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5화
하이번데르크 점령전(5)
[전장의 찬가 Lv 1]
알렉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도문을 외우는 듯한 엄숙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
신을 찬양하는 의미의 문장을 읊조리는 그 음성이, 주변의 소음을 밀어내며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알렉스가 알고 있는 전장의 찬가는, 아군에게 능력치 상승과 일부 상태이상의 내성을 부여하는 광범위 버프 스킬이다.
이런 설명만 봤을 때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성기사들에게 외면받는 스킬 중의 하나였다.
능력치의 상승폭이 굉장히 미미한 데다가, 내성의 종류도 정신계 상태이상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
사실 정신계 상태이상은 대부분 캐릭터의 사망으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적인 옵션을 가지고 있기에, 내성을 높여주는 것이 굉장히 유용한 효과처럼 느껴질 수 있다.
문제는 게임에선 그런 상태이상을 거는 패턴을 가진 몬스터가 특정한 던전에서만 출몰한다는 점과, 스킬이 아닌 장비 아이템을 통해서도 상태이상의 저항력을 높일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 장비로 xxx 던전 사냥 가능한가요?
-아뇨. 거기 던전 가려면 xx세트 끼시고, 액세서리도 현혹하고 공포 내성 붙은 걸로 바꾸셔야죠. 안 그러면 파티 들어가도 강퇴당할 텐데.
대부분의 파티사냥이 캐릭터가 착용한 장비의 스펙을 따져가며 파티원을 모집하기에, 탱커 포지션으로 들어온 성기사가 파티원을 위해 이런 버프를 걸어줘야 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어차피 필요한 스펙을 맞추지 못한 사람은 파티에 끼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활용도가 아예 없는 스킬은 아니긴 해도, 애초에 버프계열의 스킬은 사제 쪽이 전문인데 굳이 성기사가 나설 이유가 없었지.’
분명 게임에서는 그랬었다.
하지만 현실의 이곳은 그런 플레이어들의 세상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아군들이 몰살당하길 원치 않는다면, 배울 예정이 없었던 이런 스킬이라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효과가 잘 먹혀야 할 텐데.’
알렉스는 자신의 음성에 맞춰 신성력이 넓게 퍼지는 것을 감지하며, 아군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전장의 찬가 스킬의 능력치 상승효과는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정신계 상태이상 내성효과는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알렉스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고,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아군들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나, 나으으 입수르으을, 열으어 찬…… 찬미하사-”
“드높으신, 자, 자비로, 우리에게 임하시어-”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루스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하노니, 사특하고 간교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말지어다!”
연합군의 중심부에 모여 있던 사제와 성기사들이, 알렉스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하나둘 깨어나며 찬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교단의 전력이 회복된 것만으로도 상황을 반전시키기엔 충분했다.
성기사들이 악마의 파편을 향해 노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사제들은 축복과 치유의 힘으로 그런 성기사들을 보조한다.
각각의 몸에서 뻗어 나온 신성력이 하나로 뭉치며 요동쳤다.
개개인의 힘은 알렉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집단을 이루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교단의 전력은, 악마를 상대로 버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저쪽으로!’
흐히힝!
성기사들이 두세 명씩 조를 이루어 여기저기 퍼져 있는 악마의 파편을 상대하는 동안.
알렉스 역시 부지런히 전장을 돌아다니며, 발이 묶이게 된 녀석들을 착실히 줄여나갔다.
빛의 칼날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 끝에, 마지막 한 마리의 파편을 제거한 순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렉스 Lv 77]
이미 레벨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대량의 경험치가 들어오며 또다시 두 번의 레벨 업이 이루어졌다.
‘본신을 제대로 구성하지도 못한 조각들인데도 이만큼의 경험치를 주다니. 역시 원래는 상급의 악마가 맞았나 보네.’
현혹의 힘에서 벗어난 뒤로는 사실 그냥 샌드백을 두들기는 거나 다를 바 없었는데, 그럼에도 본신의 격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던 모양이다.
