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17화
종말의 악마(3)
‘안 돼…….’
알렉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정신이 멍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디바인 크로스]
거의 반사적으로 사용한 스킬에 의해, 눈앞의 사물들이 번쩍이는 빛에 가려 지워져 갔다.
잠시 뒤.
알렉스는 자신이 이사벨을 품에 안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안 돼, 제발!’
위중해 보이는 상처.
안구처럼 예민한 신체기관의 손상은 고위성직자의 성법으로도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영구적인 시력의 상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알렉스는 차라리 그 정도에서 그칠 일이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눈을 찔린 정도뿐이라면, 이사벨이 기절 상태에 빠질 리가 없었기에.
물론 시력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의 큰 부상을 입는 것은, 평범한 인물이라면 충분히 심한 통증을 느끼고 기절할 수도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작고 가녀려 보이는 체구와 달리 강건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기사인 이사벨이, 과연 눈 하나를 잃은 정도로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욱 깊숙한 곳까지 상처가 생긴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닐 거야. 염병할! 아니어야 해!’
만약 안구보다 더 깊은 부위의, 이를테면 두뇌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뇌손상이 심해져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아직은 심장이 뛰고 있다지만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면, 신체의 모든 기관이 점차 활동을 정지할 것이다.
교황이나 하다못해 추기경쯤 되는 인물이 나선다면 또 모르겠지만, 당장 그런 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제발 그리 심각한 상태가 아니기를…….’
외부에서 보는 것으로는 안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기에, 알렉스는 최대한 빠르게 이사벨을 치료하고자 교단의 사제들이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어서! 당장 치료를!”
“어엇!? 알렉스 경?”
“빨리! 치료하라고!”
“아, 알겠습니다.”
연합군의 수호자라는 상징이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의 크나큰 지지를 받고 있는 알렉스의 닦달에, 사제들은 군말 없이 모여들어 이사벨의 치료를 시작했다.
이사벨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에서 몰아치는 신성력의 파도를 잠시 지켜보던 알렉스는, 이내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그건 뭐였지? 그냥 악마의 신체 파편이 아니었던 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뛰고 있는 심장이었느니, 평범하진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사벨과 함께 처리한 간부급의 타락기사가 파편의 힘을 활용하려 들지 않은 것도 이상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이미 자의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악마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것이라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피를 촉수의 형태처럼 만들어 반격한 것이 설명이 된다.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하급 악마 따위가 아니었는데. 고위의 악마를 불완전한 모습으로 소환해 둔 건가?’
알렉스는 루미츠 왕국을 점령할 당시, 강력한 정신계 마법으로 연합군 전부를 현혹했던 안개 속의 상급 악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녀석은 격에 맞는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여러 개의 촉수 덩어리로 나뉜 모습을 알렉스의 앞에 드러냈었다.
어쩌면 아까의 심장도 상급 악마를 이 땅에 불러와 사역하겠다는, 암흑교의 과한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됐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그만한 기운을 품고 있던 존재라면 디바인 크로스 한 번에 소멸되진 않았을 거야.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어떻게든 제거하기는 해야 할 텐데.’
자신이 지나쳐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지만, 제법 먼 거리를 뛰어온 탓에 여기서는 그 심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 사실에서 또 다른 의문을 느꼈다.
적들의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는데, 아군들은 뭐하느라 여기서 계속 지체하고 있었단 말인가?
주변을 둘러본 알렉스는 이내 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언데드들이 원래 이 정도나 있었던가?’
연합군의 병력들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대량의 언데드 몬스터들을 상대로, 꽤나 격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처음 내성을 돌파할 당시에는 적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계속해서 몰려오는 언데드들이 연합군의 발목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언데드가 끝없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정확한 규모는? 바깥에서 적이 들어왔다면 예비대로부터 소식이 있었을 게 아닌가!”
“그게…… 전 방향에서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한 탓에 규모 파악이 어렵습니다. 다만, 보고들을 종합해보면 추정 수는 아마도 1만 이상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어디서 그런 대부대가…… 이교의 무리를 해치우면서 언데드들도 전부 사라졌던 게 아니었나?”
지휘부의 인물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언데드들이 크게 줄어들었던 것은 적들의 계략이었던 건가? 어쩌면 이 상황 자체가 함정에 빠진 걸지도…….”
“이런 빌어먹을! 성벽이 죄다 성한 곳이 없으니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오는군.”
“잠시 물러납시다! 언데드들이 계속 들이닥치고 있으니, 무너진 성벽이라도 한쪽에 끼고 싸우는 것이 훨씬 유리할 거요!!”
내성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포위당한 채로 긴 싸움을 지속해야 될 상황이기에, 연합군은 외성으로 물러나 약간이라도 수성의 이점을 살리기로 했다.
“저리 꺼져!”
으지직!
후려치는 방패에 맞은 스켈레톤 한 마리가 산산이 부서지며 바닥에 흩어진다.
마냥 뒤에서 지켜본다고 해서 이사벨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에, 알렉스는 사제들에게서 떨어져 기사들과 함께 언데드들을 격파하며 한쪽으로 길을 뚫었다.
