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2화
하이번데르크 점령전(2)
“다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밀란 말이다! 투석기는 장전 시간이 느리다! 성벽에 가까이 붙으면 더는 공격당하지 않아!”
장교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있는 힘껏 방패차를 밀며 전진했다.
바퀴를 달았다곤 해도 인력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방패차는, 병사들이 두 발로 뛰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느릴 수밖에 없다.
어차피 시체폭격을 막을 수 없는 점을 생각하면, 차라리 방패차는 그냥 버려두고 최대한 빨리 성벽에 접근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합군 지휘부는 애써 준비한 장비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계속 활용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 탓이라고 해야 할지 진군 속도가 느린 병사들은, 투석기의 폭격 범위를 재빠르게 벗어나지 못하고 몇 차례 더 추가적인 사격에 휘말렸다.
‘끄응…….’
기사전력들과 함께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렉스는, 죽어 나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음을 삼켰다.
‘그냥 방패차를 버리고 진군속도를 높였다면…… 아니, 그래도 성벽에 붙은 후에는 방패막이가 남아있는 편이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을지도…….’
그간 쌓은 영향력 덕분에, 원한다면 충분히 지휘부의 전술운용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방패차를 버리는 것이 과연 확실히 나은 선택일지 장담할 수 없어, 의견을 내지 못하고 아군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투석기는 발사각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일정 거리 안으로 진입하면 더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된다.
방패차를 버리고 성벽에 빨리 접근하는 편이 당장의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 테지만, 성벽을 공략할 때에는 기존의 계획대로 궁수들의 공격을 버텨줄 수 있는 방패차가 큰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는 섣불리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곧 전열보병들이 목표지점에 도달하겠군. 슬슬 출진할 때가 왔으니 다들 채비를 마치시오.”
“우리 사르데냐의 기사들은 이미 준비가 끝났소!”
“저까짓 성벽쯤은 단숨에 돌파하도록 합시다!”
아군 보병들이 성벽에 가까워지자,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길게 늘어서며 출격할 준비를 갖췄다.
알렉스와 이사벨 역시 기사들과 함께 도열한 채, 성벽을 향해 개미떼처럼 바글바글 몰려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전열보병들이 성벽에 가까워져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기사들이 전장이 투입되는 순간이 온다.
고급전력인 기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들의 신경이 분산되고 어느 정도 피로가 쌓이는 시점을 기다리는 것이다.
성벽 위에서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넘어 마침내 적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보병들이, 성난 함성을 지르며 기를 쓰고 목표와의 거리를 좁혔다.
확실히 성벽과 가까워지자 힘들게 끌고 온 방패차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무로 만들어진 방패가 쏟아지는 화살 비를 완벽히 막아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적이 가하는 투사공격의 위력을 반의 반절 이하로 급감시키는 효능을 보였다.
거리를 좁힌 아군 병사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각각의 임무를 수행했다.
방패차에 몸을 엄폐하며 활을 들어 적에게 응사를 가하는 병사.
큼지막한 나무망치를 쥐고 어깨에 밧줄 뭉치를 둘러멘 채 뛰어다니는 병사.
짐칸에 실린 방패를 꺼내, 돌아다니는 전우들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병사.
과도한 긴장과 흥분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행동은 굉장히 거칠고 서툴러 보였지만, 그래도 뚜렷한 목적이 있기에 점점 어떠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체폭격을 뚫고 지나온 탓에 멀쩡한 양은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 운반해 온 긴 통나무들이 병사들의 손에 의해 설치되어 사다리의 모양새를 갖춰갔다.
“밧줄 걸어! 최대한 꽉 묶어야 해!”
“그쪽부터 당겨! 아니, 그 옆을 당기라고 X신 새끼들아!”
“누가 여기 좀 도와, 커억!”
머리 위에서 화살을 쏘며 방해하는 적의 공격에 아군들의 시체가 점점 늘어난다.