악마가 완전히 소멸되자, 도시를 뒤덮고 있던 안개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에 따라 미몽에 빠져 있던 나머지 연합군의 병력들도, 점차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마터면 연합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뻔한 커다란 위기였기에, 알렉스는 사람들의 존경과 함께 또다시 막대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 * *
악마를 끝으로 하이번데르크에는 더 이상 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연합군은 내성을 수색하며 암흑교도로 보이는 인물들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상흔을 봐서는 자신들이 불러낸 악마에게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하긴 상급의 악마가 인간의 힘으로 쉬이 통제될 존재는 아니긴 하지.’
제대로 본체를 소환했다면 모를까 그렇게 격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불러냈으니, 분노한 악마에 의해 암흑교도들이 되레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이해가 갔다.
하이번데르크를 점령한 연합군은 한동안 도시에 머무르며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의 휴식은 연합군의 사정상 꽤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부를 대상으로 한 성전은 하루아침에 끝날 수 없는 장기적인 전쟁이다.
연합군이 적진으로 더욱 깊숙하게 들어가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선, 병력의 증원은 물론이고 보급이 끊이지 않도록 더욱 철저한 준비를 갖춰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동부의 요충지인 하이번데르크를 주요 거점으로 삼고, 전초기지들을 더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바이로니아에서는 아직 병력충원에 대한 소식이 없소?”
“추가병력의 편제가 끝났다고 한 것이 전전번 연락 때였으니…… 아마 일주일 내로는 이곳까지 지원이 당도할 수 있을 것이오.”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일정이 진행되는군. 본국에 있는 동안은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놈들이 빠릿빠릿하게 행동하는 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확실한 실적을 보여주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소.”
남부 연합군의 소속국가들에서 2차로 병력을 보내오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기에, 연합군은 동부로의 진격을 잠시 멈추고 도시 주변을 정리하며 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연합군이 대기하는 동안 병력의 대부분은 하이번데르크에 머물러 있었지만, 기병대들은 정찰을 위해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는 임무를 순번을 정해놓고 번갈아 수행했다.
“어엇! 알렉스 경!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경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기사분들도 다들 하는 일인데, 저라고 빠질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허허! 경께선 저희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신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지 않겠소.”
“휴식만 취하다가 몸이 굳지 않으려면, 이렇게 움직이기도 해줘야 하니까 말입니다.”
“으음. 그렇습니까? 그럼 경의 뜻대로 하시지요.”
정찰 같은 자잘한 임무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가만히 있어 봐야 좀이 쑤시기만 하기에, 알렉스는 정찰대에 자원해 기사들과 함께 바깥을 돌아다녔다.
“허어! 알렉스 경의 기마술은 다시 봐도 놀랍구려. 그야말로 바람 같은 질주였소.”
“저보다는 이 녀석이 대단한 겁니다.”
“확실히 그 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긴 하오.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명마들도, 경의 말에 비하면 하찮게만 느껴지니 말이오.”
“이보시오 알렉스 경.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경의 말과 함께 우리 가문의 영지에 방문해 주실 수 있겠소이까?”
“음? 무슨 용무로 말입니까?”
“그렇게 대단한 말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선, 그에 어울리는 귀한 품종의 말들과 교배를 시켜야 마땅하지 않겠소? 아마 남부에서 우리 가문만큼 뛰어난 명마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없을 테니, 경의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외다.”
히히힝?
가문의 위세가 제법 대단하다고 알려진 어느 기사의 제안에, 킹이 귀를 쫑긋거리며 큰 관심을 보였다.
‘아니 왜 저런 소리에 관심을 가지냐? 넌 어차피 이제…… 그 뭐냐, 무장 해제당해서 없잖아. 현실 도피하지 마라.’
푸르륵!?
“아, 감사한 이야기지만 제 말은 고자…… 어흠! 더는 씨를 뿌리는 게 불가능한 몸인지라 그 제안은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어엇? 경의 말이 수컷이었소이까? 이런…… 달려 있는 게 없어서 영락없이 암말인 줄 알았거늘. 아주 불행한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구려? 이렇게 훌륭한 말이 대를 이을 수가 없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군.”
