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4화
중부지역(5)
방해되는 존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에, 알렉스는 킹의 기동능력을 이용해 하피들이 쏟아져 나온 나무 위로 올랐다.
빼곡한 나뭇잎과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걸려 있는 덩굴 때문에 시야확보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곧 목표로 했던 생존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스럭.
히히힝!
“끄으으, 이 미친 괴물년들! 제발 그만…… 어엇? 마, 말!?”
옷이 죄다 찢겨져 거의 알몸에 가까운 모습으로 팔다리가 넝쿨에 묶여 있던 생존자들.
거대한 고목 위에서 마주칠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기마의 모습에 그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구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환한 얼굴이 되었다.
알렉스는 그들을 구출해 아래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들 크든 작든 부상을 입은 상태이기에 험하게 다룰 수는 없어, 한 번에 운송할 수 있는 인원은 많아야 두 명 정도에 불과했다.
거목의 줄기를 타고 몇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며 생존자들을 옮기고 있자니, 금세 알렉스가 남긴 흔적을 쫓아온 이사벨이 도착했다.
불도저처럼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거의 다 몸으로 밀어버리며 하피를 추격한 탓에, 사실상 흔적이라기보단 길을 만들어놓은 수준이라 금방 따라온 모양이다.
“아앗! 전투는 이미 끝난 겁니까?”
“예. 수가 좀 많았지만, 별건 없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왔는데 벌써 정리를 마치셨다니. 역시 알렉스 경은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야 뭐. 아, 이사벨 경이 킹과 같이 생존자들을 옮겨주세요. 저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집중해야겠군요.”
“앗! 알겠습니다! 그런데 킹이 얌전히 저를 태워줄까요? 명마는 원래 주인을 가리는 법인데.”
프히힝!
“……괜찮다고 하네요. 똑똑한 녀석이라 말도 잘 알아들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나무를 오르내리는 건 킹의 고유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니, 생존자들의 수습은 굳이 알렉스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알렉스는 치유계 성법 쪽으론 영 젬병인 이사벨에게 용병들의 구조를 맡기고, 구해낸 이들의 부상을 치료하는 일에 전념했다.
알렉스의 치유 스킬은 효율이 썩 좋다고 할 순 없지만, 하피들을 상대로 크게 힘을 쓰지도 않았기에 신성력의 여유는 충분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되다니…….”
용병대장 헥터는 이전의 만남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알렉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거친 용병들을 통솔하는 용병대장이라는 자들은 으레 행동거지가 험하기 마련이지만, 알렉스는 생명의 은인이면서 신분도 신분이다 보니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캡틴 헥터. 생존자는 이게 전부이오?”
“그렇습니다. 후우! 힘들게 키운 용병대인데 반 토막이 나버리다니…….”
반 토막이란 말은 조금 과장이었지만, 원래 36명이었다는 용병대는 지금은 23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피들이 남자들을 사로잡는 것에 신경 썼다지만, 전투 중에 죽은 이가 하나도 없을 리는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구출되고 치료까지 받았으니 이 정도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들은 전부 하피에게 시달리다가 며칠 내로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은 게 어디인가. 신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시오.”
“무, 물론입니다! 감사, 또 감사하고 말굽쇼! 마음 같아선 알렉스 님의 발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말로 자신의 말을 실천하려는 듯 몸을 숙이며 다가오는 헥터의 모습에, 알렉스는 다급히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옷차림이 걸레짝이 되어 하반신을 죄다 노출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 가까이 다가오는 건, 온갖 고난을 거쳐 온 알렉스로서도 꽤나 부담스러운 경험이다.
“그…… 경상자들은 여길 정리하는 것 좀 도와주지.”
“아! 물론입니다. 저희가 이런 일은 전문이지요.”
널브러져 있는 하피들의 시체를 가리키는 알렉스의 손짓에, 헥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을 추려 부산물의 채취를 지시했다.
하피는 상품성이 좋은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발톱이나 날개 같은 건 그럭저럭 가치가 있다.
다만 알렉스가 푼돈이나 벌자고 이 상황에 부산물을 챙기라 말한 건 아니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 부담스러우니 앞 좀 가리자는 말이오.”
“아, 예…….”
알렉스의 요청에 용병들은 잘라낸 하피의 날개를 하반신에 치마처럼 두르고 덩굴로 묶어 고정했다.
덜렁거리던 23명의 물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단 도시까지 함께 가도록 합시다.”
“옙! 거듭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어차피 도시로 가야 하는 건 서로 마찬가지이기에, 알렉스는 용병들과 함께 다시금 원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 * *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정말 어찌 보답을 해야 할지…….”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잘 추스르시오.”
도시에 도착한 알렉스는 교구의 신전까지 용병들을 데리고 들어섰다.
오는 길에도 치유의 손길을 사용해 꾸준히 치료는 해줬지만, 그래도 빠른 완치를 위해서는 수준 높은 사제의 치유성법을 받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도와줄 거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제대로 해줘야지.’
알렉스의 요청 덕분에 헥터 용병대는 교단의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용병들의 입장에서는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성기사인 알렉스야 편하게 교단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사실 일반인들은 쉬이 사제들의 성법을 경험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귀족가문에 속한 사람이나 부유한 상인이라면 모를까.
평민 중에선 제법 돈을 만지는 편에 속하는 직군인 용병들도, 병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으면 대부분 약초 정도에 의존해 스스로의 몸을 돌봐야 했다.
