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14화
죽은 자들의 땅(4)
‘이제 큰 고비는 넘겼군.’
방어력을 무시하는 기술을 가진 암살자가 사라진 이상, 더는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만한 문제는 없었다.
부상을 감수해 가며 암살자를 끌어들여 제거한 알렉스는, 성공적인 결과에 살짝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런 알렉스의 발밑에서, 하얀 뼈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꼬챙이들이 솟구쳤다.
뼈 무더기를 불러내 조종하는 네크로맨서의 마법이었다.
까가각!
날카로운 뼈창들이 갑옷을 긁으며 고막을 자극하는 소리를 냈다.
바닥에서 솟아난 뼈들은 단단한 무장을 뚫고 알렉스에게 상처를 입히진 못했으나, 행동을 잠시 구속하는 저지물의 역할로는 충분했다.
‘쓸데없는 짓을.’
암살자를 잡아내느라 무리한 탓에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이깟 방해물에 막힐 정도로 부상이 심각한 건 아니다.
알렉스는 신성력이 충만한 성검의 칼날로 자신을 가로막는 뼈들을 베어내며 주변의 공간을 넓혀갔다.
갑옷을 뚫지 못하는 이런 마법은 무장이 빈약한 병사들에게나 위협적이지,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상대로는 잠깐의 시간벌이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상대가 원한 것은 바로 그 잠깐의 시간이었다.
“저주받을 세상이여! 결국 너희들은 모조리 파멸을 맞이할지니!”
네크로맨서가 갑자기 지팡이로 바닥을 세차게 내리쳤다.
으지직.
부러진 지팡이 사이로 무언가 길쭉한 물건이 튀어나왔다.
‘……저건?’
순간 나이프 같은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길쭉한 손톱이 달려 있는 하나의 손가락이었다.
인간의 그것과 흡사한 모양새였지만, 두세 배쯤 길고 굵직한 손가락.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손가락에서 심상치 않은 농밀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신체냐.”
“크흐흐! 만악의 지배자, 심연의 군주시여! 나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흐하하핫!”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뜨린 네크로맨서가 그것을 집어 들어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길고 뾰족한 손톱이 잘 벼려진 날붙이처럼 가슴을 파고들어, 네크로맨서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그긋. 쩌적!
막 앞길을 방해하는 뼈창들을 전부 잘라내고 네크로맨서에게 달려들려던 알렉스는, 급격한 땅의 흔들림에 휘청거리다가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읏!”
지면이 갈라지며 대지가 시체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스스로 심장을 찌른 네크로맨서를 중심으로, 뼈와 살점들이 한 덩어리로 뭉치며 점차 거대한 형체를 만들어갔다.
‘뭐야? 시체골렘?’
뭔가 엄청난 게 튀어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던 알렉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형상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시체골렘이 상급의 언데드에 속하긴 하지만, 이미 앞서 한 차례 격파했던 것처럼 자신에겐 그리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감상이었다.
“……어?”
시체는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고, 덩어리의 형체는 점점 급격하게 커져갔다.
‘20미터? 아니, 30미터? 미친! 어디까지 커지는 거야!?’
그리고 마침내.
뼈와 살점이 뭉쳐 이루어진 기괴한 형태의 거인이, 알렉스의 눈앞에 우뚝 섰다.
어지간한 성벽보다도 더 높은 크기.
칼 한 자루 들고 대적하기엔 너무나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거체였다.
드래곤과 더불어 지상최강의 생명체 전해지던 신화적인 종족, 전설 속 영웅들의 이야기에나 등장하는 거인족 타이탄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었다.
일반적인 시체골렘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괴물이, 알렉스를 노리고 주먹을 내리쳤다.
‘이런 X발!’
안색이 창백해진 알렉스가 다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알렉스는 스킬창을 열었다.
[굳건한 태세 Lv 4]
[잔여 스킬 포인트 0]
굳건한 태세 스킬의 방어력 증가 효과는, 레벨이 오를수록 증가폭이 점점 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스킬을 쓰기 전의 기본적인 방어력이 10 정도라 치고, 1레벨의 굳건한 태세가 그 수치를 50 정도로 증폭시켜 줄 수 있다고 치자.
