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6화
결투
가장 빠르게 성전에서 공적을 세우고자 출정을 서두른 남부군과 달리, 중부 연합군은 착실히 군사를 소집해 병력규모를 최대한으로 키운 후에야 성전에 참여했다.
그렇게 모은 병사들의 수가 1만을 가뿐히 넘어 거의 2만에 가까울 정도.
현재 남부군의 병력은 지난 전투 이후로 4천 명에 못 미칠 만큼 줄어들었으니, 그에 비하면 중부군은 병력 수가 네다섯 배에 달하는 대군이라 할 수 있었다.
규모가 그렇게 차이가 나니 연합군끼리 분란이 생겼다고 해도, 남부군 지휘부 측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기가 쉽지 않았다.
저쪽에서 염치없이 자신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들이대미는 것은 화가 나지만,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는 남부군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주도권을 중부군에게 양보하더라도, 힘을 합쳐 전쟁을 속행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지휘부의 인사들은 자존심 때문에 일단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남부군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아진 알렉스가 나서기 전까진 다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알렉스 경. 정말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음? 무슨 문제라도?”
“자칫하다간 괜히 저희 측의 피만 흘리고,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논쟁이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기가 걸린 대결은 성립되었다.
각 진영에서 열다섯 명씩 사람을 뽑아 순차적으로 결투를 벌이고, 동부 정벌이 진행되는 내내 패자 측이 승자 측의 지휘에 따라 적극 협조하기로 이야기가 정해진 것이다.
다만 남부군이 승리할 시엔 앞으로의 전쟁에서 얻게 될 전공들을 중부군과 공정하게 나누기로 한 반면.
중부군이 승리할 경우 남부군은 모든 공로를 중부군에 넘기고,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불공평한 조건이지만 중부군은 굳이 대결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유리한 상황이니, 저쪽을 판에 끌어들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대결에서 패배하게 되면 남부군 측은 큰 손해를 입게 되는 조건이기에, 그간 아무리 뛰어난 공적을 세운 알렉스라 해도 단번에 지지기반을 잃게 되는 입장이다.
물론 알렉스의 머릿속엔 남부군이 대결에서 진다는 상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열다섯 명이라. 서로 기사가 많다 보니 출전자가 제법 많은 편이네. 아무튼, 내가 선수로 나서는 이상 패배란 있을 수 없지.’
이를 위해 결투 방식도 다승제가 아닌,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연전을 거듭하는 승자 진출 방식을 채택하도록 밀어붙여 두었다.
“지는 경우의 조건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기면 그만이니까요.”
“물론 저희들도 남부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 용맹을 떨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 않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결투는 반드시 우리 쪽이 승리할 테니.”
“……후우.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대결을 취소한다고 해봐야 웃음거리만 될 테니, 우리 측 기사들의 승전을 기원하는 수밖에 없군요.”
그간 알렉스가 보인 능력이 워낙 대단한 것들이었기에, 지휘부의 사람들은 불공평한 조건이 달렸음에도 대결의 성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필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닌 중부 연합군이기 때문.
중부 지역은 위치 구조상 대륙의 물류 중심지가 되기도 하고, 유일종교인 예루스 교단의 총본산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기반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경제력이나 기술, 문화에서 앞서나가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니, 큰 인물이 되려면 중앙 물을 먹어야 한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퍼질 정도가 되었다.
그런 관념은 자연스레 각지의 인재들을 끌어모아 중부의 발달을 더욱 가속화했고,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칠 만큼 실력 있는 기사 역시 당연하게도 중부 지역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곤 했다.
“분명 중부의 이름 높은 기사들이 잔뜩 몰려들어 있을 텐데…….”
“듣자 하니 그 유명한 철사자 공도 중부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같았소.”
“파르마뉴 후작 말이오? 허어! 아무리 신성한 대의를 지닌 전쟁이라 하지만, 그만한 고위 귀족이 직접 전장에 뛰어들다니. 이제는 나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노쇠한 맹수나 다름없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륙 최강의 기사를 거론할 때마다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던 검호이지 않소. 이런 커다란 무대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테지.”
“우리 남부군에는 그 정도로 유명한 기사가 있지도 않은데…… 이거 정말 이대로 결투를 진행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구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며 소란이 일긴 했으나, 이미 정해진 대결을 무를 수는 없었다.
양 진영에서는 열다섯 명의 출전자를 뽑아 결투에 투입하기로 했고, 알렉스는 물론이고 이사벨 또한 그 십오 인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저 인간의 탈을 쓴 추악한 짐승, 이교도들을 격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명예로운 전사들이오. 비록 약간의 분쟁으로 인해 합의점을 만들고자 결투를 벌이게 되었으나, 가급적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없도록 엄중한 주의를 부탁드리오.”
예의와 격식을 따져가며 별 의미는 없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은 후.
양측은 순서를 정하고 출전자들을 내보내 결투에 임했다.
알렉스의 차례는 15번째로 가장 마지막이었다.
“내가 선봉에 서겠소!”
“아니, 처음 순서는 이 몸이 나서야 마땅하오.”
순번 따위는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다들 먼저 나서겠다고 우겨대기에, 그냥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고 자진에서 마지막을 맡기로 한 것이다.
