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27화 (127/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7화

교황청(3)

“신에게 반기를 들고자 인륜마저도 저버린 이교도들을 수차례 토벌하고, 놈들이 불러낸 악마 또한 연달아 격퇴. 동부 국가들 중 두 곳의 탈환은 사실상 알렉스 경이 이뤄낸 업적이나 마찬가지라더군.”

“아군들과 함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물론 혼자서 이룬 공로는 아니지만 보고서의 증언들을 보자면, 연합군 전체를 통틀어도 알렉스 경의 기여도가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겠더군. 가히 신의 기사라 할 수 있는 영웅의 재림이 아닌가!”

교황의 칭찬에 알렉스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렸다.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존중과 대우가 아닌 견제와 시험에 해당하는 앞서의 일들도 그렇고, 마냥 칭찬만 하자고 자신을 호출한 것이 아님을 짐작했기 때문.

역시나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이야기를 더 듣다 보니, 교황이 만남을 청한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뛰어난 실력자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자리에 있어야 옳겠지. 내 로얄 가드로 자네를 임명하도록 하겠네.”

자잘한 미사여구를 빼고 보면, 교황청 직속인 근위대에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알렉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세운 공적을 치하하고자 하신다면, 다른 이들처럼 적당한 영토를 하사해 주시고 어느 정도 편의를 봐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허헛! 그야 당연한 말이로군. 영지? 주겠네. 그대의 업적을 생각하면 백작령에 해당하는 영토쯤은 내려줄 수 있겠지. 동부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후작급의 대우도 어렵지 않겠군. 영주가 되시게. 다만 통치는 따로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네는 내 곁에 서 있어야 하네.”

“……?”

알렉스의 시선에 의문이 서렸다.

자신이 세운 공적들이 대단하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자 교단에 의무적인 헌신을 해야 하는 성기사에게, 단번에 후작급의 봉토를 하사하며 대우해 주겠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으로 분류되는 귀족의 작위.

최고위 작위인 공작이 대부분 왕족에게나 내려지는 작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후작위야 말로 일반적인 귀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에 해당한다.

하이로드로 불리는 백작위의 귀족 중에서도, 왕실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받으며 국경을 수비하는 변경백의 임무를 수행하는 소수의 영주들 정도가 봉해지는 것이 후작의 지위.

후작령부터는 평범한 귀족의 영지를 벗어나 작은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국왕이라 해도 쉬이 임명할 수 없는 작위이기도 했다.

물론 교단에서 귀족의 작위를 수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후작령에 해당하는 영토를 내어준다고 해도 후작급의 귀족과 동일한 권력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출세를 목표로 삼는 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교황청 직할대에 들어가는 건 전혀 관심 없는데.’

성기사 클래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기에 교단에 몸을 담긴 했지만, 평범한 팔라딘들처럼 종교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 생각은 없다.

알렉스는 무례가 되지 않도록 적당한 단어들을 골라 자신의 뜻을 밝혔다.

“……거절이라. 신의 뜻을 가장 앞에서 받드는 교황을 보필하는 일이란, 그대 같은 팔라딘에겐 더없는 영예일 터인데?”

“죄송합니다.”

“단장의 자리를 주겠네. 교황청 직할 성기사단의 수장이라면, 팔라딘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권좌라 할 수 있지.”

“…….”

담담하게 내뱉어지는 교황의 발언에, 알렉스의 시선이 그의 옆에 시립해 있는 현 단장인 쥬시온에게로 향했다.

본인의 자리를 박탈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쥬시온은 눈을 내리깔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슨…… 교황이 교단의 가장 높은 권력자라지만, 저런 소리를 그리 가볍게 해도 될 정도인가?’

마음에 무거운 짐이 얹힌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원하는 방향은 그런 쪽이 아니기에, 제의는 감사하지만 거듭 사양하겠습니다. 공적에 대한 보상도 그런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남작령 수준의 영지만 되어도…….”

“후우, 일을 어렵게 가도록 만드는군. 자네의 의향 따윈 중요한 게 아닐세.”

“……예?”

교황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살아 있는 제단.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 자네는 교황이란 자리가 어떻게 승계되는지 아는가?”

알렉스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딱히 대답을 원했던 것이 아니기에, 교황은 알렉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넋두리를 하듯 재차 말을 이었다.

“왕이 후계에게 왕좌를 물려주는 것과는 다르게 교단의 지도자는 선출직이지. 관구장인 현 교황과 추기경들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으며, 불가피한 사유로 투표 인원의 숫자가 맞지 않는 경우엔 전대의 관구장들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네.”

“……”

“오래전부터 유지되어 온 교법에 따르면, 교단 고위직의 자리엔 임기가 정해져 있도록 되어 있지. 연임에 대한 제한은 없지만, 적합한 후보가 있다면 다음 세대가 책임과 권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물러날 때를 정해야 한다네.”

알렉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교황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마땅한 인재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기존의 인물이 계속 연임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항상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네. 고개를 쳐드는 싹이 있다면 슬며시 짓밟으며, 권좌를 향한 위협들을 매번 잘라내야 했지.”

