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7화
결투(2)
“이야아압-!”
콰지직.
여덟 번째 순번의 기사를 상대하며, 이사벨은 승리를 얻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힘을 거의 한계까지 끌어 올려야 했다.
근력의 격차가 승리를 담보하진 않는다지만, 디바인 익시드로 급격하게 증가한 힘은 공격의 속도 또한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전투력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일곱 번째 기사는 굉장히 노련하고 세련된 전투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으나, 오우거조차 능가하는 터무니없는 힘으로 휘둘러지는 이사벨의 공격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끄억!”
“이, 이런! 사제님들!”
“어서 이쪽으로!”
대결은 잠시 중단되었다.
무기를 부수고 갑옷까지 찢고 들어간 이사벨의 공격에, 상대방은 치명상에 가까운 중태에 빠져 실려 나가야 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모여 간신히 명줄을 붙잡아두었지만, 이사벨의 상대가 한동안 침상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에 처한 것은 확실했다.
“자칫하면 같은 아군을 죽일 뻔했지 않소!”
“너무 손속이 과한 것이 아닌가!”
“……미안합니다. 고의적으로 심한 부상을 입히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사벨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것도 마지막 순간에 힘을 빼고 때린 것이니, 미안해할 필요까지 할 필요는 없긴 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했다면, 사람 한 명쯤이야 갑옷째로 반 토막을 낼 수도 있었으니.
익시드 상태에서 이만큼 힘 조절을 한 것도 솔직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다만 그런 상황을 남이 알아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냥 좋게 사과를 하고 끝내려 했다.
“크흠! 결투 중에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한 사고일 뿐이오. 대전자가 생명을 잃은 것도 아니니 그만 넘어갑시다.”
남부군의 사람들이 이사벨을 두둔하고 나서자, 중부군 측의 항의는 곧 잠잠해졌다.
그 말대로 이런 결투에서 부상을 입는 일이야 비일비재한 것이고, 어쨌든 죽지는 않았으니 더 강하게 몰아붙이기도 애매했다.
“쯧!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라오.”
대결은 다시 속행되었다.
다만 중부군 측에서, 대결 방식을 바꾸자는 제안을 내밀었다.
“이대로는 다시 또 사고가 날 수도 있겠소.”
“조금 환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남은 결투는 자우스트(마상창시합)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어떻겠나?”
중부군 지휘부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 낸 작전.
‘인간 같지 않은 괴력이다. 결투 규칙을 보편적으로 쓰이는 다승제 방식에서 바꾼 이유가 저거였군.’
‘저런 능력이 가졌으니 혼자서 여러 명을 감당할 자신도 있었겠지.’
남부군이 이런 도박 같은 대결을 제의한 이유를 이제는 알았다.
분명 마지막 순번으로 남겨둔 저 두 명의 팔라딘을 믿고 일을 꾸민 것이리라.
‘특히 저 알렉스라는 젊은 팔라딘. 명백히 남부군 수뇌부를 휘어잡고 있는 인상이었지. 여기사도 대단하지만 필시 저자는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일 터.’
‘우리의 기사들을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확실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겠군.’
이사벨의 연이은 승리에 불안감을 느꼈기에, 중부군은 도보전을 그만두고 마상전을 치르자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마주한 상대방을 랜스로 겨누고 돌격하는 일기토 형식의 자우스트는, 지역마다 채점 방식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기본적으론 창으로 상대를 찔러 낙마시키는 자가 승리하는 대결이다.
중부군이 대결 방식을 자우스트로 바꾸고자 한 것은, 이런 마상전투가 힘보다는 기술적인 부분에 큰 영향을 받는 싸움이기 때문.
이사벨의 괴력을 목격했고 이후에 나올 알렉스가 어떤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모르니, 이렇게 꿍꿍이를 들어내 보인 것이었다.
‘말 위에 올라 직접 땅을 밟지 못한 상태로는,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다.’
‘둘 다 젊다 못해 어린 기사들이니, 경험이 부족한 만큼 기술적인 부분은 당연히 부족할 테지.’
물론 남부군 지휘부 측에선 극구 반대하는 의견을 내었다.
극적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잘 싸우고 있는 마당에, 저쪽에서 원하는 형식으로 바꿔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슨 소리를! 이제 와서 규칙을 바꾼다는 게 말이나 되오?”
“안 될 이유는 또 뭔가? 이건 직접 결투에 임하는 기사들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지. 거기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언제나 알렉스의 행동을 따르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이사벨은, 슬쩍 그를 돌아보며 의견을 구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렇게 합시다.”
“것 보시오! 당연히…… 아니, 알렉스 경!?”
“괜찮습니다. 잊으셨습니까?”
알렉스가 가벼운 손짓으로 뒤를 가리키자, 지휘부 인사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는 바닥에 옆으로 누워 건초를 씹고 있는 킹이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 기사들의 결투를 구경하는 표정이 말이 아니라 사람 같아서, 계속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진다.
“아…… 으음, 알렉스 경을 믿겠습니다.”
알렉스가 킹을 타고 그간의 전투에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납득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남은 출전자인 알렉스와 이사벨이 동의했기에, 대결은 자우스트로 변경되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잘 알겠는데, 나야 기마전으로 바꿔준다면 고맙지.’
알렉스는 도보전으로 싸우는 것도 자신이 있었지만, 말에 오른 상태라면 더욱이나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말이라면 모를까, 킹을 타고서 마상전투에서 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윽고 이사벨에게 다가간 알렉스는 그녀에게 휴식을 권유했다.