그럼 2레벨의 방어력 수치는 70이 되고 3레벨의 방어력 수치는 80인 정도로, 포인트를 투자하는 것에 비해 효율이 점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게임에서는 어떤 능력치가 되었든 간에, 고작 1, 2의 수치라도 더 높이고자 목숨을 거는 것이 게이머들의 성향이긴 하다.
그러나 현실이 된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알렉스는 탱커의 밥줄 스킬인 굳건한 태세를 3레벨까지만 찍어두고 한동안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근데 저건 잘못하면 한 방에 훅 가겠잖아!’
방어력만큼은 자신이 세계최고이지 않겠냐고 자부하던 알렉스지만, 저 거대 시체골렘의 주먹에 얻어맞고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방어능력을 높이고자, 3레벨 이후로 손을 대지 않고 있던 굳건한 태세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콰아앙!
집채만 한 주먹이 대지를 강타하며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음이 울린다.
그 무지막지한 주먹과 지면 사이에 끼어 충격을 그대로 받아내야 했던 알렉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끄으…….”
정말 더럽게 아팠다.
압도적인 질량이 가해오는 폭력은, 아무리 알렉스라 해도 쉬이 견뎌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 시체골렘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시금 내려칠 자세를 취하는 적의 모습에, 알렉스는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한쪽 다리가 제대로 반응해주질 않는다.
‘이런 썅…….’
갑옷의 파츠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아무래도 무릎이 완전히 박살 난 게 아닌가 싶었다.
‘이거 진짜 큰일 났는데?’
저런 주먹질을 앞으로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알렉스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주먹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폭발적인 소리와 함께, 지면을 뒤흔드는 충돌이 발생했다.
찢긴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충격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는지, 거대 시체골렘의 주먹 일부가 터져 나간 탓.
이내 뭉개진 주먹이 공중으로 떠올랐지만, 그 아래 알렉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먹에 깔리기 직전에 누군가가 알렉스를 붙들고 자리를 피한 덕분이었다.
“킹! 이런 사랑스러운 녀석!”
프르륵.
암살자의 습격으로 전신에 십여 개의 자상을 입고 쓰러졌던 킹이, 특유의 재생력으로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알렉스의 팔을 물고 위험 속에서 빠져나온 킹은, 이어서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주인을 등 위로 던져 올렸다.
한쪽 무릎이 망가졌지만 신체의 다른 부분들은 아직 움직일 만했기에, 알렉스는 그대로 킹의 등 위에 안착해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킹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군.’
알렉스는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하며 거대 시체골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말 위에 오른 이상 망가진 다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상황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아직 움직일 수는 있다지만 알렉스의 컨디션이 정상이라 하긴 어려웠고, 킹 역시 여전히 몸 곳곳에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걸 봐서는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다.
디바인 크로스가 없이 저 엄청난 덩치를 가진 놈에게 어떻게 피해를 입혀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래도 우는소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적을 피해 거리를 벌리던 알렉스는 말머리를 돌려 놈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 시체골렘이 알렉스를 잡기 위해 손바닥을 휘둘렀지만, 킹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다.
상태가 만전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뛰어난 기동력을 보여주는 킹 덕분에, 알렉스는 손쉽게 놈의 발목 부근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심판의 일격]
신성력이 담긴 강맹한 검격에 살덩어리가 쭉 찢어지며 고름과 핏물이 흘러내린다.
역한 냄새와 징그러운 생김새 탓도 있긴 했지만, 알렉스는 다른 이유 때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별로 티도 나질 않네.’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지만 워낙 몸집이 큰 녀석이다 보니, 그다지 데미지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같은 공격을 몇십, 몇백 번을 반복해야 그나마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까지 내 몸이 버틸지 모르겠네.’
알렉스는 한숨을 삼키며 재차 적에게 돌격을 가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주 예루스께서 정하신 율법으로 이르노니! 지상은 산자들의 것이오, 시체는 땅속으로 들어갈지어다!”
그런 알렉스의 귓가로, 더없이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벨 경!”
“죄송합니다. 앞을 막아서는 적들이 많아 합류가 늦었군요.”
