.”

“이사벨이 원하는 대로 합시다.”

알렉스는 웃음을 보이며 이사벨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가 유일한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한 사람이 중요한 거지, 나머지들은 얼마나 잘난 가문의 사람이든지 딱히 알 바가 아니었다.

푸르륵!

킹의 투레질 소리에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넓은 도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나누며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숲을 빠져나온 모양이다.

“공작령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앗, 제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보니 설명도 못 드렸군요.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아마 내일 해가 지기 전엔 들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길도 넓어졌으니 슬슬 속도를 내볼까요?”

“네!”

알렉스는 킹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옆구리에 가볍게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이윽고 한 쌍의 기마가 확 트인 널찍한 평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동부로 떠나겠다는 말이더냐?”

“네. 할아버지.”

“허허, 이 늙은 할아비를 두고 그리 먼 곳으로 가겠다니. 그럼 이게 살아생전 손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슈테판 로메르.

이사벨에겐 외조부가 되는 노인의 울적한 목소리에, 이사벨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크흠. 목이 조금 칼칼하구나. 오랜만에 손녀가 타주는 차나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앗! 제가 금방 타오겠습니다! 찻잎은 항상 두던 거기 있나요?”

“그렇단다.”

“그럼 잠시…… 두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길.”

꼿꼿한 자세로 이사벨의 옆에 앉아있던 알렉스는,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해.

이런 불편한 자리에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이사벨은 본인의 친부와는 거의 인연을 끊은 것처럼 말했었고, 사실상 유년시절의 보호자가 되어준 외조부 슈테판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즉 장인어른과의 첫 대면에 단둘이 남겨진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하지만 그런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진 않았는지, 이사벨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래. 알렉스라고 했나? 내가 말을 낮춰도 되겠지?”

“……예. 편히 말씀하십시오.”

“성전이다 뭐다 해서 대륙이 시끄러웠다지만, 내가 워낙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사는 통에 바깥의 소식은 잘 알지 못하네. 그래도 저 여린 아이가 교단의 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다니는데, 마냥 신경을 끄고 있을 순 없어서 내 가끔씩 그쪽 소식을 알아보곤 했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연 슈테판은, 알렉스의 얼굴을 주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자네도 제법 유명한 인사더군.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고 듣기도 했고, 능력이 상당히 출중한 모양이지?”

“소문이 어느 정도 과장되긴 했을 겁니다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을 지킬 수준은 됩니다.”

“흥. 신에 대한 헌신을 들먹이며 제 식구들에게도 깐깐하게 구는 교단에서 그리 파격적인 포상을 내릴 정도니, 능력이야 차고 넘치긴 하겠지.”

“…….”

분명 칭찬을 하고 있음에도 무언가 불만스럽다는 듯한 태도의 슈테판을 보며, 알렉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 방패도 자네에게 갔군.”

“예?”

“저거 말일세. 내가 만든 아티팩트. 이사벨이 말해주지 않았나?”

“아.”

이사벨의 성유물 갑옷과 같은 자동수복의 마법이 부여된 아티팩트.

습관처럼 들고 왔다가 방 한쪽에 내려놓은 방패를 가리키는 슈테판의 손짓에,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마음에 쏙 드는 보물입니다. 저 녀석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요.”

“크흠. 사실 손녀가 쓰려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그걸 다른 놈에게 홀라당 넘길 줄은. 저 아이가 그런 부탁을 해온 적은 거의 없기에, 제법 힘을 줘서 만든 작품인데 말일세.”

“아하하…….”

“쯧.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그래서 식은 언제 올릴 건가?”

“예?”

머쓱하게 웃던 알렉스는 슈테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혼인식 말일세. 동부에 영지를 꾸리겠다는 이야기는 아까 들었네만, 그래도 떠나기 전에 처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이 늙은 몸을 이끌고 멀리까지 가긴 어렵기도 하고 말일세.”

“아, 혼인식…… 이요. 예, 그, 뭐…… 해, 해야죠.”

“어째 반응이 이상하군. 이사벨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한 사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다.

‘우리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서로 알콩달콩하게 잘 살아봅시다!’ 하고 명확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모든 연애감정이 반드시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처음부터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걱정이 없겠다만…….’

육신은 이곳에 속해 있으나 영혼은 분명 다른 세계의 기억을 담은 존재.

