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9화
결투(4)
알렉스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질베로는 방어에 특화된 성법을 가진 팔라딘이었다.
다른 기사들보다 기골이 장대한 질베로가 탄탄하게 방어를 굳히고 있으니, 마치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매우 크고 단단한 사내였다.
‘탱커의 표상이라 할 만한 생김새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만 할까.’
물론 질베로만큼 덩치가 우람하진 않았지만, 단단하기로는 세계 최고를 논할 자신이 있는 알렉스가 기죽을 이유는 없었다.
거리를 좁힌 알렉스는 질베로를 향해 검격을 가했다.
카앙!
상대의 몸에 닿기 전에 방패가 공격을 막아낸다.
검을 휘두르고 나서 일부러 자세를 느슨하게 풀어 틈을 보여주자, 곧바로 상대의 반격이 들어왔다.
끼긱.
알렉스 역시 방패를 움직여 가볍게 공격을 흘려보냈다.
‘흠. 이 정도인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막고 때리기를 몇 차례 번갈아 하자, 상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혔다.
검술은 자신이 우세하고 방패술은 비등하다.
‘이거 시간 좀 걸리겠는데.’
비록 검술에서 앞선다고는 하지만, 원래 방패를 든 사람의 수비를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방어 계통의 성법을 가졌을 팔라딘을 쓰러뜨리려면,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할 게 당연했다.
‘뭐, 얼마 전까지라면 그랬겠지.’
“끄음…….”
알렉스는 씩 웃음을 지으며 어딘가 불편한 듯 신음을 흘리는 질베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방패만 때리며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것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리플렉트 실드]
‘이게 기사 상대로는 제법 꿀 스킬이란 말이야.’
알렉스는 지난 레벨 업에서 얻은 2개의 포인트를 각각 다른 스킬에 분배했었다.
[디바인 크로스 Lv 4]
[리플렉트 실드 Lv 3]
여러 명의 암흑교도들을 상대하는 전쟁에서 디바인 크로스의 효용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픈 것이고, 리플렉트 실드 역시 다수의 적을 상대로 효율이 나쁘지 않게 느껴져 조금 더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이 공격반사의 효과가 조금 더 연구해 보니, 갑옷 입은 적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초 습득 이후로 몬스터를 상대로나 실험을 해봐서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리플렉트 실드의 반사 데미지는 방어구를 무시하고 상대의 몸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방어구 관통 효과를 가지고 있을 줄은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 몬스터가 갑옷을 입고 있는 경우는 보기도 드무니까.’
타격을 입으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줄기가 공격대상을 향해 쏘아져나가, 갑옷을 파고들어 상대방의 피부를 찌른다.
질베로의 입장에선 황당한 노릇일 것이다.
공격을 허용하지도 않았는데 갑옷으로 보호받는 몸에 조금씩 상처가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상대인 솔리안은 치고받는 맛이 있어서 굳이 이 스킬까지 사용하진 않았지만, 질베로처럼 장기전이 필요한 상대라면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피해를 누적시킬 필요가 있었다.
‘상대도 성기사라서 크게 유효한 데미지는 없을 거란 게 아쉽네.’
사실 대상이 언데드 몬스터처럼 신성력에 추가적인 속성피해를 입는 녀석들이 아님에야, 이 빛줄기의 반사피해는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하진 않는다.
이미 큰 부상을 입은 곳에 정확히 파고든다면 또 모르지만.
특히 상대가 동일한 힘을 다루는 성기사이다보니, 신성력에 대한 내성으로 피해량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아마 갑옷을 파고든 빛줄기는, 긁힌 생채기 정도의 상처밖에 남기지 못할 터.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직접적인 타격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해도, 이로 인해 생기는 심리적인 이득은 결코 작지 않았다.
“크읏!? 무슨 이런 기괴한 성법이, 공격을 되돌리는 건가……?”
서로 공격을 교환하고 나면 이해할 수 없는 상처와 통증이 발생한다.