신전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행위 자체도 나름대로 가진 자들의 특권이다.
물론 같은 교단의 형제라 해도 소속구가 다른 알렉스의 요청을, 이곳 교구의 사제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흔쾌히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나 이사벨 같은 성기사를 치료하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도움을 줬겠지만, 일개 용병들 따위에게 아낌없이 힘을 쓰고자 하는 사제는 매우 드물다.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니고 23명이나 되는 인원이지 않은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성의’는 보여주어야 했다.
다른 말로는 기부금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목숨을 구해주신 데다가 재물까지 이리 내어주시니…….”
“어차피 하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재물이라 부담도 아니오.”
용병들을 구하기 위해 둥지를 털면서, 하피 사체에서 건진 부산물 외에 다른 전리품도 얻은 게 있었다.
다름 아닌 하피의 알이었다.
몬스터의 새끼나 알은 여기저기서 꽤나 수요가 있는 상품이다.
그렇게 알을 포함한 전리품들을 처분한 금액은 ‘성의’ 표시를 위해 교단의 살림주머니로 들어갔고, 이곳 교구의 관리층을 적당히 흡족하게 만들었다.
“아, 그 알…… 커흠.”
헥터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한다.
하피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쥐어 짜인 기억이 떠오른 듯하다.
“……하피 알하고 댁들 용병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소. 아무리 몬스터라도 수정과 산란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순 없는 일이고.”
“크허험! 그, 그렇겠지요? 분명 주변의 놀 따위와 붙어먹은 결과물이겠군요.”
알렉스의 확언에 헥터의 낯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둥지에서 획득한 하피의 알들이 혹시나 자신들이 씨를 뿌린 결과일까 싶어 마음이 착잡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쪽 사제 분들께 말은 잘해놨으니, 부상이 심한 이들은 며칠쯤 요양하면서 더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아! 도대체 이 은혜를 어찌…….”
“그만. 그놈의 은혜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이러다 귀에 딱지가 앉겠군.”
알렉스가 그리 말하자 헥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이 재산인 용병들에게 장기적인 휴식이 필요한 부상은 크나큰 악재 중 하나다.
그런데 알렉스가 손써준 덕분에 신전의 치료를 받아 빠르게 본업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용병들의 입장에선 겹겹으로 쌓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헥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알렉스는 잠시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서도 이사벨의 눈을 완치하기가 어렵다니.’
용병들의 부상은 고치기 어렵지 않았으나, 알렉스의 본래 목적에는 이곳 교구의 고위사제들도 고개를 저었다.
파괴된 눈을 재생시키는 건 잘린 팔을 다시 자라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고위사제들이 여럿 달라붙으면 치료하지 못할 것도 없어야 정상이다.
문제는 이사벨의 상처가 상급 악마에 의한 것이라, 저주의 일종에 가까운 힘까지 깃들어 있다는 점.
만약 이사벨이 신성력을 다루는 성기사가 아니었다면 눈의 상처에 깃든 악마의 기운이 골수까지 스며들어, 그녀를 광인으로 만들었을 것이었다.
-이분 자매님의 부상을 고쳐내려면 주교급의 사제 여럿에 특별한 성유물의 힘까지 더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연합군에 머물러 있을 당시의 사제들이 말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진단 내용을 떠올리며, 알렉스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결국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건가.’
중부에 발을 들이면서 어느 정도 염두에 두긴 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결국 최종 목적지는 그곳으로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대륙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고위사제들이 머무르고 있으며 국보 수준의 성유물들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
알렉스와 이사벨의 다음 행선지는 필연적으로 중앙 관구의 핵심지인 교황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님. 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저를 거두어주십쇼!”
“으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묘한 소리가 알렉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용병들을 신전에 맡기고 떠나려던 알렉스의 앞에서, 헥터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는 어떻게든 알렉스가 보여준 자비에 보답하고자 했다.
아무리 못 배우고 험하게 구르는 인생이라도 사람이 양심이 있지, 이만한 은혜를 그냥 감사의 인사로만 끝내고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라 여겼다.
“뭐? 하하핫! 그 나이에 종자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럴 필요 없으니 일어나시오.”
“저를 어떻게 쓰셔도 좋습니다.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제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쇼!”
난처하다는 듯이 뺨을 긁적거리던 알렉스는, 헥터를 바라보며 어쩌면 조만간 그의 능력이 필요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당장은 아니어도 분명 쓰임새가 있는 사람이긴 해.’
동부에서 벌어진 성전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교단 측에서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성과를 생각하면 자신에게 영지 하나쯤 떨어질 것은 확정이나 다름없는 사실.
알렉스보다 더 뛰어난 공적을 이룬 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위치와 규모가 어느 정도냐가 문제이지, 보상을 받는 것 자체는 정해져 있는 사실이야.’
그리고 영지를 운영하려면 응당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동부를 복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지원이 들어오긴 하겠지만, 물자는 그렇다 쳐도 인력이 가장 큰 문제다.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크게 소모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런 인적자원들이 아니던가.
‘내 영지가 생긴다면 자연히 영지를 지킬 병사들도 필요하겠지. 그런 면에서 경험 많은 용병을 휘하에 둘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무력 수준은 솔직히 눈에 차지 않지만, 아무리 알렉스가 강하다 해도 항상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주가 된다면 사람을 부려 일을 처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
생각을 마친 알렉스는 헥터를 자신의 사람으로 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