“이사벨 경. 이제 교체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충분히 잘 싸워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쪽의 기사들은 이제야 절반을 넘겼을 뿐이니, 제가 조금 더 상대해 보겠습니다.”
15명 중에 홀로 5승을 기록했으면 할 만큼 해줬다고 생각했으나, 이사벨은 계속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알렉스는 그것이 승리에 대한 욕심뿐 아니라, 마지막에 남은 자신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으음. 하지만…… 아니, 알겠습니다. 경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기특하긴 해도, 슬슬 지쳐가는 이사벨과 교대를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미 뜻을 밝힌 이사벨을 계속 붙잡는 것은 그녀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기에, 알렉스는 이사벨을 더 말리지 않고 보내주었다.
“믿고 지켜봐 주시길.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언제나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읏…….”
알렉스의 대답에 약간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이며, 이사벨은 그녀의 말 로자리아에 올라섰다.
저쪽에서 노린 것처럼, 마상창으로는 이사벨의 힘도 큰 효용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아직 싸울 여력이 남아 있기는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사벨은 투지를 보이며 앞으로 나섰다.
중부군 측에서도 아홉 번째 순번의 기사가 말을 몰아 정해진 위치에 섰다.
랜스를 수평으로 세우고 거울처럼 마주 보고 선 두 기사가, 심판원의 신호를 받고 돌진을 시작했다.
최초의 격돌.
인사에 가까운 가벼운 움직임으로 서로를 스치며 지나갔기에, 양쪽 다 별다른 피해를 입진 않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격돌.
탐색의 의미가 짙은 첫 수의 교환이 끝났기에, 한층 매서워진 기세로 두 사람은 랜스를 움직여 서로의 몸통을 찔렀다.
“와아아!”
“마트론 경의 승리다!”
“아…….”
결투를 지켜보던 알렉스가 안타까움에 탄식을 흘렸다.
잠시 휘청거리다 자세를 바로잡은 상대방과 달리, 이사벨은 제대로 된 일격을 허용하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성유물인 이사벨의 갑옷은 성능이 아주 탁월했기에 심한 중태에 빠지진 않았으나, 랜스 차지에 찔러 낙마했으니 부상이 아주 가벼울 리는 없었다.
사제들이 움직여 이사벨을 향해 치료의 성법을 퍼부었다.
알렉스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사벨 경. 괜찮으십니까?”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참고 있던 이사벨이, 고개를 휙 돌리며 웅얼거렸다.
“……면목 없군요. 창피해서 숨고 싶습니다. 랜스가 아닌 원래 쓰던 무기였다면…… 후으, 이것도 쓸데없는 변명이군요.”
“하하…… 아까운 승부였습니다.”
중상을 면했고 사제들의 치료까지 있었기에, 다행히 이사벨의 상태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이사벨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알렉스는 마저 입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쉬면서 지켜봐 주십시오.”
“후우, 네. 복수를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남은 일곱 번의 결투에서 모조리 승리하고, 그 명예를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패배한 기사에겐 과분한 영광이군요.”
“뭔가 문제라도? 원래 마상시합에 나서는 기사들은 자신의 레이디에게 명예를 바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레, 레이디…… 으읏! 농이 짓궂으십니다!”
“음. 화났습니까?”
“으…….”
목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씩씩거리던 이사벨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선을 넘었나?’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농담이긴 했다.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리던 알렉스는, 나중에 다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킹의 등에 올라탔다.
심판원이 마지막 출전자인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기에, 빨리 채비를 갖추고 나가야 했다.
“준비는 끝났소?”
“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푸르륵.
보급용으로 지원되는 랜스를 받아든 알렉스는, 킹과 함께 자신의 위치에 섰다.
별로 다뤄본 적은 없는 무기를 쥐고 있자니 조금 어색하긴 했으나,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라면 랜스를 들지 않고 결투에 임해도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심판원의 신호가 내려지며, 알렉스와 상대방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중부군의 기사 마트론은, 자신과 마주한 젊은 기사의 자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뭔가 있는 놈인가 싶었더니 착각이었나? 어설픈 태가 확 느껴지는군.’
본인도 기마술이라면 일가견이 있었기에, 기승하는 동작만으로도 상대방이 말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탓에 방금 전까지 살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어째 기마 실력에 비해서 랜스를 다루는 모양새가 굉장히 미숙해 보였다.
‘기마술은 능숙하지만 마상창을 수련한 경험 자체는 별로 없는 게 확실하다. 오래 끌 것도 없이 단숨에 승부를 내면 되겠어.’
마트론은 중앙 지역에서 열리는 가장 큰 마상창시합에서도, 일곱 차례나 우승을 거머쥔 전적이 있는 마상전투의 달인이었다.
알렉스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한 그는, 본인의 승리를 확신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지면에 부딪혀 기절하는 그 순간까지도, 마트론은 자신이 어째서 낙마하게 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전 상대를 쓰러뜨리고 지나친 알렉스는, 속도를 줄이며 랜스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멈춰 섰다.
결투를 지켜보던 중부군 측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벌린 채, 대체 자신이 뭘 본 건지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을 둘러싼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들을 감상하며,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고 짧은 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여섯.”
솔직히 킹과 함께하는 자신은 거의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명이 아니라 60명이 남아 있어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며, 알렉스는 다음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