그래도 악을 지르며 자신의 임무에 매달리는 병사들의 분투로, 길쭉한 기둥들이 하나둘 성벽에 기대어져 단단하게 고정되어 갔다.
뿌오오오옹-!
“지금이오!”
“기사단! 출진하라!”
슬슬 전투가 제법 궤도에 오르는 듯하자, 진격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전장을 내달렸다.
희생된 아군병사들과 적이 날려 보낸 시체가 뒤섞인 피비린내 나는 땅을 짓밟으며, 기사들은 빠르게 성벽 근처를 향해 나아갔다.
‘……저건?’
전장을 가로질러 막 절반쯤을 지나쳤을 때였다.
미간을 찌푸린 알렉스의 시선이 성벽 위를 향했다.
수성을 위해 모여 있던 궁수들이 대거 뒤로 물러나며, 거대한 노포들을 끌고 와 빈자리를 채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발리스타?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시야가 미치지 않는 뒤편에 숨겨두고 있었던 건가.’
지레의 원리를 이용한 투석기인 트레뷰셋과, 밧줄이나 판스프링 등의 탄성을 이용한 캐터펄트.
발리스타는 그런 투석기들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공성장비로 분류되는 병기이거늘, 어째 투석기는 운용하면서 발리스타는 성벽 위로 한 대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하긴 했었다.
수성용 사출병기는 보통 성곽에 단단히 고정되도록 설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전력노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이동식으로 개량한 발리스타들을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이거 위험한데?’
성벽 위를 가득 채우며 모습을 드러낸 발리스타들이, 장전을 마치고 아군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접근하는 기사들을 조준한다.
성벽 너머에서 곡사 방식으로 투사체를 쏘아 보내는 대형 사출병기들은, 상대방이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서면 공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무리 발사 각도를 바꿔가며 탄착지점을 조절한다 해도, 사격범위의 한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성벽 위에서 운용되는 발리스타는 곡사뿐 아니라 직사가 가능한 병기로, 다른 공성병기들에 비해 정확도가 높아 상대방의 주요 인원이나 물자를 저격하는 식으로 쓸 수도 있다.
냉병기 시대에서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던 기사의 판금갑옷도, 연사속도는 느리지만 관통력은 확실한 발리스타의 사격까지 막아줄 수는 없다.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대형화살이라면, 완전무장한 기사를 꼬치에 꿰뚫린 고깃덩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졌다.
쐐애액-!
수십 발의 대형화살이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기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큿! 이사벨 경! 내 옆에 딱 붙으세요!”
“네, 넷!”
알렉스의 앞으로 비스듬하게 세워지며 나타난 반투명한 방패가, 그쪽으로 날아오는 투사체들을 모조리 튕겨낸다.
이사벨을 비롯하여 운 좋게 그와 가까이 있던 일부 기사들은, 발리스타의 위력적인 사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아무리 대단한 방어능력을 갖췄다 해도, 자신과 떨어진 이들에게 가해지는 공격까지 대신 막아줄 방법은 없었다.
“크아악!”
히히힝-!
발리스타의 공격에 당한 몇몇 기사와 전마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그로인해 대열이 무너지며 아군끼리 부딪쳐 낙마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성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애쓰는 아군 병사들과 합류할 때까지.
연합군 기사들은 계속해서 가해지는 사격에 상당한 피해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올라가!”
“끄아악! 불이다!”
“빌어먹을! 기둥 더 세워! 무너진다!”
성벽을 공략 중인 병력들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발리스타들이 성벽 위를 차지하며 전열에 쏟아지는 궁수들의 견제사격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적들이 마시쿨리(수성을 위해 방벽 사이사이에 위치한 돌출 공간)의 배출구로 대량의 기름을 붓고 불화살을 쏴대는 통에,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구쳐 병사들이 성벽으로 다가서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계속 밀어붙이지 않고 뭣들 하고 있나!”
“불길 때문에 접근이 어렵습니다!”
