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6화
교황청(2)
“……뭐, 뭣? 방금, 뭐라고?”
표정이 무너지며 더듬거리는 바오로 대주교를 마주 보며, 알렉스는 다시 속된 단어들을 내뱉었다.
“귀가 안 좋으십니까? X까!라고 했습니다.”
“이, 이자가! 이 무슨 무례인가!”
충격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대주교의 턱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며, 알렉스는 차가운 얼굴로 비웃음을 흘렸다.
‘대주교쯤 되면 내가 들이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이런 식의 충돌은 여러모로 알렉스에게 불리하긴 하다.
어쨌거나 교단 내의 신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팔라딘이란 조금 특수한 성질을 가진 신분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사제품에 속한 위계이고, 아크비숍은 사제품보다 높은 권한을 가진 주교품의 고위 성직자다.
교황과 추기경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주교란 일반 성직자가 교단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계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마냥 알렉스에게 무조건적으로 참아야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내가 무력으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언사가 무례하다는 이유만으로 큰 처벌을 할 순 없겠지.’
전쟁영웅은 왕이라 해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법이다.
교단의 역사에 새길 전설이나 다름없는 활약상을 보이며, 성전에서 가장 큰 공적을 쌓은 성기사를 권위로 찍어 누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라면 모를까, 당장은 교단의 어떤 고위급 인사라 해도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긴 쉽지 않을 것이었다.
모욕적인 언사에도 홀로 분을 삭일뿐, 더 강하게 나오지 못하고 눈만 굴리고 있는 바오로 대주교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대주교가 저리 나오는 이유도 대강은 유추할 수 있었다.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나는 교단의 지도층에 발을 들이고 여러분들과 권력투쟁을 벌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
“동부에 새로 생길 교단령들 중 적당한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상으로 받고 나면, 그곳에 정착해 평범한 영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겁니다. 그러니 괜한 견제로 찔러보는 건 그만두시지요.”
담담하게 내뱉는 알렉스의 말에, 바오로 대주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요청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사벨 경의 부상을 치료해 주십시오. 그 후엔 제 소속구인 글라즈번 교구로 돌아가, 동부로 발령이 날 때까지 조용히 지낼 테니.”
“원하는 건 정말로 그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지.”
못미덥다는 듯한 어조였지만 일단은 원하던 대답이 들려왔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사벨에게 돌아가고자 몸을 돌리려 했다.
“잠깐.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네.”
“후우, 또 뭡니까?”
“성하께서 계신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겠네.”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예정보다 조금 이르게 되었지만…… 경과의 만남은 그분께서 원하시던 일일세. 알렉스 경의 태도가 확고하니, 굳이 더 질질 끌 필요는 없겠지.”
교황과의 만남.
그다지 달갑진 않지만, 교단 최고 지도자의 호출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목줄을 채워보려고 한 것도 결국 가장 윗선에서 흘러나온 생각이었나? 쯧. 내키진 않지만 만나보긴 해야겠군.’
이사벨에게 교황을 만나고 오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알렉스는 대주교의 뒤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지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통로를 지나, 알렉스는 화려한 장식이 음각된 커다란 문 앞에 도달하게 되었다.
“정지.”
“알렉스 경을 데리고 왔네.”
“대기하시오.”
입구의 양옆에 서서 경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팔라딘 중 하나가, 대주교의 말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알렉스는 문이 열리는 순간 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슬쩍 안을 살폈으나, 또다시 통로가 이어져 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역시 교황이라서 그런가. 사람 하나 만나기가 더럽게 복잡스럽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대주교가 그에게 말을 건네 왔다.
“여기서부턴 저들의 지시에 따르게. 나는 돌아가서 자네의 요청을 행할 준비를 해야겠군.”
“음? 같이 들어가지 않는 겁니까?”
“알렉스 경에 대해선 특별히 성하께서 언급을 해두셨기에 예외가 적용되지만, 원래는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알현일정을 잡지 않고는 성하를 뵐 수 없는 법이네.”
대주교씩이나 되는 이도 허가 없이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알렉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뭐 얼마나 바쁘신 몸이기에 그리 깐깐하게 굴어? 역시 교황도 꽤나 권위주의적인 인물인 건가? 물론 그럴만한 신분이기는 하다만…….’
교황과의 만남이 조금 불안해졌다.
뻣뻣하게 굴던 대주교에겐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무리 알렉스라도 교황 앞에서까지 막 나가긴 어렵다.
종교라는 다른 이름으로 분류될 뿐이지, 사실상 교황이란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나 다름없는 위치.