“아뇨, 늦지 않았습니다! 딱 지금이 이사벨 경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어질 정도로 반갑네요!”
“앗? 그, 그런…… 읏…….”
너무 과장되게 반응했는지, 달려오던 이사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멈칫거린다.
아무튼, 이제 괜찮은 방법이 생겼다.
저 웅장한 크기의 시체골렘을 쓰러뜨리려면, 이쪽도 거인의 힘으로 놈을 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기회를 봐서 저 녀석에게 한 방 먹여주십시오!”
“으아…… 그럼 키…… 는 언제……?”
“예? 뭐라고 하시는지 잘 안 들립니다!”
“아, 아닙니다!”
알렉스가 킹을 움직여 거대 시체골렘의 앞에서 주의를 끄는 동안.
놈의 뒤쪽으로 돌아간 이사벨이 곧장 익시드 상태에 돌입하며 공격을 가했다.
날붙이보다는 둔기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사벨은 오랜만에 폴액스가 아니라 보조무장인 플레일을 꺼내 들었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흉악한 철구가 맹렬한 기세로 휘둘러졌다.
퍼엉!
거대 시체골렘의 발목이 움푹 파이며 터져 나온 살점이 비산한다.
확실히 파괴력만 놓고 보면 익시드 상태에 돌입한 이사벨의 공격은, 알렉스가 어떻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력을 가졌다.
그간 적지 않은 전투를 거듭하며 스스로의 성법 운용에 익숙해진 이사벨은, 이제 디바인 익시드를 1분가량 유지해도 탈진에 빠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발동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훨씬 길게 늘어난다.
이윽고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 끝에 발목이 날아간 거대 시체골렘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지면 위로 엎어졌다.
‘음?’
알렉스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집중하느라 미간을 좁힌 탓이다.
거대 시체골렘이 넘어지며 몸을 숙인 덕분에, 크기의 차이로 보이지 않았던 상반신의 끝에 알렉스의 시선이 닿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시체가 뭉쳐진 시체골렘이지만, 유독 눈에 띄는 시신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악마의 신체를 이용해 스스로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던 네크로맨서의 시신이었다.
‘맞아. 다른 언데드도 그렇기는 하지만, 시체골렘은 유독 술자의 조종 여부가 성능에 큰 영향을 끼치지.’
이미 네크로맨서는 심장이 파괴당해 죽은 모양이지만, 그 시신은 거대 시체골렘을 구성하고 움직이는 일종의 핵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저게 놈의 약점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이사벨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 덩치를 전부 때려 부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알렉스는 거대 시체골렘의 약점일지도 모르는, 저 네크로맨서의 시신을 파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벽면 주행이 가능한 킹이 있으니, 놈의 몸을 타고 올라가 칼을 꽂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지체할 이유가 없기에, 알렉스는 그대로 자신이 떠올린 계획을 실행했다.
“부탁한다. 킹.”
푸히힝!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닌 탓에 조금 힘겨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킹은 알렉스를 태우고 거대 시체골렘의 몸을 뛰어올라가는 데에 성공했다.
축 늘어진 네크로맨서의 시신에 다가간 알렉스는, 악마의 손가락이 박혀 있는 놈의 심장부를 향해 빛나는 칼날을 전력으로 찔러 넣었다.
지직. 투두둑.
과연 예상한 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거대 시체골렘의 움직임이 굼떠지더니 몸체를 구성한 시체들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우. 이걸로 끝난 건가.”
“크, 흐흐으…….”
“엇!?”
다 해결이 되었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찰나에, 죽은 줄 알았던 네크로맨서가 눈을 뜨고 알렉스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린다.
“너히느으, 이미 느졌…… 이거르, 끄치라 새앵각…… 그르륵!”
“깜짝이야, 좀 곱게 뒈져라!”
알렉스는 네크로맨서의 가슴에 박아 넣은 성검을 그대로 힘을 주어 밀어붙여, 뭔가 재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의 목 위까지 갈라 버렸다.
머리가 반으로 조각난 네크로맨서는 더는 입을 놀리지 못했고, 곧 경험치를 남긴 채 주변에 뭉쳐 있는 시체들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고깃덩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