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9화
교황청(5)
“어찌…… 이럴 수가…….”
다리에 힘이 풀린 교황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거침없이 교황에게 다가간 알렉스는 그의 목 앞에 성검의 칼날을 들이댔다.
“아무래도 신의 의지는 내 쪽을 향하고 있는 모양이군.”
“사, 살려주시오.”
무표정한 모습으로 덤덤하게 내뱉어지는 알렉스의 말에, 교황은 흠칫거리며 두려움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흐음…….”
알렉스는 잠시 고민에 휩싸였다.
생명을 위협한 적을 살려둘 만큼 자비로운 성격은 아니지만, 교황을 죽이는 것은 복수심을 채운다는 만족감 외엔 자신에게 딱히 득이 될 것이 없는 행동이다.
반면 교황을 처리하고 나면 굉장히 번거로운 일에 엮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최고지도자를 잃게 되면 필연적으로 교단 전체가 들썩이게 될 것이다.
그럼 성전이 마무리되어가며 이제 겨우 안정기에 들어선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알렉스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이야기다.
이제 공적에 따른 보상을 받을 일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는데, 혼란을 수습하느라 또 기약 없는 딜레이가 생기게 될 테니까.
‘애초에 내가 정말 사도인지도 불분명하고.’
신성력이 되돌아온 것은 기적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은 또 아니다.
‘자기가 사도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도가 있을 수 있나? 교단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다들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알렉스는 자신이 성서의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도와는 차이점이 있다고 여겼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사도를 흉내 낸다고 해도 딱히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예 부패한 종단의 우두머리를 처벌하는 것이 사도의 임무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교황을 제거해도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냐.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다간 괜히 나중에 문제가 터질 수도 있어.’
사도는 누구보다도 가장 밝게 타오르는 불꽃이기에, 그만큼 빠르게 연소되어 사그라진다.
사도의 출현에 대한 드문 기록들 중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몇 년 내에 목적을 달성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만약 알렉스가 스스로를 사도라 공표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주목을 받게 될 텐데, 짧은 수명이라는 사도들의 공통점을 생각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될 것이 뻔했다.
‘차라리 교황을 살려두고 거래를 하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입장에서, 알렉스는 일을 더 크게 만들기보다는 적당히 이득을 취하고 물러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솔직히 교단의 일에는 더 이상 깊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힘도 이만큼 키웠으면 이제는 좀 한적하게 살고 싶다.
“오늘 참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교황 성하.”
“으으…….”
서늘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알렉스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교황은 몸을 부르르 떨며 시선을 피했다.
* * *
“아! 잘 보입니다! 역시 교황청 사제분들의 실력은 대단하군요!”
“그간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 이제라도 치료가 되어 다행입니다.”
“앗, 아닙니다. 뭐랄까, 일부러 제약을 걸고 수행하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야가 좁아졌던 건 조금 어색했지만 대신 다른 감각이 훨씬 예민해지더군요. 알렉스 경이 반드시 치료해주겠다고 말씀하셨기에 불안하지도 않았고요.”
혹시나 자신이 그간 죄책감을 느꼈을까 싶어 변호해주는 이사벨의 마음 씀씀이를 느끼며,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이사벨의 예쁜 눈을 하나뿐이 볼 수 없다는 게 그동안 참 마음이 아팠거든요.”
“아앗, 제 눈이 따, 딱히 예쁘지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저한테는 특히나 더욱.”
“읏…….”
순식간에 홍시처럼 변해 버리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입장이 역전되어 교황의 목줄을 손에 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기에, 알렉스는 그를 통해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사벨의 치료 건을 말끔하게 해결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있을 영토분배에 대해서도 막대한 보상을 논하게 되었다.
뛰어난 공적들을 세웠음을 감안한다 해도 과할 정도의, 거대한 영지와 인력 및 물자의 보급을 약속받았다.
사도에 대한 이야기는 퍼지지 못하도록 함구시켰다.
그렇기에 너무 과한 포상이 아니냐며 반발의 목소리가 제법 나오긴 하겠지만, 그쯤은 교황의 막강한 권력으로 무마할 수 있을 터다.
‘뭐 그 때문에 교황의 정치적인 입지에 문제가 생겨도, 거기까진 내가 알 바는 아니고.’
그렇게 교황에게 으름장을 놓아 꽤 많은 권리에 대한 약조를 받아낸 후.
알렉스는 이사벨과 함께 교황청을 떠나 서부 지역으로 향했다.
모든 사안들이 확정이 되고 나면 다시 한번 교황청을 들려야 하긴 하겠지만, 굳이 그때까지 중부에 계속 머무르며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서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있었다.
“단장님을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연합군에 들어가지 않으셨군요?”
“단원들이 워낙 많이 빠져나간 탓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자리를 지켜야 하니 말입니다.”
“성전에 나가셨다면 분명 적지 않은 공을 세우셨을 텐데.”
“명예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보니. 아무튼…… 유능한 인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우리 교구의 품을 떠날 정도라곤 상상도 못 했군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알렉스 경.”
