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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18화 (118/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17화

종말의 악마(4)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힘이 빠져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엎드려 있던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결론은 있을 수 없었다.

레벨 10의 어설픈 칼잡이의 몸으로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알렉스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숱한 상황에서, 투지를 잃지 않고 여러 강적들을 고꾸라뜨리며 성장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저것과 대적하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절실히 떠올렸다.

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

상급의 악마라는 건 그만큼 다른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재앙이었다.

‘하지만…… 내가 피하면 누가 저 괴물을 막을 수 있지?’

막 몸을 돌리려던 알렉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위압감에 짓눌려 창백하게 질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현 상황에서 연합군의 방패가 되어야할 자신이 싸움을 포기한다면, 저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만 명을 가볍게 넘어가는 대규모의 군대.

문명 수준이 현대보다 떨어지는 이 세계에서 만 단위의 숫자란, 어지간한 도시의 총인구보다 많은 수의 규모다.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달아난다는 선택을 과연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까?

거기에 후방에서 회복 중인 이사벨은?

지금 같은 상황에 부상자까지 챙겨 도망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는 단순히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이상의 의미가 된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기라도 할 텐가?

그럴 순 없었다.

‘하,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속으로 우는 소리를 하며, 알렉스는 방패를 들었다.

가능성은 굉장히 낮겠지만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저 악마를 격퇴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전장의 찬가]

결사의 각오를 갖춘 알렉스의 음성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무너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교단의 성직자들이, 스킬의 효과가 담긴 그 특별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신성력이 물결치듯 퍼져 나간다.

마음을 다잡고 기도문을 외우는 사제들의 성법이 상급 악마가 뿜어내는 죽음의 기운에 저항하며, 뻣뻣하게 굳어 있는 병사들의 숨통을 간신히 트이도록 만들어주었다.

“싸, 싸워라! 멈춰 있지 마!”

“신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하찮은 것들.

씨애애앳!

불쾌감을 표하는 음성과 함께 강렬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던 형태의 팔이, 순식간에 가늘고 길게 늘어나며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수백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간 공격이 다시금 연합군을 향해 가해졌다.

하지만 결과는 아까와 같지 않았다.

악마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 연합군의 수호자, 알렉스의 방패가 그 앞을 막아섰기 때문에.

카강!

불똥이 튀어 오르며 방패 위로 길쭉한 상처가 새겨진다.

‘……막을 만한데?’

예리한 절삭력을 가졌지만 그렇기에 묵직하지 않다.

와이어처럼 생김새가 변이된 팔을 되돌리기 전에, 알렉스는 한발 빠르게 상급 악마의 팔에 검을 내리쳤다.

[심판의 일격]

서걱.

알렉스의 검격에 악마의 팔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늘어졌다고 해도 상급 악마의 육체인 만큼 상당히 질길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생각보다 쉽게 베어져 조금 당황스러웠다.

-건방진 놈.

싸늘한 음성과 함께 상급 악마가 반대편 팔을 움직였다.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내밀었으나, 이번의 공격은 앞서와 달리 넓은 범위를 베어내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었다.

방패와 부딪치기 직전에 속도를 줄이며 꿈틀거린 악마의 팔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며 알렉스의 몸통을 휘감았다.

“읏!?”

이제는 팔이라기보단 촉수라고 불러야 할 모양새였지만, 어쨌거나 악마의 팔은 알렉스의 전신을 옭아매며 강한 압력을 가해왔다.

기기긱. 끼깃.

전신을 감싼 갑주에서 금속의 비명이 들려온다.

숨이 턱 막히는 강렬한 조임에 알렉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큭! 벗어날 수가…… 응?’

투둑.

딱히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이 몸을 동여맨 촉수들이 끊어졌기에, 알렉스는 악마의 구속에서 절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리플렉트 실드]

미리 운용하고 있던 스킬의 효과 덕분이었다.

리플렉트 실드의 반사 데미지에, 실처럼 가늘어진 악마의 팔이 동강동강 잘려 나간 것이다.

‘뭐지? 아무리 이리 가늘게 변형했다고 해도, 상급 악마의 신체가 고작 반사피해에 절단된다고?’

알렉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합당한 의심이 피어오른다.

‘이 자식, 완벽한 본체로 소환된 게 아니었던 거 아냐?’

상대가 고위의 악마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쩌면 신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상급 악마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내구성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알렉스의 표정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아무리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몸이 버티지 못하면 놈도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싸움, 충분히 승산이 있어.’

자유를 되찾은 알렉스가 악마를 향해 달려 나갔다.

팔이 망가진 틈을 타, 한 방 먹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이내 놈의 손상된 양 팔이 원래대로 복원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쉽게도 악마종 특유의 재생능력에는 이상이 없는 모양이다.

“흐랴앗!”

거리를 좁힌 알렉스가 기합을 지르며 악마에게 검격을 가했다.

신성력의 광채로 번뜩이는 호선을 남기며 움직인 성검의 칼날이, 놈의 육체를 파고들었다.

‘좋아! 생각대로 그다지 단단하진 않군.’

악마의 가슴께가 쩍 벌어지며 검은 핏물이 흘러나온다.

이대로 계속 몰아붙이면 충분히 놈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떠올랐다.

치이익.

독성이 가득한 검은 핏물이 갑옷에 튀며 지글거리는 소리를 낸다.

