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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28화 (128/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8화

교황청(4)

최악의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하다못해 검이라도 멀쩡하면 마스터 레벨의 검술에 의지해 활로를 뚫어보기라도 할 텐데.

신성력이 봉인되며 부러지지 않는 성검 알페리온의 칼날도 빛을 잃고 사라졌기에, 알렉스에겐 더 이상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최악은 아닌가.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으니. 끝을 알 수 없는 꼭두각시 노릇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알렉스에게, 교황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그걸 전해주게.”

살짝 고개를 들자 무언가를 손에 쥔 쥬시온이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예루스 교단의 문양이 투박하게 조각된 성유물.

“그것은 ‘성 바룬티아의 서약’이라는 성유물일세. 생긴 건 볼품없어도 본청의 성유물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귀한 보물이지.”

교황은 느물거리는 태도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거기에 손을 올린 채 신의 이름을 걸고 내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그럼 신성력을 되돌려주도록 하겠네.”

“……노예에게 채우는 목줄인가.”

“흘흘! 마냥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걸세. 서약이 유지되는 동안은 대상자에게 힘을 늘려주는 능력을 가진 성유물이니. 물론 맹세를 어기는 순간 천벌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된다는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말일세.”

알렉스는 교황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천벌이라. 그런 게 있다면 당신의 머리 위에 먼저 떨어져야 정상이 아닌가?”

“프허헛! 제법 까칠하게 나오는구먼. 뭐 기분은 이해하니 넘어가 주지.”

“신께서 어째서 당신 같은 자를 벌하지 않는 거지?”

“교황이라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는 내 욕심이, 교세의 확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잖나? 욕망을 품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성질인 것을, 신께서 어찌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두고 관여를 하시겠는가.”

“겉보기에 잘 굴러가기만 한다면 속은 곪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건가. 이런 쓰레기가 교황으로 있는 걸 보면, 신이란 존재는 생각보다 꽤나 인간에게 무관심한 모양이군.”

“흐음. 자네,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구먼. 아직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건가?”

교황이 표정을 굳히며 주변을 향해 눈짓하자, 알렉스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던 팔라딘들이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걷어차며 억지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퍽!

‘끄윽…….’

신음을 참고자 이를 악문다.

얻어맞은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무력감이 알렉스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쇠망치로 후려치는 것과 다름없는 기사의 발길질이지만, 신성력이 멀쩡할 때라면 맨몸으로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을 터.

‘이런 꼴을 당하자고 그동안 죽어라 구른 게 아니었는데.’

바닥을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는 알렉스의 귀로, 교황의 목소리가 재차 파고들었다.

“슬슬 결정하도록 하지. 굴복인가 죽음인가? 후자를 선택해도 몇 달 정도는 더 살 수 있긴 하겠군. 자네가 쌓은 명성을 생각하면, 여론을 조작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터이니.”

“…….”

“적당히 그럴싸한 소문과 거짓증거들을 꾸며내야겠지. 명성에 취해 오만에 빠진 성기사가 신앙을 잃고 신성력을 상실했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들 말일세.”

입을 다물고 엎드려 있는 알렉스를 보며, 교황은 조롱하듯 몇 마디를 더 내뱉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알려주게. 자네의 선택은 어떤 것인가?”

말없이 가만히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던 알렉스가, 이내 고개를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교황을 응시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교황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좋군. 마땅히 그래야지.”

쥬시온이 알렉스의 손에 ‘성 바룬티아의 서약’을 올려주었다.

성유물을 받아든 알렉스를 보며, 교황이 들뜬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맹세의 말을 따라 하도록. 나 팔라딘 알렉스는-”

“지랄하지 마라. 구더기 같은 새끼야.”

“-신의 이름 앞에, 뭐, 뭣?”

손에 쥔 성유물을 앞에 서 있던 쥬시온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알렉스는 땅을 박찼다.