자신이 이사벨과 맺어지는 것이 과연 괜찮을지에 대해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왔을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현대의 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당장의 감정은 이사벨과 함께할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있는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고 있었다.

“허헛! 이것 참…… 그러니까 자네는 내 손녀를 꼬셔서 저 먼 이국의 땅에 정착할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혼약에 대해선 확실하게 정해놓은 것이 없는 모양이군?”

“아, 음…… 그게 최근 계속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린 탓에 정신이 없었다 보니…….”

안색이 약간 어두워진 채로 말을 흐리는 알렉스를 보며, 슈테판의 눈썹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흐허허, 그래도 됨됨이는 괜찮은 남자를 데려왔으리라 믿었거늘. 하긴 저 아이가 언제 남자를 가까이 해보고 이성 관계를 경험해 봤겠나. 하핫! 그러고 보니 내 아직 자네에게 줄리안느를 소개하지 않았구먼.”

“그…… 예?”

슈테판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설치된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무언가를 조작하듯 서적들 사이로 손을 넣어 움직이자, 끼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의 일부가 움직이며 보이지 않던 숨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장치? 무슨 금고라도 숨겨져 있던 건가?’

알렉스가 눈을 껌벅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슈테판은 책장 안에서 무언가 기다란 물건을 꺼내들고 뒤로 돌아섰다.

“소개하지. 내 분신과도 같은 생애 최고의 걸작 줄리안느를.”

“어엇?”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기묘한 생김새의 막대기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거 설마 총입니까?”

“호오? 핸드캐논을 알아보다니, 창칼만 죽어라 휘두르는 기사답지 않게 제법 식견이 넓은 친구였군.”

이 대륙의 문명은 아직 총화기가 발달하지 않은 냉병기의 시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약을 이용한 병기가 아예 개발되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해결하지 못한 비효율적인 문제점이 많아 보급이 널리 되지 않았을 뿐, 대포나 원시적인 형태의 화승총 같은 화약병기가 분명히 존재하긴 했다.

‘갑옷을 뚫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개인화기를 만들 수만 있다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모든 국가가 보급에 혈안이 되겠다만.’

대포를 소형화하려는 시도로 만들어진 최초의 개인화기인 핸드캐논은, 그 위력이 기존의 원거리 병기인 활에 비해 딱히 압도적으로 우수하지도 않았다.

화약의 관리가 어려운 탓에 사고가 발생하기 쉽고 비에 젖으면 점화가 되지 않으며, 장전이 활보다 훨씬 느리다는 단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상용화를 위해선 아직은 갈 길이 먼 무기인 것이다.

다만 마법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약간의 예외는 있을 수가 있었다.

“줄리안느는 인챈트 계열의 술식에 특화된 학파에 몸담은 내가, 40년이 넘도록 갈고닦은 술식들을 접목시켜 만든 최고의 병기이자 아티팩트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군요.”

마법이 부여된 아티팩트라고 해도 전부 대단한 물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방패를 종이처럼 가르는 마법검처럼 명품이라 할만한 보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갑옷을 걸레짝으로 만드는 마법총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이 방아쇠를 당기면 여기 앞에 있는 총구에서 탄환이 발사되지. 기존의 핸드캐논은 한 번에 한발의 사격만 가능하지만, 내가 개발한 줄리안느는 무려 한 발이 아닌 열 발의 탄환이 흩어지듯 튀어나오게 된다네. 게다가 총열까지 두 개로 늘려서 탄환도 두 배로 나가지! 한번 방아쇠를 당기면 눈앞에 있는 물체를 산산조각으로 찢어놓을 수 있다네.”

“…….”

알렉스는 입을 쩍 벌리고 슈테판이 자랑하는 줄리안느를 바라보았다.

화승식이 아니라 레버 장치로 격발하는 것만 해도, 현 대륙의 기술단계를 몇 개나 뛰어넘은 총기다.

‘나 저거 알아.’

그리고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마침 알렉스가 지닌 현대의 지식에 그와 비슷한 물건이 존재하기도 했다.

‘아! 더블배럴 샷건! 유용한 대화수단이죠.’

그런데 왜 저런 흉흉한 물건을 손녀사위가 될 사람의 앞에서 꺼내는 걸까.

알렉스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저 멀리 놓아둔 자신의 방패가 눈에 들어온다.

왠지 빨리 몸을 날려서 방패를 잡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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