상당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어쨌든 발리스타의 집중사격을 지나온 기사단은, 고전 중인 보병부대에 가세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병사들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기사들이라 해도 불 속에서 버틸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이기에, 성벽 공략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이어갔다.
‘생각 이상으로 적들의 방비가 상당하다. 이거 이대로는 성벽을 넘는다고 해도, 병력의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겠는데.’
전황을 살핀 알렉스는 상황이 매우 부정적임을 깨닫고 얼굴을 구겼다.
이래서는 어찌어찌 하이번데르크의 점령에 성공한다 해도, 연합군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될 공산이 높았다.
‘또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앞장서는 수밖에 없나?’
알렉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눈빛을 받은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저희가 나서야 할 것 같군요.”
“그래 보이긴 합니다만…….”
이사벨과 둘이서 성벽을 넘어 적들의 주의를 끌어둔다면, 아군들이 올라오기가 훨씬 수월해지긴 할 것이다.
다만 여러모로 걱정되는 점이 있어, 알렉스는 곧바로 이인 등반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성벽의 높이가 워낙 높아 지난번처럼 빠르게 정상에 오르진 못할 거야.’
아군들의 기세가 많이 주춤한 상황이라 시선이 얼마 분산되지도 않을 테고, 등반에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도중에 집중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화살이나 돌팔매 같은 공격쯤은 알렉스가 얼마든지 막아줄 수 있지만, 보이는 바와 같이 기름과 불의 조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광휘의 방패가 있으니 기름을 부어도 몸에 닿지 않게 막아줄 순 있지만, 주변에 불이 붙어 발생하는 열기 자체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온갖 종류의 저항력을 부여해주는 천상의 가호를 쓴다면, 화염에 대한 내성도 높아지기에 불길을 뚫고 지나가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이사벨에게까지 해당되지가 않는다는 점.
킹에게는 라이딩 스킬을 통해 효과를 공유하는 게 가능했지만, 이사벨에게는 같은 방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여유가 있을 때 한번 실험해 본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같은 인간을 기승수로 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운 좋게 잘 통과했다고 해도, 이사벨이 끝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우려되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동안 쭉 익시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신성력을 많이 소모하고 나면 이사벨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높아지게 된다.
성벽만 넘는다고 해서 전투가 끝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 이곳에도 암흑교도들이 칼을 벼리며 기다리고 있을 텐데, 놈들과 마주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힘을 빼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싶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나서는 것도 좋지만, 만약 그 때문에 무리를 하다가 이사벨을 잃기라도 한다면?
알렉스는 그런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알렉스 경?”
“으음. 일단은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조금 더 지켜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
“저를 경시하시는 겁니까?”
“-겠습니…… 예?”
날이 선 어투로 말을 끊고 들어오는 이사벨의 음성에, 알렉스는 움찔하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걱정되어서 망설여진다는 생각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십니다. 저는 알렉스 경이 안심하고 함께하기에는 부족한 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제게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어 달라 하셨지요? 저에게는 감히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알렉스 경이 누구보다도 신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결연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는 이사벨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제가 자격을 갖추기 위해 나서는 것을 막지 마세요.”
“아……?”
“알렉스 경이 나아갈 영예로운 미래에 제가 함께하길 원하신다면, 저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 음…….”
알렉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했던 발언은 조금 오해가 있기도 했고, 솔직히 깊은 생각을 갖고 내뱉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의 말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어떠한 목표를 가슴속에 확고히 새긴 듯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사벨의 마음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함께 고난을 딛고 영광을 쟁취해 봅시다.”
“그런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활짝 미소를 짓는 이사벨을 향해 마주 웃으며, 알렉스는 그녀의 등에 업히기 위해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전에.
푸히힝!
“……으응?”
‘왜 이번에는 넘을 수 있냐고 안 물어보냐?’라는 느낌의 눈빛을 보내는 킹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알렉스는 그대로 동작을 멈춰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