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19화
종말의 악마(5)
“읏?”
무언가 변화를 느낀 이사벨이 자신을 쳐다보았기에, 알렉스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며 입을 열었다.
“제 새로운 능력입니다.”
달리면서 헌신 스킬의 효과를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자, 이사벨의 얼굴이 환해진다.
간절히 원하던 선물을 받은 듯한 표정.
“그럼 저는 이제 방어 따윈 도외시하고 오로지 공격에 집중하면 되는 거군요?”
“으음, 그렇다고 아예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시면…….”
“정말 멋진 능력입니다!”
흥분한 기색의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싶어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사벨 경에게 가해지는 충격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대신 맞게 되는 겁니다.”
“알렉스 경의 육체가 초월적인 견고함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곁에서 지켜봐 온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방어력을 너무 의지해 줘도 곤란한데.
나도 맞으면 아파.
웃으며 대답하는 이사벨이 혹시나 전투에서 너무 무모한 시도를 할까 봐, 알렉스는 다급히 주의를 주었다.
상급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조금 무리할 필요가 있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이 능력을 너무 맹신해선 안 된다.
방금 배운 스킬이라 제대로 실험해 볼 시간도 없었기에, 효과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확실한 기회를 잡을 때까진 제 뒤에 계십시오.”
“알겠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악마에게 거의 근접했기에, 알렉스는 그만 입을 다물고 이사벨보다 두어 걸음 앞서 놈에게 달려들었다.
느긋한 몸짓으로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던 상급 악마가 몸을 반쯤 돌리며 두 사람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아직 십여 미터는 떨어진 거리였지만 고무줄처럼 늘어난 놈의 팔이,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알렉스의 목을 베어왔다.
쉬애애액!
투둑.
습관적으로 방패를 내밀어 방어하는 대신 마주 휘둘러진 알렉스의 검이, 허공에 빛나는 선을 그으며 적의 팔을 끊어냈다.
‘좋아, 성공이다!’
놈에게 처음 피습을 당했을 땐 방어본능이 발동한 후에야 공격을 인지할 수 있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고 있던 지금은 아슬아슬했지만 늦지 않게 반응할 수 있었다.
날아드는 화살을 칼로 베어내는 수준의 기예였지만, 알렉스의 검술 실력이면 그 정도 시도는 해볼 만하다.
다친 팔을 회수하며 악마는 다시 반대편 팔을 내밀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달려오는 알렉스를 꿰뚫기 위해, 쭉 내뻗은 악마의 팔이 쏘아져 다가온다.
휘두르는 대신 찌르는 공격.
그만큼 속도도 더 빠르고 거리도 가까워진 상태이기에, 이번에는 알렉스도 차마 검으로 대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카강!
단단히 고정된 방패 위로 강렬한 충격이 가해지며 알렉스의 돌진이 저지된다.
악마와의 남은 거리는 이제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흘려보낼 수 있는 수준의 위력이 아니었기에 굳건한 태세를 발동하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자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고, 어차피 주공을 맡기로 한 건 다른 쪽이기에.
“더러운 죄악의 결정체여! 신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리노라!”
속도를 조절해 몇 걸음 뒤에서 달리던 이사벨이, 알렉스의 앞으로 치고 나와 악마를 향해 뛰어들었다.
흑색의 머리카락이 찬란한 빛으로 새하얗게 물들며 대량의 신성력이 주변으로 흘러넘친다.
-어리석은 예루스의 종이여. 소용없는 짓이다.
악마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을 내뱉는다.
마치 벌레가 기어 나오듯 놈의 팔과 다리가 세차게 꾸무럭거리더니, 수십 가닥의 촉수로 나뉘어 이사벨을 향해 쏘아졌다.
대략 5미터.
조금 과장을 보태면 코앞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 거리에서 가해진 놈의 공격을, 이사벨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알렉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기묘한 감각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 굳은 신뢰를 느끼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사벨은 전신을 파고드는 촉수를 무시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끄윽!”
공격당한 것은 이사벨이지만 비명은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견뎠다.
날카롭고 둔탁한 두 가지의 통증이 동시에 전신을 헤집는 느낌.
산탄총 앞에 정면으로 서서 총격을 맞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갑옷의 틈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이사벨이 입어야 할 피해를 대신 부담하며 육체에 손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크으…… 흣, 크흐흐!”
강렬한 통증 때문에 머리가 아찔했지만, 알렉스는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음기를 보였다.
자신이 이 고통을 감수하는 대가로, 이사벨에게 확실한 공격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어찌 인간 따위가!
절대적인 우위를 자신하며 거만한 태도를 내내 유지하던 상급 악마도, 이 순간만큼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강철로 이루어진 갑옷조차 가뿐하게 꿰뚫은 촉수가, 훨씬 연약해야 할 인간의 육체를 파고들지 못하고 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한 걸음.
악마와의 간격을 단 한 걸음 남긴 이사벨이, 머리 위로 폴액스를 높이 치켜들었다.
-멈춰라!