이런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는 모양인지, 질베로는 크게 위축되어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도 못하고 방패 뒤에 몸을 숨겼다.
결투가 조금 진행되자 처음의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지는 굳건함은 사라지고, 외부의 위협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몸을 움츠린 거북이 같은 초라함만이 남았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이게 또 공격을 안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거든.’
반격조차 포기하고 완전히 수비로 돌아선 질베로를 향해, 알렉스는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실드 차지]
쿵!
방패와 방패가 부딪친다.
꽤 큰 충돌음이 들렸지만, 질베로는 자세가 전혀 무너지지 않고 알렉스의 돌진을 받아냈다.
오히려 튕겨져 나온 것은 알렉스 쪽.
아마도 질베로는 알렉스의 굳건한 태세와 비슷한 종류의 성법을 운용중인 것으로 보였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뒷걸음질 친 알렉스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으윽? 어째서?”
반면 인상을 찌푸린 질베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분명 아무런 공격도 가하지 않았는데, 예의 그 빛줄기가 튀어나와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
‘게임이라면 나도 이런 방법을 못 쓰는데, 현실은 조금 다르더라고.’
돌진 스킬의 충돌 피해.
원래 게임에서는 목표 대상에게만 데미지가 가해지고 끝이었지만, 이곳에선 미묘하게 현실적인 판정으로 인해 부딪힌 알렉스에게도 소량의 데미지가 들어오게 된다.
생명력 같은 게 따로 표시되는 것은 아니니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대충 예시를 들자면 상대가 100의 피해를 입을 때 알렉스도 1이나 2의 피해 정도는 입는다는 소리.
사실 피해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의미 없는 수준이지만, 리플렉트 실드를 발동한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 소량의 데미지가 충돌 상대의 공격으로 판정이 되기 때문.
즉 알렉스가 돌진해서 몸을 부딪치면, 상대가 잘 막아냈다고 해도 반사피해를 입게 된다는 말이었다.
‘때리든지 막든지, 나는 상대에게 조금씩이지만 억지로 딜을 넣을 수 있는 거거든.’
쿵! 쿠웅!
알렉스는 실드 차지를 반복해서 사용해, 질베로에게 계속 몸을 부딪쳤다.
리플렉트 실드는 가해지는 피해량이 클수록 반사 데미지도 더 추가되는 방식이지만, 자신이 미미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상대에게도 무의미한 수준의 데미지만을 반사하는 것은 또 아니다.
빛줄기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공격력이란 게 있기에, 갑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질베로의 몸에는 점점 상처가 늘어갔다.
다만 그래 봐야 손톱으로 세게 할퀸 정도의 상처들이기에, 이 악물고 버티고자 한다면 질베로는 훨씬 오래 시간을 끌며 알렉스의 힘을 빼놓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란 건 육체와 달리 단련하기가 쉽지 않아, 작은 미혹 하나에도 쉬이 무너지기 마련.
이대로는 영문도 모르고 당하기만 한다는 생각에, 조급함을 품은 질베로는 수비를 풀고 공세로 전환했다.
‘저 이상한 성법에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유효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
물론 애초에 검술 실력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급하게 나선다고해서 당연히 알렉스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렉스는 달려드는 질베로를 천천히 요리하며 안정감 있는 전투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리플렉트 실드의 반사피해가, 알렉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흐읏!?”
“음?”
검격을 교환하던 질베로가 움찔 몸을 떨며 다리를 살짝 오므린다.
그 어정쩡한 자세만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맞추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 이것도 나름대로 치명타가 있긴 있었네……?’
리플렉트 실드로 발생한 빛줄기가,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 중 한 곳을 찌른 모양이었다.
남자의 중요한 그곳이라면 생채기를 남기는 정도의 타격이라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찔한 습격이었으리라.
알렉스는 애도를 표하며 검을 움직였다.
결투 중인 상대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동작이 멈췄는데, 가만히 두고 본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알렉스는 기회를 살려 질베로를 몰아붙였고, 예상보다 빠르게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십니까?”