뒤편에서 팔라딘들이 몸에 대고 있던 칼날에 살갗이 베여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고통을 무시하고 달려든 알렉스는 쥬시온의 다리를 붙잡고 몸을 부딪쳤다.

콰당!

“으윽! 이놈!”

태클에 당해 넘어진 쥬시온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보다 알렉스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손목을 붙잡아 비틀며 동시에 약지와 소지를 긁어내듯 꺾자, 쥬시온은 신음을 흘리며 손에 쥔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검을 낚아챈 알렉스가 옆으로 몸을 던지며 바닥을 굴렀다.

‘후우…….’

등짝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진다.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음에도 검을 빼앗는 동안 뒤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완전히 피해내지 못해, 등 뒤에 긴 자상이 생긴 것이다.

‘괜찮아. 움직이는 데에 큰 지장은 없다.’

알렉스는 검을 내밀며 자세를 잡았다.

혀를 차는 교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쯧! 내게 복종하기만 하면 남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거늘, 굳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려 하는가?”

“불의에 맞서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 기사라면 가져야 할 마음가짐 아닌가? 그리고 똥파리 같은 놈의 밑에서 뒤나 닦아주며 사는 건,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지.”

“……건방진 놈. 천한 출신이라 배워먹지 못해서 그런지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

싸늘해진 눈빛으로 알렉스를 노려보던 교황은, 이윽고 팔라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붙잡아 가둬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려면 일단 목숨은 붙여놔야 하지만, 팔다리 정도는 끊어놔도 상관없겠지.”

교황의 지시에 팔라딘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알렉스는 오른손에 탈취한 검을 들고, 손잡이만 남은 성검은 왼손에 역으로 쥐었다.

미끄러지는 칼날에서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자루 끝에 달린 크로스가드를, 방패처럼 활용하기 위함이다.

진짜 방패의 효과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맨손보다야 그거라도 들고 있는 편이 낫다.

그래도 일단은 단단한 쇠붙이이니, 정확한 타이밍에 가져다 댄다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미리 합을 맞춰 연습한 후에 시도한다 해도 해내기 어려운 기술이지만, 다행이랄까 검술과 방패술의 달인인 알렉스는 실전에서 그런 묘기를 행할 능력이 있었다.

카강! 기기긱!

금속의 충돌음과 함께 사방에서 불똥이 비산한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위협적인 공격들에 맞서, 알렉스는 쉴 새 없이 맹렬하게 양팔을 휘둘렀다.

‘더럽게도 지랄 맞은 상황이네.’

교황에게 굴종하느니 저항하는 것을 택했지만, 승산은 보이질 않았다.

신성력을 잃은 지금 알렉스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패시브 스킬인 무기술의 효과뿐.

그나마 대가의 경지에 이른 검술의 영향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들과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만, 기실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지만 고작 한 놈을 제압 못 하나! 몸을 사리지 말고 밀어붙여라!”

속은 시꺼멓지만 그와는 반대로 교황의 손에선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교황의 자리에 오른 교단의 최고위 성직자가 다루는 성법이 하찮을 리가 없다.

수적인 우세에 더해 강대한 축복과 치유의 힘을 등에 업고 달려드는 팔라딘들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던 알렉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으윽!”

치명상을 피해가며 팔라딘들의 공세를 버티던 알렉스가, 어느 순간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언제나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던 신성력이 사라진 채로 힘겨운 전투를 이어가자니, 근육은 경련을 일으키고 몸 전체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만 느껴진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던 알렉스는, 어깨 위로 떨어지는 묵직한 공격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카앙!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에서 휘두른 검은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고, 알렉스는 강한 반발력에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을 놓치고야 말았다.

“X발…….”

무기를 잃고 멈춰 섰지만, 팔라딘들은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진 않았다.

“헉헉, 훅!”