악마는 촉수로 체내를 파고들어 이사벨의 몸을 갈가리 찢으려던 시도를 포기하고, 방식을 바꿔 그녀의 팔다리를 칭칭 감아 구속하려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디바인 익시드를 발동한 채로 전력을 다한 이사벨의 힘은, 상급 악마라 해도 붙잡아둘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본신의 성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다면 모를까.
알렉스가 파악했듯이 겉보기와 달리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던 악마는, 이사벨의 맹공을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벼락같은 일격이 악마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악!
몸이 반으로 갈라진 상급 악마가 처음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었다.
녀석은 발악하듯 온몸에서 촉수를 뿜어대며 이사벨을 계속 공격했지만, 알렉스의 스킬로 보호받고 있던 이사벨은 아랑곳하지 않고 놈을 파괴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진 고깃덩어리가 되어가는 악마의 육체 사이에서 이사벨은 맥동하는 심장을 발견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악마의 약점임을 파악한 이사벨이, 들고 있던 폴액스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자비한 악력으로 열 개의 손가락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끄으윽! 그, 그만둬라!
처음과 달리 약한 소리를 내는 상급 악마의 말을 무시하며, 이사벨은 자신이 뽑아낸 심장을 양손으로 붙잡아 손끝에 온 힘을 집중했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듯이 힘을 주며 비틀어 쥐어뜯자, 결국 괴력을 버티지 못한 악마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지며 놈의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동일한 알림이 두 번 연달아 떠올랐다.
[알렉스 Lv 83]
[잔여 스킬 포인트 2]
불완전한 상태라 해도 상급 악마는 상급 악마.
알렉스가 직접 놈에게 입힌 피해는 사실상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경험치 폭탄이 터지며 알렉스를 연속적인 레벨 업으로 인도했다.
‘하하…… 그래도 어떻게든 잡긴 잡았구나.’
입을 열어봐야 신음소리밖에 낼 수 없을 만큼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기에, 알렉스는 그냥 속으로만 웃음을 흘렸다.
갑옷 때문에 외부에선 보이진 않지만, 헌신 스킬로 피해를 대신 받아주느라, 전신이 아주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이사벨의 마무리가 늦어져 공격을 조금만 더 허용했더라면, 악마보다 자신이 먼저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알렉스 경! 제가 악마를 해치웠습니다!”
악마의 피와 살점을 덕지덕지 붙인 이사벨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지만 워낙 자주 본 광경이라 그런지 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이게 흔들다리 효과 뭐 그런 건가.’
통증 때문에 바닥에 반쯤 주저앉은 자세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한달음에 뛰어온 이사벨이 그대로 몸을 던져 알렉스를 덮쳤다.
“켁!?”
그렇지 않아도 피를 너무 흘려 눈앞이 흐릿한 마당에 강렬한 태클에 당하자, 알렉스는 반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으으, 이사벨. 그러다 잘못하면 저 죽습니다.”
“죄, 죄소하이…… 몸이 마르으…….”
“아?”
이사벨의 어눌해진 말투에 이상함을 느낀 알렉스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내 그녀의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고.’
[정화의 불꽃]
사태를 파악한 알렉스는 곧바로 정화의 불꽃을 사용하고, 자신의 위에 쓰러진 이사벨을 꼭 끌어안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악마의 피를 그렇게 뒤집어썼으니 중독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환하게 타오르는 백염이 이사벨의 몸에 쌓여가던 독기를 태워 없애주었다.
“……마지막까지도 알렉스 경이 없으면 전 부족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군요.”
“부족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를 뿐이지요. 이사벨 경이 없었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악마에게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아닙니다. 알렉스 경의 능력이 아니면 저는 악마에게 다가가지도 못했을 테지요.”
“그럼 뭐, 저희 둘이 같이 있었기에 해결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하죠.”
“아하핫! 맞습니다. 알렉스 경의 곁에 있으면, 저는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함께이고 싶습니다.
라고 말을 덧붙이며, 이사벨은 알렉스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무언가가 입술을 덮쳤다.
알렉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머릿속이 텅 비워져 간다.
짧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 알렉스는 홍조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벨과 눈을 맞추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간지럽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대놓고 마음을 떠보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솔직히 서로에게 은근한 마음이 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간 함께 뒹굴며 이겨 내온 시련이 몇 번인데, 고작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서의 호감에서 그치기만 하겠는가.
그래도 섣불리 이성 관계 쪽으로 진도를 빼기는 어려워 마음의 줄타기를 하고만 있었는데, 이사벨이 이렇게 적극적인 표현을 해오니 자신도 제대로 응답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 그러니까, 뭔가 멋진 대사라도 해줘야…….’
그래야 했는데.
“……알렉스 경?”
적막한 시간만이 계속해서 흘러갔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이사벨이,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반응은 없었다.
“엣? 아앗!?”
지속된 출혈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감정이 요동치는 정신적인 충격까지 더해진 탓에, 알렉스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용기를 내어 입맞춤을 해온 여성에게 보여주는 반응으로는 가히 최악이라 할 만했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