애써 외면하고 있던 상처가 또다시 후벼 파져, 킹은 크나큰 아픔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으응? 뭐지?’
정찰을 마치고 성안으로 복귀하던 알렉스는, 주둔지 내의 풍경이 떠나기 전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고 의문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력의 규모가 이전보다 훨씬 커진 것 같았다.
“음? 병사가 늘어난 것 같지 않습니까?”
“설마 지원 병력이 벌써 도착한 건가?”
함께 정찰을 다녀왔던 기사들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답은 금방 들을 수가 있었다.
“알렉스 경. 경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중부의 연합군이 찾아와, 현재 주둔지 내에 체류 중에 있습니다.”
“중부 연합군…… 입니까?”
“예. 어서 지휘부 막사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소란스러운 것이, 그쪽과 무언가 의견충돌이 있는 모양입니다.”
“흐음.”
남부를 비롯하여 대륙의 각 지방마다 연합군을 형성해 동부 정벌에 나섰으니, 이렇게 동부지역 내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같은 연합군끼리 의견충돌이 생길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설마 염치없이 우리 쪽 공적을 나눠 먹겠다고 달라붙은 건 아니겠지?’
그 설마 했던 상황은 이내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루미츠 왕국의 대도시인 하이번데르크를 중심으로, 점령지를 계속 확장해나가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던 남부 연합군.
그리고 그보다 한발 늦게 이곳에 도달한 중부 연합군은 남부 연합군이 만들어놓은 기반에 슬며시 발을 걸치며, 다음 목표로 삼고 있던 몇몇 도시들을 가로채려는 심산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부의 친구들은 욕심이 과하군. 어찌어찌 이곳까지는 빠르게 치고 들어온 모양이지만, 루미츠 왕국 전역을 점령하기엔 병력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말이지.”
“병력은 곧 충원될 예정이오! 괜히 우리 쪽 계획을 망가뜨리지 말고, 다른 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을 거요.”
“훗. 우리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나? 급하게 움직이느라 준비를 완벽히 갖추지 못했다면, 괜히 미적거리지 말고 얌전히 다음 사람에게 기회를 넘기시오.”
“뭐, 뭐라? 이런……!”
멀리서도 들릴 정도의 고성이 지휘부 막사 안에서 오갔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그게 이 앞에 있는 도시들에 대한 우선적인 권리를 보장해줄 순 없소. 우리는 이대로 진군을 계속할 테니, 조금이라도 전공을 나누고 싶다면 차라리 남부군도 우리 측에 합류해 전투를 돕도록 하시오.”
“끄응…….”
“물론 작전의 주도권은 전부 우리에게 넘겨야 하오. 병력의 질과 양, 어느 쪽으로 보나 우리 쪽이 주력이라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지.”
“양은 그렇다 쳐도 질에 대해선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음?”
갑작스레 다른 음성이 끼어들자, 중부 연합군의 인물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막사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알렉스가, 빈 의자에 걸터앉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머릿수만 많이 채웠다고 강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힘을 합치자는 제안은 나쁘지 않군요. 어디 지휘 권한을 어느 쪽이 가져갈지를 두고,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까?”
“……자네는 누구지?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뱉을 만한 권한이 있기는 한가?”
곧바로 남부군의 지휘부 인원들이 앞다투어 나서며 알렉스에 대한 칭송의 말을 늘어놓았기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어깨를 으쓱여 보인 알렉스는 중부군의 인물들 중, 아까부터 대표격으로 말을 하고 있는 이와 시선을 마주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저희가 대결에서 진다면, 남부군은 중부군에게 합류해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리지요.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하! 젊은 기사가 아주 맹랑하게 나오는군. 좋아, 대결이라면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건가?”
“여기 모여 있는 기사가 몇인데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알렉스는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명예로운 결투로 승부를 가려야겠지요.”
평범한 기사와 결투를 벌인다면, 열 번을 내리 싸워도 거뜬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