“하핫. 단장님께 계속 존대를 들으니 어색하네요. 아직은 제 소속이 이곳이고 부하 단원이니까, 굳이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본래의 소속구인 글라즈번 교구로 돌아온 알렉스는, 성기사단장인 프리츠와 대면하여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황청에서 이미 주교품의 임명과 주교령의 영주권을 인가받으셨는데, 어찌 제가 말을 놓겠습니까.”
“주교품이라 해도 명의주교일 뿐인데요.”
명의주교는 일종의 명예직에 가까운 품계다.
일반적으로는 주교품의 성직자가 은퇴한 경우에, 재치권을 행사할 순 없지만 주교급의 대우를 받도록 해주고자 만들어진 자리라 할 수 있다.
성기사 출신으로 주교가 된 이가 드물긴 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알렉스처럼 바로 명의주교로 서품을 받는 경우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다.
교단 소유의 영토에는 최소한 주교 이상의 성품을 가진 이들만이 영주로 임명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행해진 조치였다.
‘영주가 되기 위한 필요에 의해 오른 자리일 뿐이지, 내가 교구에서 성사를 집전할 것도 아닌데 정식 주교가 될 이유는 없으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알렉스는 교황청에서 약식이나마 주교로 서품식을 받았고, 이제는 단순히 한 명의 팔라딘이라 할 순 없는 신분이 되었다.
“명의주교라 하여도 곧 주교령을 통치하는 영주가 되실 테니, 일개 지방 교구의 단장인 저보다 높은 신분이 되셨습니다. 공대를 해야 마땅하지요.”
“하하…… 뭐 그게 편하시다면야.”
가벼운 잡담을 몇 마디 나눈 뒤에, 알렉스는 프리츠에게 본론을 꺼내놓았다.
“이사벨을 데려가고자 합니다.”
“으음. 역시 그렇게 되는군요.”
이사벨과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기에,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동부에 생길 자신의 영지로 그녀를 데려가려면 그에 걸맞은 행정처리가 필요하다.
타 지역으로의 전출은 물론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만, 직속 상관인 단장의 허가도 필요하다.
‘억지로 떠나고자 한다면 못할 건 없겠지만, 굳이 절차를 무시해서 안 좋은 말을 듣게 만들 필요는 없지.’
“성전이 마무리되어 원정을 떠난 연합군도 슬슬 하나둘씩 복귀하고 있는 추세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일손이 부족해진 지금 상황에 알렉스 님에 이어 이사벨까지 떠나보내야 한다는 건 달갑지 않은 소식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빈자리가 많은데, 알렉스와 이사벨이 빠지면 그 공백이 작진 않을 것이다.
단장인 프리츠의 입장에선 알렉스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마음들을 정했을 텐데, 반대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밀어붙이시겠지요?”
“하하…… 죄송합니다.”
명의주교에겐 재치권, 즉 교단 내의 입법, 사법,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렇기에 이사벨의 전출에 대해선 단장 프리츠의 허가를 받는 것이 가장 매끄러운 처리방법이다.
“어쩔 수 없군요. 그 건에 대해선 제가 깔끔하게 처리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츠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사벨의 소속구를 옮기는 것에 동의했다.
전쟁이 마무리되며 성전의 영웅에 대한 소문은 점점 크게 퍼져 나가고 있었고, 동부의 반대편인 이곳에서까지도 들려오는 이야기가 꽤 심상치 않았다.
아마 알렉스가 대놓고 사람을 모집하려 한다면, 글라즈번의 많은 성기사들이 전출 신청을 해올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프리츠는 그나마 이사벨 한 사람만 알렉스를 따라 떠나는 걸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고 난 후.
알렉스는 글라즈번에 머무르며 오랜만에 긴 휴식을 취했다.
영지 수여의 일로 교황청의 호출이 오기 전까지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싸돌아다니다가 이렇게 편히 쉬려니, 괜히 영 어색하네.’
놀 거리라곤 하나 없는 신전에서의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다 못해, 어디 근처에 자잘한 몬스터라도 사냥할만한 곳이 없나 찾아보던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로 찾아온 이사벨이,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 알렉스 경.”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이제 호칭은 좀 편하게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앗.”
“알렉스라고 불러요, 이사벨.”
“읏, 네에…… 아, 알렉스.”
얼굴을 붉히고 더듬거리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그래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나요?”
“영토가 정해지고 동부로 떠나게 되면, 한동안은 그곳을 떠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영지를 관리하는 데만도 꽤 바쁠 테니.”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이 약속되어 있다곤 해도, 황폐화된 도시를 복구하고 다시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게 쉽진 않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쩌면 다시 서부나 다른 지역의 땅을 밟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동부로 떠나기 전에 알렉스 겨…… 아니, 알렉스와 함께 가문에 한 번쯤은 들러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아.”
이사벨의 말에 알렉스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서부에 위치한 국가들 중 하나인 마이로스 왕국.
이사벨의 가문인 에른가스트는 마이로스에서도 무려 공작에 해당하는 대귀족의 가문이다.
그간 본인의 가문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해왔던 이사벨의 이야기에, 알렉스는 살짝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약간의 오해로 인해 급진전한 관계이긴 하지만, 어쨌든 알렉스는 이사벨과 미래를 약속했다.
‘그러니까…… 이건 처가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소리인 거지?’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 고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하러 가자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