추잡한 내용에 알렉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늙은 권력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젊은 인재들을 내쳤다는 소리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왜 지금 그런 말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알렉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저런 사실들을 그동안 아무런 관계도 없던 자신의 앞에서 적나라하게 밝히다니?

위기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의혹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알렉스와 눈을 마주하며, 교황은 비릿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너무 눈에 띄었어. 팔라딘이 교단 내 정치의 중추가 되는 경우는 이제껏 없었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겠더군. 젊고 강한 영웅의 출현이라니,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기에 그보다 알맞은 상황도 없겠지.”

“교황 성하. 저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네. 자네는 이곳에 머물면서 이자들처럼 나의 충실한 체스말이 되어줘야 해. 너무 상심하진 말게나. 70이 넘은 이 늙은이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나? 대충 10년? 길어야 20년쯤이나 되겠지. 허헛!”

알렉스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교황이란 자가 설마 이런 인물일 줄이야.

고인 물이 썩는 것은 순리라지만,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성전을 승리로 이끈 젊은 영웅이 교황을 보필하는 명예로운 자리를 택했으니,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지.”

“……제가 과연 당신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뭘 어쩌겠는가?”

철그럭!

교황의 곁에 있던 팔라딘들이 알렉스를 향해 무기를 겨누며 걸음을 내디뎠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협박에,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성검을 뽑아 들고 그에 맞섰다.

그러나 몸에 각인된 스킬의 능력에 따라 절로 탄탄한 자세를 잡았어도, 머릿속은 소용돌이에 휩쓸린 듯 어지러웠다.

‘교황의 뜻을 거스르면…… 교단 전체를 적으로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성전을 경험해서 알 수 있듯이, 교황이 교단의 적으로 규정하자 동부의 4개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것은 암흑교의 준동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교단이 대륙 전체에 끼치는 힘을 여실히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아냐. 교황의 말 한마디로 교단의 공적으로 몰리게 된다는 건 너무 부정적인 생각일지도. 예루스 교단의 힘이 막강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교황이 교단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마냥 손쉽게 휘두를 수 있는 것은 또 아닐 테니.’

교황의 권위보단 아래이긴 해도, 지방의 관구를 이끄는 추기경들이라면 교황의 말에 반박할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

거기에 자신이 성전에서 쌓은 명성과 인지도란 것도 그리 가볍지 않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며 슬슬 그에 대한 영웅담들이 퍼지고 있는 시기이니, 갑자기 교단의 적으로 몰리게 된다면 모두가 그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해.’

다른 관구장들이 자신을 도와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이 자리만 벗어난다면 무언가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의 앞을 막고 있는 열두 명의 팔라딘들을, 맨몸에 검 한 자루만으로 제압할 수 있겠느냐 인데.

‘어찌되었든 간에 해보는 수밖에. 검이라도 챙겨왔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차라리 도박적인 전투에 몸을 던지면 던졌지, 교황이 늙어죽을 때까지 그의 종복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알렉스는 팔라딘들의 면면을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들이었지만, 알렉스는 그들의 눈빛에서 체념과 좌절, 자기혐오의 감정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도 알렉스와 비슷한 처지를 경험하고, 교황에게 굴복하게 되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이잉.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검신이 밝게 타오르며 팔라딘들에게 겨눠진다.

긴장감이 맴돌며 주변의 공기가 착 가라앉았다.

알렉스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미리 파악했던 팔라딘들은, 훨씬 유리한 상황임에도 감히 그를 경시하지 못하고 천천히 포위진을 조여들었다.

“굳이 매를 맞아야만 상황파악이 되는 건가? 흘흘! 그것도 나쁘진 않지.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일수록 조련을 거치면 명마가 되는 법이니.”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흥에 겨운 목소리가 기사들의 사이로 파고든다.

교황은 결국 알렉스가 본인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 자신하는지, 웃음을 흘리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런 확신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네는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이 장소에는 오로지 교황의 자리에 오른 자만이 다룰 수 있는 성유물이 비치되어 있다네.”

갑자기 사방에서 환한 빛이 발산되었다.

눈이 따가운 밝기에 미간을 찌푸리던 알렉스는, 문득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이 손으로 향했다.

성검이 그 찬란한 칼날을 잃고 사라져, 낡은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성검의 연료가 되어줘야 할 신성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

다급히 내면에 정신을 집중한 알렉스는, 전신을 충만하게 채워주던 신성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사람에 한해서, 나는 신성력의 봉쇄를 명할 수 있다네. 그리고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이곳을 벗어난다 해도 한번 봉해진 신성력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지. 교단의 지도자만이 행할 수 있는 권한일세.”

뿌드득.

이빨이 부러질 듯이 턱에 힘을 준 탓에, 알렉스의 입에서 거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손잡이만 남은 알페리온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대로 두면 영원히 신성력을 쓰지 못한다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소리였다.

신성력을 다루지 못하는 성기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묵직한 무언가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