“후우,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포위망을 좁힌 채 거칠게 호흡하는 팔라딘들의 눈에는, 경탄과 자괴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들 역시 교황에게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을 뿐, 성전의 영웅을 이런 식으로 해치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자신들과 달리 굴복 대신 무모한 저항을 선택한 알렉스의 분투는, 그들 스스로에게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뭘 가만히 보고 있나! 어서 놈을 붙잡아 팔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려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안하게 되었소.’

언성을 높이며 외치는 교황의 지시에, 팔라딘들은 마음속을 채우는 수치심을 외면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이게 끝인가. 이제야 충분히 힘을 쌓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겼는데.’

설마 교단에 의해서 이렇게 발목이 잡힐 줄이야.

그것도 교황의 권력유지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이런 겁박을 당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알렉스는 허탈한 심정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기적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 더는 그가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였다.

기이잉.

‘아?’

손안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알렉스는 눈을 뜨고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신성력을 잃었기에 임시방패로밖에 써먹지 못했던 성검의 손잡이가, 무언가에 반응하듯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어서 익숙한 감각이 알렉스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하, 하핫!”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정말로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기라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알렉스는 자신의 몸 안에서 따스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봉인되었던 신성력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것이다.

‘내가 모르는 성검의 숨은 능력인가? 아니면…….’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끝이란 생각한 마지막의 순간에 기회가 내려왔다는 것.

알렉스는 성검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회복된 신성력의 양은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홀리 웨폰을 사용하는 데에 모자라진 않은 정도였다.

지이잉!

찬란한 광채와 함께 알페리온이 성스러운 칼날을 방출했다.

“어억!?”

“신, 신성력을?”

경악한 팔라딘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황이 비명을 내지르듯 외쳤다.

공간 자체가 성유물이라 할 수 있는 이곳 ‘최초의 성소’ 에서는, 오로지 교황인 자신의 허가가 있어야만 신성력을 다룰 수 있다.

분명 그가 가진 모든 신성력을 봉인했는데, 어떻게 다시 성법을 사용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주, 죽여라! 어서 놈을 죽여!”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깨어졌기에, 흥분한 교황은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으며 알렉스에 대한 제거를 명령했다.

교황만이 다룰 수 있는 성유물인 ‘최초의 성소’로 인한 신성력의 통제는, 사실 정해진 공간을 벗어나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을 잃게 된다.

그렇기에 성소를 빠져나가기 전에 또 다른 성유물인 ‘성 바룬티아의 서약’을 통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위를 강제하려고 했던 것이거늘.

신성력을 봉쇄할 수 있는 최초의 성소와, 교단의 성기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성 바룬티아의 맹세.

그가 교황위를 몇 차례나 연임하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특별한 성유물들의 힘을 통해 몇몇 뛰어난 팔라딘들을 종복으로 삼아 도구처럼 다뤄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강제된 충성으로 온갖 더러운 일들을 시켜가며, 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싹들을 모두 배제해 왔다.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저 놈을 죽여!”

그러나 격하게 날뛰는 교황의 외침에도, 팔라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알렉스를 바라보며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아아, 예루스시여…….”

“우리의 죄를 벌하소서…….”

지금 이 순간 팔라딘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단어뿐이었다.

예루스의 사도.

계시를 받아 신의 뜻을 펼치는 오롯한 존재.

오랜 교단의 역사에서도 사도로 인정받은 존재의 출현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지만, 팔라딘들은 알렉스가 성서의 기록에서나 볼 수 있던 바로 그 사도일 것이라 생각했다.

교황의 억압을 벗어나 다시금 신성력을 보여준 것이, 그 생각을 확신으로 만드는 증거였다.

‘한 사람이 이뤄냈다고 믿기 어려운 성전에서의 업적들.’

‘그 역시 신이 선택한 사도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가장 지고한 권위를 가진 자.

사도는 교단의 모든 법칙에서도 예외적인 존재다.

알렉스는 자신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팔라딘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그들의 사이를 걸어 지나갔다.

그 발걸음의 끝에는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교황이 있었다.

알렉스는 그를 향해 성검을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X됐다고 생각하지 않나?”

“…….”

교황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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