외곽의 성벽으로 이동한 연합군은 방진을 갖춘 채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상대했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부분들이 있다고 해도 성벽은 성벽인지라, 확실히 건물들이 죄다 무너져 사방이 뻥 뚫려 있던 시가지보다는 훨씬 수비하기가 유리해졌다.
물밀 듯 밀려오는 언데드들에게 맞서 연합군은 격렬한 싸움을 이어갔다.
* * *
알렉스가 아군들과 합류해 그렇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내성 안에서는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농도 짙은 흑마력이 미친 듯이 휘몰아친다.
부르르르.
암흑교도들과 언데드의 시체 사이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악마의 심장이,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알렉스의 디바인 크로스에 휩쓸린 탓에 표면이 까맣게 타버렸던 심장에서, 다시금 핏줄기가 거세게 솟구쳤다.
직경이 1미터가량 되었던 거대한 심장은 이내 크기가 급격히 쪼그라들더니, 마치 사람의 심장처럼 작은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쏟아져 나온 핏물이 바닥으로 뿌려지지 않고 수천 가닥으로 갈라지며, 가느다란 촉수처럼 변해 작아진 심장의 주위를 감쌌다.
살아 있는 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서로를 향해 복잡하게 뒤엉키던 촉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는 형태를 만들어냈다.
-부족하다.
인간의 외형을 갖췄지만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는 그것으로부터, 기괴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것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연합군이 물러나 있는 방향이었다.
* * *
“저, 저게 뭐야?”
‘음?’
누군가의 경악하며 외치는 목소리에, 언데드들을 베어 넘기고 있던 알렉스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금색의 털을 휘날리는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아.”
두 발로 일어선 킹이 캥거루처럼 폴짝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신수라는 소문에 어울리는 위엄 따윈 느껴지지 않는 방정맞은 모양새.
킹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조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알렉스도 순간 당황했으니 다른 이들이야 오죽할까.
잘려 나간 앞다리가 아직 재생되지 않은 상태라 저렇게밖에 움직일 수 없긴 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렇게라도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한 게 아닐까 싶긴 하다.
‘킹도 챙겨왔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정신을 놓고 있긴 했구나.’
알렉스의 얼굴에 미안한 감정이 서린다.
이사벨의 부상에 눈이 뒤집혀 급하게 물러나느라, 먼저 쓰러져 있던 킹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푸르륵!
쿵!
병사들을 지나쳐 알렉스의 앞에 도달한 킹이, 거칠게 투레질하며 알렉스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으윽…… 미, 미안하다.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어.”
바닥에 쓰러진 채 콧김을 씩씩 뿜으며 원망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킹에게, 알렉스는 면목이 없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재주껏 스스로 몸을 피하긴 했지만 여전히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기에, 알렉스는 킹을 사제와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연합군 대열의 후미로 보냈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아직 언데드들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기에, 알렉스는 다시 전장에 합류해 싸움에 집중했다.
‘이사벨은 괜찮을까? 후우, 괜찮을 거야.’
숨을 한 차례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이사벨에게 돌아가 치료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그래도 연합군을 지탱하는 수호자로 칭송받는 사람으로서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기에, 알렉스는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며 사나운 기세로 언데드들을 격퇴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수를 세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몰려오던 언데드들의 파도가, 점차 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영광스러운 승리가 눈앞에 있다!”
“으아아!”
“이야아압-!”
장교들의 격려에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힘을 쥐어짜 냈다.
승기는 확실히 이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조금만 더 싸우면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며, 연합군의 전 병력이 전투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사실은 그 모든 노력이 전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때까지는 여기에 있던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쉬애액-!
어디선가 바람이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알렉스의 시야에 움직임을 멈춘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후두둑.
사람의 머리가 떨어져 내린다.
농부가 추수를 위해 휘두른 낫에 걸린 곡식의 이삭처럼.
근 세 자릿수에 달하는 머리가 동시에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뭐……?”
충격으로 크게 부릅떠진 알렉스의 눈에, 목 없는 시체들이 허물어진 자리 사이로 홀로 우뚝 서 있는 하나의 형상이 들어왔다.
피부색이 선홍빛이라는 점만 빼면, 평범한 인간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존재.
‘아…….’
알렉스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너무나 거대한 존재감을 마주한 탓에,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공간 전체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버린 탓이다.
만 단위가 넘는 사람이 모여 있는 전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적막함이었다.
-부족하다. 너무 부족해.
고막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뇌리에 직접 새기는 듯한 기괴한 음성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끄윽……!?’
극심한 어지러움과 함께 속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 알렉스를 괴롭혔다.
마치 끈적끈적한 액체 속에 몸이 잠긴 것처럼, 농밀한 흑마력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우욱!”
“끄르륵…….”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병사들이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단지 저것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만으로, 사람들은 정신이 무너지며 짓밟힌 벌레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은 알렉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건…… 상급 악마? 고위의 악마가 마계화 지역도 아닌 장소에서 저리 또렷하게 본신의 형체를 유지할 수 있다고?’
악마는 고위급에 도달할수록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지닌다.
그리고 악마임이 틀림없는 기운을 풍기는 눈앞의 존재는,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암흑교도들이 죽어가는 순간 보였던 악의 서린 웃음들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놈들은 이미 고위급의 악마를 이 땅에 온전히 불러들이는 시도에 성공한 것이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저히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는 강대한 존재의 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