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15화
종말의 악마
암살자와 네크로맨서를 끝으로 더 이상 고위급의 암흑교도가 등장하진 않았기에, 알렉스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어렵지 않게 캠프 안의 잔당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3단계 성과 보상이 지급됩니다.]
[잔여 스킬 포인트 3]
‘오호?’
여전히 진행 중으로 표시되어 있는 ‘빛을 잠식하는 어둠’ 퀘스트의 성과 보상이 오랜만에 정산되었다.
혹시 더 숨어 있는 적이 있는지 탐색하며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알렉스는, 떠오르는 알림에 반색하면서 스킬창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스킬 포인트를 3개나 주다니.’
포인트에 여유가 생긴 알렉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투자할 스킬을 골랐다.
[심판의 일격 Lv 4]
일단 3레벨에 머물러 있던 심판의 일격을 4레벨로 만들었다.
워낙 자주 사용하는 스킬이라 마스터 레벨인 5까지 올려도 되겠지만, 일단은 1개의 포인트만 투자하는 것에서 멈췄다.
‘공격도 중요하지만 역시 난 방어에 신경 쓰지 않으면 불안하단 말이지.’
[굳건한 태세 Lv 5(Max)]
[천상의 가호 Lv 2]
거대 시체골렘에게 묵직한 한방을 얻어맞고 나니, 저레벨 시절부터 숱하게 느꼈던 생존을 위한 욕구를 간만에 자극받은 것 같다.
결국 남은 포인트는 천상의 가호를 2레벨로 만들고, 효율을 따지느라 미루고 있었던 굳건한 태세 스킬을 마스터하는 걸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제 좀 괜찮을까 싶으면 아찔하게 만드는 놈들이 꾸준히 튀어나오니, 방어 쪽 스킬은 올리고 올려도 부족한 느낌이야.’
아무튼 적들의 소탕을 마치고 포인트의 분배도 끝낸 알렉스는, 동료들과 함께 당당하게 연합군 주둔지로 복귀했다.
캠프를 습격해 상당수의 암흑교도들을 제거한 덕분인지,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던 언데드의 군세는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다.
“그간 미친 듯이 튀어나왔던 언데드 때문에 병력들의 피로 관리에 어려움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될 것 같군요.”
“자연적으로 발생하던 언데드들도 전부 사라진 겁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대지는 여전히 사기에 오염되어 있으니, 언데드 역시 꾸준히 새로 일어나게 되겠지요. 그래도 이제까지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아마 그동안은 이교의 무리들이 쥐새끼마냥 우리 곁을 맴돌며, 알바니아 전역에 퍼져 있던 언데드들을 끌어들이는 등불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소.”
“과연! 그럼 앞으로는 적들의 출현빈도가 훨씬 낮아지게 되겠구려.”
고무적인 소식에 지휘부의 인원들은 다들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간 파도치듯 밀려오는 언데드들에게 시달리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자존심 강한 이들이 이 땅에서 후퇴해 다른 지역 연합군의 협력을 요청하는 방향에 대한 안건을 검토해야 할 정도로, 알바니아에 진입해 있던 중남부 연합군의 사정은 좋지 않았었다.
“이쪽 지역은 점령 후에도 꽤나 골치 아픈 땅이 되겠군. 정화가 완전히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할지.”
“크흠! 공적에 따라 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야 하는 우리로선, 이쪽은 영 실속이 떨어지는 구역이 되겠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지역으로 목표를 수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에잉, 쯔쯧!”
“자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나 하시고! 지금은 우리 연합군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합시다!”
“맞소. 이제 다시 본격적인 진군이 가능할 테니, 잠시 정비를 갖추고 나서 그대로 이 땅의 중심부까지 진격하도록 합시다.”
언데드들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연합군은 알바니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수도와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진입해 있었다.
수도까지만 제대로 길을 뚫어 놓고 난다면 나머지 지방 구역을 정리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지게 될 것이다.
더는 언데드들도 과도하게 몰려오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꿀맛 같은 휴식으로 피로를 푼 후, 중남부 연합군은 다시금 알바니아의 점령에 박차를 가했다.
* * *
자잘한 전투를 몇 번 더 거치긴 했으나, 연합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알바니아의 수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는 언데드들이 떼거리로 몰려오지 않게 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끄응. 굉장히 역겨운 공기가 잔뜩 퍼져 있네.’
목적지인 수도의 성벽 앞에 도달한 알렉스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한 기운에 좀처럼 인상을 펼 수가 없었다.
전쟁 내내 암흑교도들과 숱하게 부딪쳐왔지만, 이렇게 지독한 느낌은 처음이다.
“성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군요.”
“전투를 수십 번은 치른 것 같은 몰골이군. 분명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우리가 처음일 텐데?”
“이교의 무리들이 뭔가 수작을 부려둔 모양입니다.”
반쯤 무너져 내린 성곽의 모습에, 지휘부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우려의 말을 내뱉었다.
동부 지방이 다른 곳들보다 낙후된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수도쯤 되는 도시가 이렇게 망가져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성전이 발발하고 나서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수백 년쯤 방치된 것처럼 성벽 여기저기에 깨지고 주저앉은 부분들이 눈에 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제대로 보수조차하지 않고 수차례 연이은 전투를 겪은 후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몰골이었다.
“내부의 상황은?”
