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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03화 (103/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3화

하이번데르크 점령전(3)

“성벽을 넘을 수 있다고?”

푸르륵.

‘둘을 태우고도 충분하지!’라고 말하는 듯한 킹의 태도가 전해져 왔다.

“좋아. 믿어본다.”

후욱!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킹의 모습에, 알렉스는 이사벨과 둘이서 성벽을 등반하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둘이 아닌 셋으로 전력이 상승한다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사벨이 등반 때문에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 그만큼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줄어들게 될 터.

킹이 정말로 성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여러모로 이득뿐인 조건이다.

알렉스는 킹의 등 위에 올라 이사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제 뒤에 타세요.”

“이번엔 제가 알렉스 경을 껴안는 겁니까? 하핫! 색다른 경험이군요.”

“예, 뭐. 그렇긴 하네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뒤쪽에 오르는 이사벨의 말에, 알렉스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하긴 이사벨의 뒤에 매달린 적은 몇 번 있어도, 반대의 포지션은 처음이긴 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테니 꽉 붙잡아야 할 겁니다.”

“앗, 알겠습니다.”

혹시나 킹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마하게 될까 봐 충고를 건네자, 이사벨은 알렉스에게 몸을 바짝 붙여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끄기기긱.

“헛! 취소입니다! 사, 살살 잡아요!”

“읏……? 네.”

흉갑의 파츠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겨지려 했기에, 알렉스는 다급히 목소리를 높여 이사벨을 제지했다.

하마터면 적들과 싸우기도 전에 갑옷이 파손될 뻔했다.

이사벨의 힘 조절을 기다리느라 잠깐 지체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준비를 갖춘 알렉스는 말머리를 돌려 성벽을 등지고 물러났다.

최대 속력을 낼 수 있도록 도움닫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 까닭.

이어서 킹의 고속 질주가 시작되었다.

‘지금? 아니야, 조금 더…….’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성벽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가속이 필요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이대로 성벽에 들이받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지금이다!’

[실드 차지]

킹과 감각을 공유하며 일체화된 상태를 유지하던 알렉스가 돌진 스킬을 사용했다.

동시에 킹 역시 성벽을 향해 힘차게 뛰어올랐다.

‘……엥? 안 되는 거 같은데?’

성벽의 절반을 조금 넘어서는 높이쯤에 이르는 점프.

그 정도도 엄청난 도약이긴 했지만, 거대한 장애물을 넘기엔 한참 부족한 높이였다.

하지만 성벽에 몸을 들이받기 직전임에도 여전히 자신감에 차 있는 킹의 마음이 전해져 왔기에, 알렉스는 의심을 지우고 킹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가능하다고? 설마 이런 중요한 상황에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 테지? 좋아! 보여줘!’

히히힝-!

어느 순간 킹의 발목 근처로 신성력이 모이며, 희미한 빛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건물 지붕 위를 밟고 비행하듯 달리게 해주었던 킹만의 특수한 성법이 발동된 것이다.

이내 성벽에 발굽 모양의 자국을 총총히 남기며, 킹의 몸체가 위를 향해 나아갔다.

‘벽면 주행!? 이런 멋진 녀석!’

물리법칙 따위는 갖다 버리라는 듯 벽면을 평지처럼 달리며, 킹은 순식간에 성벽 위로 솟구쳐 적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무리한 운용이었는지 신성력은 금방 흩어지며 성법이 해제되었지만, 어쨌거나 킹은 자신한 대로 성벽을 넘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모든 형편이 완벽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엇!?”

푸히힝?

성벽 위에 그대로 착지하려고 했던 킹은, 스스로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반대편까지 주르륵 미끄러졌다.

굉장한 주행 능력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에 어울리는 브레이크 기능은 없었기에, 킹은 애초의 계획과 달리 도시 안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야이-!”

끄기깃.

예정에는 없던 상황에 당황한 알렉스가 막 짜증을 담아 소리를 치려던 순간.

