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1화
중부지역(2)
“허억!?”
상처가 가득한 남자는 알렉스와 이사벨을 발견하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
짧은 사이에 그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화한다.
놀람, 안도, 경계, 기대.
“기, 기사……? 나리들! 도와주십쇼!”
가만히 서서 도움을 요청하며 남자의 말에, 알렉스는 천천히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차림새를 봐서는 용병 같은데. 근처에서 전투가 있었나?’
알렉스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용병으로 짐작되는 남자의 얼굴에 한껏 긴장이 서렸다.
도시가 아닌 외부지역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란, 몬스터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존재다.
기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전사계급의 정점에 자리한 기사라는 족속들 중엔, 선민의식에 찌들어 일개 용병의 목숨 따위는 벌레처럼 여기는 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부상이 심하군. 몬스터에게 당한 건가? 도와줄 테니 이쪽으로 오시오.”
본인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지만 알렉스 역시 그런 사실을 대강 알고 있기에, 상대가 겁먹지 않도록 고압적이지 않은 어조로 말을 건넸다.
기사치고는 꽤나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알렉스의 모습에, 용병 사내는 경계심을 한층 누그러뜨리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 감사합니다. 으윽…….”
긴장이 조금 풀리자 상처의 통증이 크게 느껴졌는지,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기 전에 일단 응급조치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 알렉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치유의 손길을 발동했다.
“헉!”
따스한 빛이 자신을 감싸며 상처 부위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들자, 몸을 움츠린 채 헐떡거리던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성기사에게 치유계 능력은 전문 분야가 아니었기에, 알렉스의 스킬로는 부상을 깔끔하게 전부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온몸에 가득했던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며 적어도 출혈만큼은 멎었기에, 남자는 당장 부상이 악화되어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게 되었다.
“이, 이건…… 아! 설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몸을 살피던 남자가, 알렉스의 얼굴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맙소사! 그때의 은인이시군요! 제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시다니. 오오, 신이시여!”
“으음?”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알렉스는 의아해하며 그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때가 그러니까…… 델트 부근에서 저희 용병대와 만나셨는데.”
“아?”
몇 마디 설명을 덧붙이는 사내의 말에 알렉스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탄성을 터뜨렸다.
서부 지방의 중소도시 델트.
나름 특별한 곳이기에 금방 기억들이 생각난다.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눈을 뜬 알렉스가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도시이자, 마녀의 수작질로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루미넌 백작가가 위치한 곳.
그리고 이사벨을 처음 만난 기념비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분명 도시에 들르기 전에 상인을 호위하는 용병들과 만난 적이 있었지. 그들과 동행하다가 도적 떼의 습격에 휘말리기도 했었고.’
그때 처음으로 타인에게 치유 스킬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아마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부상을 치료해준 용병 중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알렉스 경. 아는 사이입니까?”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인가 봅니다.”
곁으로 다가와 질문하는 이사벨에게,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그때 용병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루미넌 백작가의 차남인 조슈앙과 만날 일도 없었을 테고, 부패의 저주로 언데드화된 백작가의 가솔들과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벨과도 만나지 못했겠지. 묘한 인연이네.’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알렉스의 모습에, 이사벨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그건 아직 못 들었네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용병은 아차 하는 얼굴이 되어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몬스터 놈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다른 동료들은…… 크흐흑!”
예상한 대로의 답이다.
성전이 발발하고 몇 개월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몬스터에 의해 피해를 입는 사건의 수는 기존보다 훨씬 더 증가했다.
원인이야 다들 알다시피, 주기적으로 도시 인근의 몬스터를 토벌해 개채수를 조절해야 할 병력들이 동부로 떠나 버린 탓.
기사와 병사는 물론이고 몬스터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용병들까지도 전쟁에 대거 동원되었으니, 그동안 빈집이 되어버린 다른 지역은 죄다 몬스터들의 수가 폭증할 수밖에 없었다.
“놀에게 당한 건가?”
알렉스는 저 멀리 이사벨이 쌓아둔 놀의 시체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나마 중부는 타 지방보다 많은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이기에, 대규모의 몬스터 생태계가 군집되어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자신들이 지나가고 있는 이 길의 주변 정도라면, 끽해야 한두 종류의 몬스터가 자리를 잡고 있을 터.
이 일대는 보다시피 놀 무리의 영역으로 보이니, 다른 종류의 몬스터가 더 출몰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그래도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인데, 고작 놀뿐이라면 이리 당하지도 않았습죠!”
무장에 충실하고 실력도 좋은 용병이라면, 놀 두어 마리 정도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
알렉스는 용병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전에 만났을 당시의 실력은 그냥저냥 평범한 용병대였던 것으로 기억나긴 하는데, 장비의 수준은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게 눈에 보인다.
막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핏물이 엉겨 붙어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손에 쥔 검은 흔해 빠진 싸구려 품질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에 사내는 기름 먹인 가죽으로 만든 버프코트를 입고, 위에는 튼튼한 사슬갑옷을 걸치고 있다.
추가로 팔뚝에 매달려 있는 타지(소형 방패)까지.
이 정도면 제법 잘 사는 영지의 정규군 못지않은 수준의 장비이니, 용병치고는 꽤 뛰어난 무장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그동안 제법 벌이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놀이 아니라면 그럼?”