“커윽…… 져, 졌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반사피해를 입히는 빛줄기는 무작위 위치에서 생성되는 것이고, 자신이 노리고 그런 잔인한 짓을 벌인 것도 아니니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조금 미안하긴 한데, 어쨌든 내 탓은 아닌 듯.’
어깨를 으쓱이며 스스로를 합리화한 알렉스는, 검을 늘어뜨리고 중부군 쪽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굳어 있던 중부군 지휘부가, 알렉스의 덤덤한 목소리에 안면근육에 경련을 일으킨다.
주변의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분명히 상대편은 고작 두 명만을 남기고, 거의 다 이긴 것처럼 보이던 대결이었다.
이렇게 마지막 출전자들끼리 싸우는 순간이 올 줄은, 중부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지막 상대는…… 뭐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겠군.’
알렉스는 이글거리는 시선을 보내는 중부군 기사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한 인물과 눈을 마주쳤다.
얼굴에 제법 주름이 보이는 중년의 남성.
외모를 봐서는 이미 은퇴할 시기의 노기사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나, 느껴지는 기세는 내로라하는 중부군 출전자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였다.
이내 상대는 꼿꼿한 걸음걸이로 알렉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위명이 자자하신 철사자 공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대가 하이로드로 불리는 후작위의 귀족이기에, 알렉스는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중부에 위치한 톨레디안 왕국의 대귀족.
데미언 파르마뉴 후작.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알렉스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교단의 팔라딘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긴 해도, 기사라면 대륙에 이름이 알려진 강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기에.
철사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파르마뉴 후작은, 중부 지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호라 알려진 사람이다.
세계 최강의 기사가 누구인가를 논할 때 반드시 한번쯤은 거론되는 인물.
지금은 나이가 거의 50에 달해 전성기 때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평가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대륙십강 정도는 들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 나오는 기사다.
단순히 고위 귀족이라는 작위를 떠나서도, 검을 든 사람으로서 존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검을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군.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파르마뉴 후작이 던져온 질문에, 알렉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따로 누군가에게 사사한 건 아니고, 그냥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혼자 익혔습니다.”
“허어?”
종자 생활을 할 때 초급 검술 정도를 배우긴 했지만, 현재 알렉스의 수준에 그 정도를 가지고 스승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예전에 섬기던 그 기사의 이름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몬스터를 잡으며 레벨 업해서 검술 스킬을 올렸으니, 아주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믿기 어려운 소리지만 자네 정도의 기사가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하진 않겠지. 허헛! 나도 천재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지만, 이제 보니 진짜 재능이란 건 따로 있었나 보군.”
“과찬이십니다. 운이 많이 따라주기도 했었지요.”
“제법 겸손하기도 하고. 허허…… 아무튼 좋네. 양쪽 세력의 명예가 달린 결투이니 잡담은 이쯤하지. 이제 검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 보세나.”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한 자루의 롱소드를 뽑아 양손에 쥔 파르마뉴 후작은, 검 끝으로 알렉스의 미간을 겨누며 눈빛에 감정을 지웠다.
알렉스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후우. 기세 한번 날카로운 거 보소. 역시 마지막이라 그런지 상대가 빡세긴 하네.’
파르마뉴 후작은 한 지역의 맹자로 명성을 떨친 기사.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게임 지식에 빗대어 보면, 그 정도 수준의 NPC는 레벨이 못해도 70대 이상이라 볼 수 있다.
알렉스 본인과 비교하자면 아마도 엇비슷한 레벨일 터.
중부군에 저런 인물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번 대결의 제안도 조금 더 진지하게 고려해 봤을 것이다.
‘저기도 우리 편처럼 다 떠먹여 줘야 하는 인간들만 있을 줄 알았지. 씁…… 생각하고 보니 좀 서럽네.’
어쨌거나 이제 와서 우는 소리를 할 수도 없다.
최선을 다해 상대를 꺾는 수밖에.
서로를 노려보며 정제된 살기를 뿜어내던 두 사람은, 이윽고 감각이 지시하는 최선의 경로를 따르며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