알렉스가 그렇게 나오니 이사벨 역시 순번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그 앞의 차례인 14번째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동안 우리 기사들이 알렉스 경에게 많은 의지를 했으나, 이번만큼은 힘쓰실 필요가 없을 것이오.”
“흐하하! 내가 못해도 다섯 놈 정도는 상대하도록 하지! 알렉스 경까진 순서가 가지도 않을 테니, 뒤에서 편히 쉬면서 관람하도록 하시구려!”
“……음. 경들의 승리를 빌겠습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부군 출전자들을 응원해 주었다.
본인이 나서면 필승일 거라 자신하긴 했지만, 앞에서 아군들이 이겨준다면 굳이 차례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톨레조 가문의 수석기사 빌른 하이만이다! 자, 내 상대는 누구냐!”
자신만만하게 선봉을 차지하고 나선 남부군의 출전자 빌른 하이만은, 고작 여덟 합 만에 첫 결투를 끝내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꼴사납게 패배하고 실려 왔다는 의미다.
두 번째, 세 번째 선수들이 잇따라 나섰고,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열네 번째 대전자, 팔라딘 이사벨! 앞으로 나오시오!”
어느새 14번 순서인 이사벨의 차례가 도달했다.
아군의 기사 13명이 패배하는 동안 중부군 측은 겨우 3명이 물러나고, 지금은 네 번째 순번의 기사가 나서있는 상황이었다.
‘뭐지? 우리 편의 실력이 이것뿐이 안 되는 거야? 진짜 가슴이 웅장해지네.’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나 처참한 성적이었기에,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군 기사들의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이 기사란 이름에 부족한 싸움을 보인 건 아니었다.
그저 중부군 기사들과의 실력 차이가 심하게 났을 뿐.
설마 순번이 여기까지 올 동안 상대 전력의 반의반도 쓰러뜨리지 못할 줄은, 알렉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도 뭐 상관은 없지. 애초에 내가 다 커버하겠다는 마음으로 대결을 제안한 거니까. 이사벨이라면 분명 몇 승은 더 챙겨줄 수 있을 테고.’
알렉스는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심판원의 호명을 듣고 걸어 나가는 이사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사벨과 자신의 실력을 믿기에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알렉스와 달리, 남부군 진영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출전자가 나설 때마다 격렬하게 응원하던 소리는 패배가 거듭될수록 줄어들었고, 이사벨이 나서는 지금에 와서는 다들 불안한 눈빛을 보내며 ‘망했구나.’ 혹은 ‘제발!’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흐음. 팔라딘이라.”
이사벨의 상대는 못마땅해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교단의 성기사라는 소개가 있었기에 대놓고 모욕적인 말을 안 할 뿐이지, 겉보기엔 가녀린 소녀에 불과한 이사벨과 결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신의 권능이 참으로 대단하시긴 하군. 보통 그대 또래의 여성이라면 갑옷을 입고 걷는 것조차 쉽지 않을 터인데.”
“……어째 조금 불경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허헛! 그럴 리가 있겠소? 아무튼, 잘 부탁드리지.”
살짝 비꼬는 투로 말을 내뱉었던 기사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검을 올려 예를 취했고, 이사벨 역시 입으로 싸우고자 나선 것이 아니기에 더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애병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중부군 기사의 선공으로 결투가 시작되었다.
‘팔라딘들이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어린 계집애 따위가 내 상대가 될 순 없지.’
그는 스스로의 검술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앞의 대전자들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여기사에게 쉽게 패배를 안겨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카앙!
그리고 그런 자신감은 본인의 검과 함께, 단 한 번의 격돌로 산산이 깨져나가게 되었다.
“크윽!? 이게 무슨…….”
“항복하시겠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박살 난 무기를 내려다보던 기사는, 자신을 향해 창날을 겨누고 있는 이사벨의 음성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 내가 졌소.”
“좋은 승부였습니다.”
기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뭘 해보기도 전에 무기를 잃고 졌는데, 좋은 승부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어서 다섯 번째 순번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제법 신중한 태도로 이사벨과의 결투에 임했으나, 앞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의 기사가 나설 때까지도.
이사벨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기세로 연전연승을 이어갔다.
덕분에 남부군의 분위기가 되살아나며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역시 이사벨은 잘해주는군. 음…… 그래도 슬슬 힘이 빠지는 게 눈에 보이네.’
네 번의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이사벨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사벨의 괴력을 알아본 상대측이, 최대한 무기를 맞부딪치지 않도록 피해가며 결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인간 중에선 대적할 상대를 찾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근력을 가진 이사벨이지만,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상대로는 그런 힘의 차이가 절대적인 우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소드 마스터리 스킬의 효과로 노련한 검객들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는 검술을 지닌 알렉스와 달리, 이사벨은 나이가 어린 만큼 아직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투박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다섯 번째 대전자 이후로 중부군 기사들은 다들 시간을 들여 이사벨의 힘을 빼는 데 주력했고, 일곱 번째 기사와의 싸움에서 그녀는 기회를 잡기 위해 잠깐이나마 디바인 익시드를 사용해야 했다.
“후우…….”
끈질기게 버티던 적을 쓰러뜨린 이사벨이,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내쉬며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슬슬 내가 나서야 하겠군.’
여덟 번째 출전자와 싸우는 이사벨의 움직임이 처음과 달리 둔해져 있었기에, 알렉스는 슬슬 이사벨과 교체해 나설 준비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