“언데드 몬스터 일부가 관측되긴 했으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외성 안쪽으로 대규모의 적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으나, 일단 적어도 성벽 근처에는 적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흐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분명 지난번 저희 공격대가 이교도 놈들을 토벌하며, 남아 있는 놈들이 얼마 되지 않는 거겠지요.”
“성벽이 저 모양이니 외성을 함락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이대로 싹 쓸어버리시죠.”
“뭔가 문제가 생겨도 빠져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진 않습니다.”
“좋소. 주변을 철저히 살피며 진입하도록 합시다.”
기이할 정도로 망가진 성벽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적들을 눈앞에 두고 주저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연합군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는 성벽을 지나, 천천히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딱히 함정이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긴 한데…….’
성곽 일대의 공기가 굉장히 불길했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군사행동을 막아설 수는 없기에, 알렉스는 일단은 별말 없이 연합군의 선두에 서서 발길을 옮겼다.
어차피 뭔가가 있더라도 확인을 하려면 자신이 앞장서서 알아보기는 해야 했다.
그어억.
“하앗! 감히 어딜!”
“우측에 언데드 십여 마리!”
“대열을 유지하라!”
성곽 인근을 돌아다니는 소수의 언데드들을 처리하며, 연합군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나아갔다.
“건물들의 상태가…….”
반쯤 무너져 있는 성벽도 이상했지만, 외성을 지나 들어선 내부의 광경은 더욱 처참했다.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
한 왕국의 수도라기보다는 잔해만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지를 방문한 느낌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커억!”
“아닛!?”
주변을 둘러보던 지휘관 한 사람이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폐허의 그늘 속에서 튀어나온 암살자의 습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어둠이 내려앉으며, 내성으로부터 하나둘씩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에엑.
끼야아악!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시체와 허공을 날아다니는 망령을 조종하는 네크로맨서들.
“클클! 모두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지어다!”
“버러지 놈들. 전부 짓뭉개주마!”
광범위한 저주의 술법을 펼치는 어둠사제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염동력의 이능으로 병사들의 목을 비틀고 집어던지는 마녀들.
광기에 취해 눈이 벌게진 암흑전사들과, 그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타락기사들.
온갖 부류의 암흑교도들이 연합군의 앞을 막아서며 공격해 왔다.
“예루스시여! 당신의 자녀들을 가호하소서!”
“빛의 인도를 따르라!”
“두려워 말라! 신께서 그대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이에 맞서 교단의 전력들 역시 각기 자신의 분야에 맞는 성법을 펼치며 아군을 보조했다.
성직자들의 축복이 저주를 상쇄시키고 연합군 병력의 사이로 침투하는 흑마력을 밀어냈다.
[전장의 찬가]
알렉스 역시 신성력이 담긴 음성을 퍼뜨리는 스킬로, 아군들의 정신을 보호하고 사기를 북돋았다.
숨통을 조여 오는 흑마력의 기운에 일순 혼란에 빠져들던 연합군 병사들은,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전투에 임했다.
“겁먹지 마라! 적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가 훨씬 우세하다!”
다양한 방식의 공격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암흑교도들의 수는 연합군 전력에 비하면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상대측에 수적인 차이를 뒤집을 정도의 실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부급의 고위 교도는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게 암흑교 놈들의 마지막 발악인가? 흐음.’
이정도가 전부라면 알바니아의 점령은 더 이상 아무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 봐도 될 것이다.
지난번 해치웠던 고위 네크로맨서가 마지막 순간에 살짝 신경 쓰이는 말을 내뱉었었는데, 그건 그냥 허세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선두에 나서 있던 알렉스는 암흑교도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놈! 영겁의 재앙이 너를 옭아맬 것이-”
“아아, 그러시던가.”
서걱!
덤벼드는 암흑교도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며, 알렉스는 아군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적들을 점점 밀어붙였다.
알렉스가 모든 방위를 커버해 줄 수는 없다 보니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하긴 했다.
그래도 전열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알렉스 한 사람의 존재 덕분에, 연합군은 최소한의 피해로 암흑교도들을 격파하며 지나갈 수 있었다.
“읏?”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암흑교도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 내성에 도달할 때쯤.
거침없이 나아가던 알렉스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진한 흑마력의 향기에 움찔하며 멈춰 섰다.
‘저건……?’
소규모의 언데드 몬스터와 몇 명의 암흑교도들.
그들 사이로 시체골렘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번처럼 말도 안 되는 거대한 크기가 아닌, 평범한 형태의 시체골렘이다.
상위의 언데드긴 하지만 알렉스에겐 더 이상 적수가 되지 못하는 수준의 몬스터.
다만 그 시체골렘이 아기를 품듯이 양손으로 감싸 안고 있는 무언가의 존재가, 알렉스의 감각에 격렬한 경고를 보내왔다.
직경이 1미터쯤 되어 보이는, 검붉은 색의 고깃덩어리.
그것은 펄떡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의 심장이었다.
‘……악마. 그것도 상당히 격이 높은 존재의 파편.’
외성 바깥에서부터 감지된 불길함의 정체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악마의 파편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하긴 손가락 같은 신체 일부 따위와 비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여겨질 정도로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심장이라는 기관.
그것도 멈춰 있는 것이 아닌 저렇게 힘차게 맥동하고 있는 심장이라면, 단순히 파편쪼가리일 뿐이라고 여겨선 안 될 일이었다.
꿀꺽.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뻣뻣해져 올 정도로 긴장감을 느끼며, 알렉스는 목이 타는 듯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