갑옷이 우그러지려는 소리가 들려와, 알렉스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이사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으윽. 이대로는 이사벨이 크게 다치고 말 텐데!’

자신이야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무사할 수 있고, 킹 역시 몸이 망가지긴 하겠지만 특유의 재생력으로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벨에겐 스스로를 보호할 아무런 수단도 없었다.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 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알렉스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킹의 등을 힘껏 걷어찼다.

프르륵!?

다행히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계단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을 발견하고, 그쪽에 닿을 수 있도록 몸을 움직인 것이다.

킹이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푸르르 떨며 낙하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뭐 어쩌겠는가.

간신히 계단 쪽에 닿은 알렉스는 등에 이사벨을 매단 채, 우당탕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마침 계단 구조물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자리해 있었기에, 두 사람은 금방 벽에 처박혀 멈출 수 있었다.

“이사벨 경! 괜찮습니까?”

“흐윽…… 괘, 괜찮스으우읏…….”

몸이 부딪치는 순간 굳건한 태세 스킬을 사용해 피해를 급감시킨 알렉스와 달리, 상당한 충격을 받은 이사벨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지면과 다이렉트로 찐한 입맞춤을 할지도 몰랐던 걸 생각하면, 그나마 지금 이편이 훨씬 양호한 상태이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계단 위쪽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침입자를 처단하기 위해 적들이 움직이는 것이리라.

이사벨을 향해 치유의 손길을 펼치고 있던 알렉스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제 등에 업혀서 쉬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가시지요.”

상태가 아직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사벨은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은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막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는지, 등 뒤로 손을 가져가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항상 등에 매달고 있던 폴액스가 보이질 않는다.

“아앗! 제 무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계단에서 구를 때 튕겨 나간 모양이군요. 내려가면서 찾아봅시다.”

어차피 홀로 떨어진 킹을 찾아야 하기도 했다.

위쪽에서 달려오는 적들은 무시하고, 두 사람은 아래를 향해 뛰어 내려갔다.

물론 아래쪽이라고 해서 적이 없지는 않았다.

“잡아라!”

“죽여!”

핏발 선 눈으로 살기를 흘리며, 병사들이 두 사람을 잡기 위해 우르르 몰려든다.

알렉스는 성검을 쥐어 빛나는 칼날을 뽑아 들고, 몸을 던지듯이 계단을 뛰어내리며 병사들을 뚫고 지나갔다.

방어 스킬을 활용한 단단함을 가장 큰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알렉스는 이제 검술 실력과 신체 능력 자체도 상급기사들을 가볍게 요리할 수 있는 수준.

자연히 일개 병사들 따위는 그의 발길을 잠시도 막아서지 못했다.

“이놈! 멈춰라!”

병사들을 낙엽 치우듯 쓸어버리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자니, 날카로운 찌르기가 알렉스의 정면을 파고들었다.

카강!

가볍게 다가오는 공격을 쳐낸 알렉스가 상대방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흑마력이 넘실거리는 흑색의 갑주.

외형만 봐도 타락기사임을 알 수 있는 암흑교도를 향해, 알렉스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래봐야 잔챙이네.’

방금 검을 한 번 맞댄 것만으로도, 상대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간신히 60대에 들어선 레벨 정도?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상급기사에 달하는 실력이지만, 이제는 70대 중반의 레벨에 달하는 알렉스를 상대하기엔 한참 부족했다.

[심판의 일격]

신성력이 가득 담긴 검격이 타락기사의 검을 부러뜨리며 갑옷을 때렸다.

“커억!”

내부가 진탕되는 충격에 휘청거리던 타락기사가 한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릎을 꿇었다.

알렉스는 더 공격을 가하는 대신 놈을 무시하고 지나쳐 내려갔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뒤따라오는 이사벨이 마무리를 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뻐억!