중독을 염려한 알렉스는 정화의 불꽃으로 몸을 보호하며, 악마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격이 상대에게 닿기 직전에, 무언가가 알렉스의 다리를 후려쳐 자세를 무너뜨렸다.

‘윽?’

악마의 발이 모양을 변형하며 사각을 파고든 것이다.

외형은 사람이지만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촉수로 이루어진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인간의 무술처럼 움직임에 정해진 형식이란 게 없다.

동작을 예측할 수가 없으니 피하거나 막는 것도 쉽지가 않다.

알렉스는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다음 공격에 대비해 몸을 낮췄다.

그러나 이어지는 공격은 없었다.

-너는 나중이다.

악마는 알렉스를 내버려 두고 땅을 박차더니, 또다시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어 양팔을 길게 내뻗었다.

대량학살이 재차 반복된다.

“야 이 X새끼야! 이리 오지 못해!?”

화가 솟구친 알렉스가 욕설을 내뱉으며 악마의 뒤를 쫓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렉스를 무시하며 움직였다.

교단의 팔라딘을 비롯한 몇몇 기사들이 악마의 앞을 막아섰으나, 알렉스만큼의 방어력을 갖추지 못한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신체 일부가 잘려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상급 악마씩이나 되는 놈이 이리 졸렬하게 싸우다니!’

악마라는 존재에게 비열하고 치졸하다고 말해봐야 칭찬이 될 뿐이니,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그래도 기사들의 희생으로 악마의 움직임이 잠시 지체될 때마다, 알렉스는 놈에게 달라붙어 몇 번의 공격을 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렉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악마는 상처를 좀 입혔다 싶으면 알렉스를 피해 달아났고, 뒤를 쫓느라 시간이 지나면 이내 부상을 회복해 말끔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다.

게다가 살육을 벌일 때마다 어딘가 모자랐던 몸의 완성도가 점점 올라가는지, 녀석의 신체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뻐억.

“크윽!”

악마의 일격을 받아낸 알렉스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처음과 달리 상대의 공격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리기 시작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아직도 부족하다.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리는 상급 악마.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재차 놈을 쫓아 움직이려 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놈을 해치울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알렉스 경.”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막 악마를 쫓으려던 알렉스의 고개가 급격히 돌아갔다.

마음속으로 애타게 걱정했던 인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사벨!”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이사벨이 돌아온 것이었다.

일순 환하게 미소를 지었던 알렉스가 멈칫하며 굳어진다.

한쪽 눈이 흉터로 덮인 이사벨의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의 표정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을 읽은 이사벨이, 감겨 있는 눈가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당장은 완치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조금 불편하지만, 한쪽 눈으로도 전투를 수행할 순 있으니 치료는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다.”

“아…….”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그보다 지금은 저 악마를 쓰러뜨리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사벨의 말에 알렉스는 다시 악마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초 단위로 사람의 목숨이 갈려 나가는 상황이니, 길게 떠들고 있을 여유는 없긴 하다.

‘아무튼, 다행이야. 이사벨이 돌아왔으니 다시 승산은 충분해졌어.’

꺼져가던 희망에 불씨가 지펴진다.

자신과는 달리 이사벨이라면 단 일격으로도 악마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성기사가 악마의 뒤를 쫓아 달렸다.

‘이사벨을 보호해야 하는데.’

손에 닿는 인간들을 전부 찢어발기고 있는 악마에게 따라붙으며, 알렉스는 속으로 한 가지 걱정을 떠올렸다.

이사벨의 공격능력은 누구보다 앞서 있지만, 방어능력에 관해서는 전신갑옷에 의존하는 여타의 기사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론 이사벨의 갑옷은 고품질의 성유물인 만큼 방어력도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만, 상급 악마의 공격을 온전히 버텨줄 것이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자신이 악마의 공격을 막아주지 못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이사벨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이라면 방어본능의 발동이라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대상이 타인이라면 직접 움직이는 것 말고는 지켜줄 방법이 없다.

‘……아니. 방법이 없진 않구나.’

성기사의 스킬 중에 그런 스킬이 있다.

일정시간 동안 지정한 대상이 입는 피해를 사용자가 대신 받아내주는 효과를 지닌 스킬.

게임이 현실이 된 이곳에서는 기존의 방식과 조금 다르게 구현되긴 하겠지만, 알고 있던 대로라면 굳이 직접 적의 공격을 막아서지 않아도 이사벨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게 된다.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이는 상급 악마를 상대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스킬 포인트가…… 엇?’

무심코 상태창을 확인한 알렉스의 눈이 번뜩였다.

[알렉스 Lv 81]

[잔여 스킬 포인트 1]

레벨이 올라 있었다.

이사벨을 사제들에게 맡기고 정신없이 언데드들을 해치우는 동안, 필요한 경험치를 모두 충족시킨 모양이었다.

간부급의 타락기사를 잡고 경험치가 꽤 오르기도 했으니, 생각해보면 레벨 업을 할 때도 되긴 했다.

‘레벨 업 알림도 못 알아챌 정도로 내가 정신이 없었나.’

어쨌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알렉스는 바로 포인트를 소모해 자신이 떠올리고 있던 스킬을 습득했다.

[고결한 헌신 Lv 1]

필요한 준비가 갖춰졌다.

이사벨을 대상으로 헌신 스킬을 사용하자,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한줄기의 선이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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