“그것이…… 말씀하신 것처럼 놀 무리와도 조우하기는 했었는데, 하필 전투를 벌이던 도중에 하늘에서 다른 몬스터가 더 나타나는 바람에 그만…….”
“하늘? 비행형 몬스터라는 소리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푸드득.
거센 날갯짓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안색이 창백해진 남자가 머리 위로 시선을 옮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렉스 역시 고개를 들어 나타난 몬스터의 정체를 확인했다.
뽀얀 살결과 출렁거리는 풍만한 가슴들이 눈에 들어온다.
“……응?”
나체 상태로 나타난 여성의 몸을 직시한 알렉스의 눈이, 당황감에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피로군요. 중부에서는 마땅한 서식지가 없어서 보기 어려운 몬스터로 알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곁에서 들려온 이사벨의 음성에, 알렉스는 정신을 차리고 날뛰는 시선을 바로잡았다.
새와 맹금을 반쯤 섞은 듯한, 하피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비행형 몬스터.
중심이 되는 몸체는 인간 여성과 매우 흡사하지만, 잘 살펴보면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가 눈에 띈다.
팔 대신 거대한 날개가 달려 있고, 발에는 날카로운 갈고리발톱이 자라나 있다.
‘날아다니는 몬스터는 궁수나 마법사가 아니라면 대처하기 까다롭긴 하지.’
용병대가 당한 것도 이해할 만했다.
하피 자체는 엄청 강력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다면 상대하기가 곤란하다.
적이 하피뿐이라면 모를까 놀과 동시에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양쪽의 합공을 당했다면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도망친 사내를 추격해온 하피는 총 세 마리.
녀석들은 잠시 일행들의 머리 위를 활공하더니, 이내 날카로운 고음을 내지르며 발톱을 세우고 날아들었다.
“조심하십쇼! 저것들에게 붙잡히면 끝장입니다!”
용병 사내의 다급한 경고에, 알렉스는 성검을 뽑아 들고 덮쳐오는 하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부리와 발톱을 무기로 사용하는 맹금류와 비슷한 양식으로 행동하는 몬스터인 하피는, 부리는 없지만 대신 굉장히 위력적인 각력을 가졌다.
녀석들의 발길질에 머리를 차이기라도 하면 대번에 목이 부러져 즉사에 이르는 수가 있다.
거기에 큼지막한 갈고리발톱도 매우 위협적이다.
물론 아무리 날카로운 발톱이라 해도 기사의 판금갑옷을 찢을 정도는 아니지만, 녀석들은 중무장한 기사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비행능력을 갖췄다.
잠깐 방심하는 순간 하피에게 낚아 채여 수십 미터 상공으로 끌려가기라도 하면, 하피를 베고 탈출한다 해도 그대로 추락사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뭐, 안 잡히면 그만이지만.’
붙잡힌다 해도 굳건한 태세를 쓴다면 녀석들에게 끌려갈 일은 없겠지만, 알렉스는 굳이 방패로 하피들의 공격을 막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덤벼드는 하피들의 발톱을 슬쩍 피해내며, 알렉스는 좌우로 한 번씩 ‘X’자를 그리듯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마스터 레벨에 도달한 알렉스의 검술.
10레벨의 소드 마스터리 스킬이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움직임으로 하피들의 공격을 회피하며, 동시에 반격까지 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각각 한군데씩 날개가 잘려나간 하피 두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허억!”
간결한 동작으로 단숨에 적들을 무력화시키는 알렉스의 검술에, 바로 근처에서 긴장하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다.
키에엑?
퍼덕퍼덕.
가장 늦게 날아들던 마지막 한 마리의 하피가 급히 홰를 치며 몸을 세우더니, 이내 알렉스를 피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자신의 동족들이 순식간에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싸울 의욕을 잃어버린 듯했다.
물론 알렉스는 녀석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실드 부메랑]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의 방패가 바람을 가르며 하피를 향해 날아갔다.
키잇!
등 뒤로 따라오는 추격자의 존재를 감지한 하피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급격한 회피기동을 선보였으나.
알렉스의 방패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며, 끝끝내 하피의 꽁무니를 파고들어 하반신을 절반쯤 찢어놓았다.
‘흠. 이렇게 보면 또 괜찮은 스킬이긴 한데.’
명중률 보정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 이건 숫제 유도탄이라고 불러도 될법하다.
회수가 번거롭다는 점만 어떻게 해결한다면 매우 쓸 만해질 텐데.
땅으로 추락하는 하피의 시체를 향해 걸어가며, 알렉스는 자신의 방패에 혹시 회수기능을 추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사벨에게 선물 받은 아티팩트 방패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능이지만, 여기에 그런 추가적인 마법능력까지 부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대, 대단하싯, 하십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방패를 수거해 돌아오자, 용병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칭찬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오.”
“흐허허…… 범상치 않은 분임은 알고 있었지만…….”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알렉스의 수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성장한 상태다.
알렉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평범한 용병 수준에 불과한 실력을 보였음을 기억하고 있던 사내는, 순식간에 하피 셋을 처리하는 모습에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무리 기사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리 쉽게 몬스터를 해치우진 못할 텐데. 고작 일이 년 사이에 저렇게 강해지다니, 이런 걸 신의 기적이라고 하는 건가?’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힌 남자가, 알렉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제발 제 동료들을 구해주십쇼! 지금이라면 아직은 대부분 살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