바짝 붙어오던 이사벨이 주먹을 휘둘러 타락기사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분명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이사벨의 핵꿀밤을 감당하지 못한 타락기사는, 그대로 기절했는지 꼴사나운 자세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방패로 밀치고 검으로 베어내며 길을 막는 적들을 해치우던 알렉스는, 이내 자신이 계단 끝에 도착했음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야?’

여전히 물밀듯이 몰려오는 적병들만 시야에 가득하고, 킹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킹이 떨어졌던 방향을 가늠해 본 알렉스는, 애마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밀려드는 인파를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적진에 단둘이 떨어진 모양새라 매우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만, 체력이 허락하는 동안은 이사벨이나 자신이 이런 일반 병사들 따위에게 당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아참, 이사벨은 지금 무기가…… 음. 상관없는 모양이네.’

이사벨이 평소에 사용하던 폴액스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떠올리고 잠시 시선을 옮겼으나, 이미 그녀는 적당한 무기를 구한 것으로 보였다.

조금 전 쓰러뜨리고 지나온 타락기사의 발목을 붙잡고 철퇴처럼 휘둘러, 다가오는 병사들을 날려 버리는 이사벨의 용맹한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알렉스는 괜한 걱정 따윈 치우고 킹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이런 커다란 도시에 암흑교도가 저놈 하나일 리는 없겠지. 녀석들이 몰려와 위험해지기 전에 빨리 킹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해도 알렉스와 이사벨 단둘이서 성을 함락시킬 순 없다.

킹을 찾는 대로 다시 성벽 위로 돌아가, 아군들이 넘어오는 것을 도와야 했다.

히힝-!

적병들을 베어 넘기며 움직이고 있자니, 저 앞에서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킹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목이 부러져 기역자로 꺾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다행인 게 맞나? 어우, 조금 징그러운데.’

평범한 말이었다면 당연히 즉사했을 상태.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말이란 종의 범주를 벗어난 킹은, 저 정도 부상쯤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물론 자신도 킹이 괜찮을 거라 믿고 내팽개친 것이긴 하지만, 머리가 옆으로 누워 덜렁거리는 채로 다가오는 광경을 보니 조금 소름이 돋긴 한다.

“으읏…….”

킹의 능력과 멋들어진 자태에 매번 감탄하며 부러워하던 이사벨도, 저 모습에는 질겁하지 않을 수 없는지 확 깬다는 표정이 되었다.

푸르륵! 프힝!

“어, 어, 그래. 고생했다.”

투덜거리는 킹을 달래며 부러진 목을 대충 억지로 끼워 넣어준 후.

알렉스와 이사벨은 다시 성벽 위로 오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앗! 제 무기를 찾았습니다!”

그 와중에 잃어버렸던 폴액스를 발견해 손에 쥔 이사벨이, 해맑게 웃으며 임시로 사용하던(?) 타락기사를 내려놓고 목을 잘라내 버렸다.

‘…….’

죽어 마땅한 적이긴 하지만 이쯤 되니 살짝 불쌍할 지경이다.

다시 하나로 뭉친 두 사람과 한 마리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성벽 위로 올라섰다.

“이럇! 달려!”

알렉스는 킹의 등에 올라타 이사벨을 뒤에 태우고, 광휘의 방패를 발동해 성벽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바글바글한 적병들을 굳이 하나하나 쓰러뜨릴 필요도 없었다.

킹의 돌진력과 본인의 스킬을 활용해, 알렉스는 눈에 보이는 적들을 전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진짜 이 조합이 사기긴 사기네.’

“빨리 올라가!”

“됐다! 성벽을 함락했다!”

“으아아-!”

하나둘씩 성벽 위에 오른 병사들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함성을 지른다.

알렉스의 활약으로 수성 측의 견제가 확연히 줄어들었기에, 연합군 병력들은 애를 먹었던 처음과 달리 손쉽게 성벽을 타고 넘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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