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5화
교황청
“용병이니 이미 대강 소식은 알고 있겠지만, 조만간 동부의 성전이 종료될 것이오. 그때 나와 함께 동부로 떠날 생각이 있겠소?”
“동부…… 입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쪽이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습죠. 거두어 주신다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하지. 일단 자네 용병대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더 있는지 확인해 주게. 앞으로 내가 병력이 좀 필요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제 부하들이라면 당연히 저처럼 알렉스 님을 모시고자 할 것입니다. 사람 새끼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지요!”
“아니, 그렇다고 억지로 끌고 갈 필요까진 없고…… 아무튼 조만간 동부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라 알고, 빈자리도 더 충원해 보도록 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당장은 이사벨의 치료가 우선이지만, 중부에서의 용무를 마치고 나면 영지 운영에 대한 준비도 갖추긴 해야 할 것이다.
알렉스는 헥터에게 사람을 모으라 말하며 몇 가지 지시를 내려주었다.
필요한 일에 쓰라며 어느 정도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용병들은 되먹지 못한 이들이 많지만, 약간의 교육만 거친다면 곧바로 병사로 투입하기 딱 알맞은 자들이지요.”
이사벨 역시 미리 최소한의 세력을 갖추는 것은 괜찮은 생각이라며, 주머니를 열어 알렉스의 투자에 동참했다.
“영주가 되시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하십니다.”
“예, 뭐. 그쪽 일은 차차 배워가야 하는데, 잘 되겠죠. 무려 공작가문 출신인 이사벨 경이 제 곁에 있지 않습니까.”
“읏…….”
가벼운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는데, 가문 이야기가 나오자 이사벨은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진다.
제법 오래 붙어 다녔지만, 알렉스는 그녀가 자신의 가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작가면 거의 일국의 왕족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가문의 자제가 팔라딘을 하고 있는 건 특이한 경우긴 하지.’
그나마 귀족출신인 사제는 제법 수가 있는 편이지만, 어려서부터 신전에 맡겨져 혹독한 수련을 통해 키워지는 성기사는 고위귀족 출신이 흔치 않다.
무언가 사정이 있긴 할 텐데,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물어보는 편이 맞으려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이사벨과의 관계가 깊어진 지금.
사실상 그쪽은 이제 처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니,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긴 할 것이다.
‘뭐…… 그렇다고 억지로 파헤칠 것까진 없겠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고민하는 듯한 이사벨의 얼굴을 보아하니, 머지않아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었다.
결국 때가 되면 그녀가 스스로 언급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알렉스는 굳이 그에 대한 내용을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어쨌거나 그렇게 인연을 맺은 용병들을 신전에 맡겨두고, 알렉스는 다시 이사벨과 함께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 길에 올랐다.
예루스 교단 전체를 통솔하는 중앙기구.
대륙에서 가장 존귀한 이로 추앙받는 교황이 머무는 곳.
교황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방문 목적을 밝힌 후 경비대의 철저한 조사를 받은 알렉스와 이사벨은, 대륙 각국의 왕성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한 교황청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돌고 돌아서 결국 여기로 오긴 했네.’
알렉스는 과거 교황청의 호출을 받았음에도, 순례행을 핑계로 파견을 미루고 남부 지역을 돌아다녔던 기억을 떠올렸다.
서임식에서의 소동으로 교단 고위층의 주목을 받아 이른바 영입대상에 올랐지만, 소속구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벌였던 일들.
물론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알렉스는 더 이상 한적한 지방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예 팔라딘이 아니라, 성전에서 수많은 업적을 세운 교단의 영웅이 되었기에.
그간 연합군에 몸담으며 보여주었던 전쟁에서의 활약들은, 당연히 교단의 고위층들에게도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후반부에 가서는 중부군에 소속된 중앙 관구의 팔라딘들이 함께하기도 했으니, 교황청에 자신에 대한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분명 나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테니, 연합군을 이탈해 중부로 향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겠지.’
그 이유가 난이도 높은 이사벨의 치료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
알렉스는 어쩌면 교단의 고위층에서, 자신들이 교황청으로 올 것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호화롭게 치장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후로 세 시간이 넘도록 방치당하고 있음에도, 그리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기를 죽이기라도 해보겠단 건가. 너무 질 떨어지는 수작인데.’
어느 정도는 예상하기도 한 일이긴 했다.
일 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기 전의 그는 교황청에서도 주시하는 뛰어난 인재라고는 하나, 딱 거기까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서 드러난 알렉스라는 존재는, 인간이 정말로 이런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규격 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이들과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인 성기사.
그가 가진 존재감이 너무 커지다 보니, 교단의 고위층들이 경계를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알렉스 경이 이런 대접을 받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
꼿꼿한 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던 이사벨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음성에 깃들어 있는 불안감에, 벨벳으로 치장된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대며 눈을 감고 있던 알렉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짜증 나긴 하네.’
