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08화 (108/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8화

결투(3)

마트론은 중부 지역 내에서 개최된 여러 마상창시합에 참가해, 수차례 챔피언 자리를 차지한 전적이 있는 관록 있는 기사였다.

물론 그가 본인이 참가한 모든 경기에서 우승자가 되었던 건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과 명성을 지닌 기사라 해도, 언제나 승리만을 거머쥘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되는 기사가 ‘저런’ 형태로 패배하게 될 거라 예상한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바, 방금 내가 제대로 본 거요? 저쪽의 말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나한테 묻지 마시오. 나도 내 눈을 의심하고 있으니.”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상대방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던 알렉스는, 서로의 랜스가 닿을락 말락 한 격돌의 순간 폭발적인 가속을 통해 마트론에게 접근했다.

익숙하지 않은 랜스를 사용하진 않았다.

대신 완벽하게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킹이 직접 알렉스의 무기가 되어, 마트론의 몸통에 머리를 휘둘러 들이받았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알렉스의 랜스만을 주시하고 있던 마트론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설마 마상창시합에서 창이 아닌 말에게 공격을 당할 것이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을 테니, 허망하게 당했다고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침묵이 내려앉은 중부군의 사이로, 열 번째 기사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시작 위치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알렉스는, 규칙에 따라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신호를 받고 움직였다.

결과는 앞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뻑!

푸히힝-!

말의 형상을 했을 뿐이지 더 이상 말이라 부르기 어려운 생물이 된 킹은,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비틀어 알렉스를 찔러오는 창을 빗나가게 만들고 또 한 번 상대 기사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바닥을 구르는 기사를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비웃음 같은 울음소리를 흘리는 건 덤이다.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이, 알렉스는 그냥 가만히 킹의 등 위에 타 있기만 하면 되었다.

“자, 잠깐!? 심판! 결투를 저런 식으로 진행해도 되는 건가!”

“그…… 황당하지만, 딱히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저게 어딜 봐서 자우스트야!”

“랜스 외에 다른 무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니 반칙은 아닙니다. 말이 너무 가까이 붙어 충돌로 인해 기사가 낙마하는 경우야, 기존에도 간혹 발생하는 일이었고…….”

“저건 그냥 대놓고 말이 부딪혀 오고 있잖나!”

“하지만 딱히 그런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알렉스는 열한 번째 기사와의 결투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직접 부딪힐 생각이 없는 것처럼, 킹은 상대방과 꽤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알렉스와 상대 기사가 랜스 끝으로 서로를 찔렀지만, 간신히 방패에 살짝 닿을 정도의 거리라 누군가 낙마할 정도의 충격이 발생되진 않았다.

그렇게 서로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킹이 급격히 방향을 틀어 상대방을 향해 폴짝 뛰어오르더니, 우아한 뒷발차기로 기사의 등을 가격해 말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저, 저게 뭐야! 저런 게 어떻게 되냐고!”

“세상에, 무슨 저런 말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중부군의 사람들이 거품을 물고 발작하는 가운데, 남부군은 알렉스의 연이은 승리에 열광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알렉스! 알렉스으읏-!”

“와아아악-!”

“마! 저게 신수다! 너넨 저런 거 없드나!”

“알렉스! 신수를 타고 전장을 지배하는 성스러운 기사!”

“남부의 자랑!”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알렉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무슨 남부의 자랑까지야. 사실 엄밀히 따지면 남부군은 임시소속인데. 뭐 전쟁 내내 이 소속으로 쭉 갈 것 같긴 하지만.’

본래의 소속대로라면 서부군에 속해 있었어야 하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우스우니, 남부군을 대표하는 자랑거리가 되어주지 못할 건 없긴 하다.

어쨌거나 대결은 계속되었다.

앞선 세 번의 결투로 위에 탄 기수가 아니라 말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대측 기사는, 아예 대놓고 알렉스가 아닌 킹을 노리고 랜스를 찔러왔다.

자우스트에서는 규칙 위반에 해당하는 행동이지만 설령 반칙패로 패배를 당하더라도, 아군의 승리를 위해서는 저 말 같지도 않은 짐승을 빨리 치워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열두 번째 기사가 찌른 창이, 킹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목을 꽈배기 꼬듯 뒤틀어 찌르기를 흘려보낸 킹은, 입을 쩍 벌려 랜스를 깨물고는 그대로 사납게 머리를 휘저었다.

차라리 바로 무기를 손에서 놨으면 괜찮았을 텐데.