그가 권위를 내세워 자신을 억압하려 든다면 대처하기가 매우 곤란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껄끄럽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한 번쯤은 만나봐야겠지. 그런데 설마 또 몇 시간이고 이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까와 같은 그런 상황이 또 반복되는 일은 없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기다리자, 경비를 따라 나온 새로운 팔라딘이 알렉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따라오시오.”
기다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대신 또 한참을 걸어야했다.
교황과 무슨 대화를 하게 될지 상상하며 그 뒤를 따르던 알렉스는, 미로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교황청 내부의 구조에 살짝 질린 얼굴이 되었다.
‘오는 길도 복잡했는데 안쪽은 그보다 더 하네. 보안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과하지 않나?’
조금 과장을 보태면 길을 잃었다가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
돌아가는 길을 기억해 보려 했으나 머리가 어지러워져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안내자를 쫓아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어느 순간 알렉스는 커다란 하나의 공간 안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쿠웅!
“으음?”
묵직한 충돌음이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두꺼운 격자형 철문이 겹겹이 내려와 출입구를 봉쇄한 광경이 보인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자, 절그럭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안쪽에서 기사 여럿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라딘 알렉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멈춰 서서 도열한 기사들 중 한 사람이, 알렉스를 호명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 소문이란 본디 믿을 게 못 되는 법이기에 반쯤은 걸러 들었지만, 그럼에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공적들을 쌓았다지?”
“……누구신지?”
알렉스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상대는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런! 대단하신 우리 교단의 영웅에게 내가 이름도 밝히지 않았군! 교황청 직할 성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쥬시온이라 하네.”
“흠…… 반갑군요. 쥬시온 경.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알렉스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고, 쥬시온이라 이름을 밝힌 기사는 입매를 비틀며 주변의 기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무기를 앞세우며 알렉스를 둘러싼다.
의도가 명백한 행동에 알렉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성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알렉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팔라딘 열두 명. 싸운다면 승산이 있나?’
방금까지 대주교와 면담을 하고 있던 알렉스는 가벼운 옷차림의 상태다.
교황청 내부에서 무장을 하고 다닐 이유가 없기에, 갑옷은 물론이고 방패 역시 객실에 남겨두고 왔었다.
그나마 손잡이뿐인 형태라 검집이 필요 없어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성검은 가지고 있었으니 아주 비무장은 아니지만, 완전무장한 기사 열두 명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닌 교황 직속의 팔라딘들.
분명 수준 높은 실력자들일 테니,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싸운다면 승기를 장담할 수 없었다.
“성하께서 찾으셨다고 듣고 왔는데, 이게 그분의 뜻입니까?”
“후후! 글쎄, 잡담은 나중에 하지. 일단 지금은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기에 동부에서 그리 명성이 들려오게 된 건지, 어디 한번 실력을 보여주시겠소?”
팔라딘들이 알렉스를 향해 달려들며 공격을 가해왔다.
갑작스러운 시비에 어이가 없었지만, 가만히 당해줄 수도 없기에 알렉스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망할. 진짜 실력이 보고 싶다면 방패라도 주던가!’
알렉스가 가진 무력에서 방패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벌어진 싸움에, 알렉스는 속으로 짜증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카강!
무기가 부딪치며 격한 소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검 한 자루에 의지해 다수의 실력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알렉스가 성법에만 의존하는 평범한 검술 실력을 가진 팔라딘이었다면, 분명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스터 레벨의 무기술 스킬을 지닌 알렉스는 방패도 갑옷도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신들린 듯한 몸놀림으로 검예를 펼치며 기사들을 상대로 거의 대등한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과연. 마냥 과한 소문만은 아니었나 보군.”
십여 분 가량의 치열한 공방을 벌인 후.
쥬시온이 감탄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팔라딘들 역시 무기를 거두고 알렉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잠시 전투에 공백이 생겼기에, 알렉스는 검을 늘어뜨린 채 그들과 대치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 역시도 아까 같은 기 싸움의 연장인 것 같긴 한데. 날 제압해서 망신을 주기라도 하려고 했나? 이것도 교황의 지시인가?’
알렉스는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보며 입맛이 씁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의 수좌가 벌이는 일이라기엔 영 세련되지 못한 방식이다.
‘그만큼 교단에서 나를 불편하게 여긴다고 봐야 할지. 후우.’
짝짝짝.
한숨을 삼키며 기사들을 주시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움직이자 순백의 실크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수단을 입은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담긴다.
“무장도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교단의 최정예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다니. 과연 듣던 대로군.”
쥬시온과 팔라딘들이 그의 곁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시립했다.
은근한 화려함을 품고 있는 고급스러운 복장이나 극진한 팔라딘들의 태도를 보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팔라딘 알렉스.”
교황 안타리오스.
교단의 지도자이자 대륙 최고의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이와 마주하며, 알렉스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