이까짓 기 싸움이야 참아주지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 때문에 이사벨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하자 불쾌감이 훅 솟구친다.
‘확 한바탕 뒤엎어? 그게 저쪽의 수작에 놀아나는 행동이긴 하겠다만…… 음?’
밖으로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알렉스가 눈을 뜨고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 바깥에서 이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한 남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복장을 봐서는 꽤나 품계가 높은 사제로 보이는데, 인상이 삭막해 성직자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느껴지진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그는 아크비숍, 즉 대주교의 위계를 지니고 있는 고위성직자였다.
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와 마주해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알렉스는, 소파에 파묻고 있던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았다.
“바오로 대주교님.”
“조금 오래 기다리게 했군. 요청에 적합한 인선의 분류와 치유와 관련된 성유물들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소.”
“……그렇습니까? 이해합니다.”
세 시간 동안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를 당한 것을 조금 기다렸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알렉스는 굳이 날을 세우며 따져 묻진 않았다.
이사벨의 치료를 요청하며 숙이고 들어온 것은 자신이니, 지금 당장은 푸대접을 받더라도 참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알렉스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요청은 기각되었소.”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소.”
“어째서?”
“말이 짧군, 팔라딘 알렉스. 예의를 지키시오.”
딱딱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상대와 눈을 마주친 알렉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고쳤다.
“어째서입니까?”
“교단은 동부의 배교자들을 처벌하느라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지. 그 탓에 교단의 중심인 이곳 교황청도 꽤나 오랜만에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이고 말일세. 애초에 치료를 요청한 그대나 당사자인 이사벨 경 모두 중앙 관구의 소속도 아니니, 굳이 이쪽의 여력을 돌려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네만.”
“허.”
알렉스는 헛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속을 들먹이는 건 당연히 핑계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그렇다.
아무리 고위급 성직자가 흔치 않다고 해도, 다른 장소도 아닌 교황청이 위치한 이곳에서 인원을 모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가 너무 과하게 튀었다 그거지. 그래, 길들이기를 해보시겠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일개 성기사 한 사람이 성전이라는 범대륙적인 규모의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공적을 세우고 명성을 드높였으니, 교단 권력의 중심에 있던 몇몇 이들에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바로 들어주지 않고 줄다리기를 하며, 본인들이 그를 꼭대기 위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원하는 걸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알렉스 경…….”
분위기가 차가워지자 이사벨이 안절부절 못하며 작은 목소리로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정확히는 이사벨의 한쪽 눈을 덮은 안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다른 문제였다면 적당히 머리를 숙이고 어울려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사벨의 치료를 약점으로 삼아 자신을 쥐고 흔들려는 태도는, 참고 넘기기가 어려웠다.
“이사벨.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알렉스 경?”
알렉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벨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 아레읏!?”
당황한 이사벨이 펄쩍 뛰어오르며 그를 부르다가 혀를 깨물고 말았다.
알렉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호칭을 좀 편하게 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 아으, 갑자기, 무슨…….”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얼굴로 혼란에 빠져 있는 이사벨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알렉스는 대체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바오로 대주교에게로 몸을 돌렸다.
“대주교님. 저와 잠시 따로 이야기하시죠.”
“흐음. 무슨 말을 더 해도 ‘이번’의 대답이 바뀌진 않소만.”
마치 다음은 다를 수도 있다는 듯이 이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말투.
“그 역시 대화를 하다 보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뭐 좋소. 잠깐 정도는 시간을 더 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사벨을 방 안에 남겨두고, 알렉스는 대주교와 함께 바깥으로 나섰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사적으로 그대에게 요구할 일이 뭐가 있겠소?”
“사적인 게 아니면 공적인 이유라도 있겠지요. 주교단의 뜻입니까? 아니면 더 윗선? 대주교에게 지시를 내리려면 교황 성하의 명쯤은 되어야 하겠군요.”
“어허! 말을 조심하시게. 아무리 그대가 대단한 공적을 세운 기사라 해도, 감히 성하를 가벼이 입에 올리다니!”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공적을 세운 건 인정하는군요. 그럼에도 이런 대우를 한다니, 상황이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흥! 교단의 검이 이교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어찌 겸허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대접을 바라며 목에 힘을 준단 말인가?”
“……역시 그거군요. 제가 대주교님을 비롯한 교단의 권력층에 고개를 숙이고, 하급자로서의 위치를 명확히 하길 바라십니까?”
직설적인 발언에, 바오로 대주교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로 말하진 않았네만.”
말은 아니라지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에 머릿속으로 몇 가지 조건들을 따지며 계산을 마친 알렉스는, 마침내 환한 웃음을 보이면서 대답했다.
“바오로 대주교님.”
“또 뭔가?”
“X이나 까드십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