기사는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어 버티려다가 말 위에서 떨어져, 앞의 출전자들처럼 땅바닥에 몸을 처박아야 했다.

“이제 셋.”

알렉스는 본인이 뭘 시도할 필요도 없이 벌써 4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상대측이 마상전투의 형식으로 싸움을 걸어온 이상, 모든 건 킹의 선에서 정리가 될 것으로 보였다.

“이건 공평하지 못하오!”

“맞소! 세상에 이런 식의 결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이 순식간에 연패를 당한 중부군 쪽의 지휘부는, 이제 남은 출전자가 셋뿐이라는 상황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가는 사태를 보아하니 이대로는 남은 세 명도 패배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되었소! 물론 지금까지의 결과는 우리도 인정하겠으나, 이후부터는 자우스트를 종료하고 차라리 기존의 방식으로 다시 대결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뭐요? 이 작자들이 무슨 헛소리를!”

“기껏 그쪽의 제안대로 맞춰주었더니, 이제 와서 다시 원래의 방식대로 하자는 소리인가?”

“기사들의 명예로운 대결이 무슨 어린애들 장난인 줄 아는 게요!?”

당연히 남부군 지휘부는 거세게 반발하며 항의했다.

논쟁이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아, 잠시 대결은 중지되었다.

대결 방식을 다시 또 바꾸자는 중부군 측의 제의는 명예롭다고 보기 어려운 행동이었으나, 솔직히 킹의 활약이 너무 사기적이긴 하다 보니 반칙성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

기마전은 말을 타고 하는 것이 원칙인데, 과연 킹을 말이라는 종의 범주 안에 둘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신수를 평범한 말로 취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주인이 팔라딘이고 조금 특별한 녀석이다 보니 신수라는 호칭으로 불리긴 해도, 사실 아직 교단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간에 특별한 짐승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쉬이 합의가 되질 않았다.

결국 알렉스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양측 지휘부의 판에 끼어들어, 그냥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 그러면 중부군의 제의대로 대결을 기존 방식에 맞춰 진행하도록 합시다.”

“아니, 알렉스 경!?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쪽의 말대로 제 애마가 다른 녀석들보다 좀 과하게 뛰어나긴 했지요.”

논란 중에 킹이 아닌 다른 평범한 말로 갈아타 출전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아무래도 그편이 가장 합리적인 의견처럼 보였지만, 알렉스의 입장에선 킹을 타지 못 할거면 차라리 자우스트를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라이딩 스킬이 있으니 다른 말을 타도 능력을 최대로 이끌어낼 순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킹이 아니라면 필승을 자신하긴 어렵다.

애초에 정상적인 마상창술로 저쪽의 가려 뽑은 기사들과 승부를 나누기엔, 숙련도가 너무 부족하기도 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기존의 방식대로 검투를 벌이는 편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처음부터 원래 그럴 생각이었기도 하고 말이지. 킹 덕분에 승리를 4번이나 손쉽게 챙겼으니, 나머지 3명은 온전한 내 실력으로 제압하는 편이 다른 뒷말이 나오지 않을 테고.’

남부군의 유일하게 남은 출전자인 알렉스가 동의하였기에, 대결은 다시 기존의 방식대로 되돌려졌다.

“우우! 치졸하다!”

“사내답지 못하게 뭐하는 짓이냐!”

“크윽…….”

남부군 측 병사들의 조롱에, 중부군의 기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이를 갈았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지휘부의 행동이 조금 낯 뜨겁게 느껴지긴 했을 것이다.

킹을 아군 진영으로 돌려보낸 알렉스는, 무장을 교체하고 결투 자리에 섰다.

이어서 중부군의 열세 번째 기사가 걸어 나와 알렉스를 마주했다.

“팔라딘 알렉스. 소문으로만 듣다가 이제야 만나보게 되는군.”

“음?”

자신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에, 알렉스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보는 낯짝인데? 남부군에서 이룬 공적이 꽤 크긴 하지만, 그게 벌써부터 다른 연합군까지 알려졌을 리도 없고.’

분명 안면이 없는 상대다.

다만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알렉스와 그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벨루아 교구의 성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솔리안이오. 순례행을 핑계로 교황청을 호출을 거부하고 떠도는 알렉스 경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

“아, 중앙 관구의 형제님이셨군요.”

알렉스와 이사벨이 특이한 경우라서 그렇지, 이교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교단의 인물들은 이런 행사에 거의 나서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부군에서 팔라딘이 아예 한 명도 출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담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좋은 시합이 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리겠소.”

“흐음. 예, 그럼 뭐…… 정정당당히 승부에 임합시다.”

지잉.

알렉스는 알페리온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다.

결투가 시작되었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성검의 자태를 보며 솔리안이 잠시 눈을 빛냈지만, 그는 더 이상 잡담을 떠들지 않고 알렉스의 주변을 맴돌다가 기습적으로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부아앙!

거대한 대형 메이스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팔라딘들은 원래도 대부분 중병기를 다루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솔리안의 무기는 그런 성향을 감안해도 무식해 보일 정도로 길고 육중한 크기였다.

일반인이라면 제대로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

그렇지만 비효율적으로 보일 정도의 대형 메이스를 다루는 솔리안의 동작은, 전혀 굼뜨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콰앙.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낸 알렉스가, 팔뚝으로 전해져 오는 저릿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법 강한데? 상당한 힘이야. 이사벨과 비슷한 과인가?’

상대는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성법, 특히 이사벨처럼 근력을 강화하는 성법을 다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육체에 깃들어 은은하게 빛나는 신성력이 그것을 증명했다.

“힘이 대단하시군. 이사벨과 겨루었다면 볼 만했을 텐데.”

“아까 그 팔라딘 말인가? 본인 역시 상대를 해보고 싶었는데, 하필 순번을 뒤로 정해두어서 마주치지 못한 게 안타깝소.”

알렉스에 말에 솔리안을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착실히 흉악한 생김새의 메이스로, 알렉스의 방패를 쉬지 않고 두들기고 있는 중이었다.

‘제법 괜찮은 실력자이긴 하네. 그래도 내 상대는 아니지.’

솔리안의 공격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단장이라는 위계도 그렇고 이렇게 대결에 참가한 것을 보면, 아마도 중부군에 속한 팔라딘 중에서는 손꼽히는 실력자일 터.

다만 이사벨과 비슷한 과라고 해서, 공격의 위력이 그녀와 동등한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한 방, 한 방의 위력을 떠나서 메이스를 다루는 실력 자체는, 솔리안이 이사벨보다 위로 쳐줄 만큼 노련하긴 했다.

그러나 9레벨의 소드 마스터리를 지닌 알렉스의 눈엔 파고들만한 허점이 몇 군데가 드러나 보였다.

숙달된 방패술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낸 알렉스가, 공세로 전환하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막다가 흘리고 찌른다.

간단한 방식이지만 위력은 충분했다.

타이밍에 맞춰 빈틈을 제대로 노릴 수만 있다면 괜히 현란한 기교를 부릴 필요 없이, 오히려 단순한 공격이 힘을 온전히 담을 수 있기에 더 효과적이다.

“으럇-!”

“크읏!”

탄탄한 수비를 기반으로 버티다가 빈틈이 보일 때마다 가해지는 알렉스의 날카로운 검격에, 결국 솔리안은 오래 가지 않아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알렉스가 집요하게 끈과 버클로 연결된 부위를 노려 검을 휘두른 끝에, 관절부 안쪽의 매듭이 전부 잘려나가 팔을 보호하는 뱀브레이스가 거의 떨어져 갈 지경이 된 탓이다.

“후우, 실력 차이가 명백하군. 내가 졌소. 아직 전성기에 다다랐다고 할 만한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검술 솜씨가 이렇게나 대단하다니. 1살 때부터 검술을 수련했다고 쳐도 믿기 어려울 정도군.”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같은 교단의 사람이다 보니, 살벌한 전투를 끝내고도 험악한 말이 오가진 않았다.

중부군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만 떠들고 빨리 다음 결투를 진행하시오!”

“쯧. 알렉스 경, 나중에 또 만남의 시간을 가집시다.”

“네. 좋은 승부였습니다.”

솔리안이 물러나자 즉시 열네 번째의 출전자가 앞으로 나섰다.

“랑제리움 교구의 성기사단장, 질베로 마르티온.”

“글라즈번 교구의 팔라딘, 알렉스입니다.”

이번에 나선 상대 역시 중앙 관구의 팔라딘이었다.

딱딱한 어투로 이름을 밝힌 상대와 마주하며, 알렉스는 검을 들어 예를 표했다.

곧바로 결투가 개시되었다.

‘……설마 이번엔 나랑 비슷한 스타일의 팔라딘인가?’

알렉스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과 방패.

이번 상대인 질베로는 팔라딘들 중에선 꽤 보기 드문, 자신과 동일한 무장을 갖춘 기사였다.

거의 동일한 자세로 탐색하듯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자니,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