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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01화 (101/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1화

하이번데르크 점령전

“그런데 팔라딘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까?”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토의 소유권을 받는 귀족들과 달리, 팔라딘은 아무런 대가가 없다 해도 교단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교단으로부터 품위를 유지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을 받고는 있지만 딱 그뿐.

큰 공적을 세웠다고 해서 대단한 보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신분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전까지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네요.”

성전이 끝나면 동부에는 빈 땅이 넘쳐나게 된다.

대부분은 교단의 부름에 응해 참전한 국가들에게 보상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교단 소유의 영토가 되는 곳도 분명 생겨날 것이다.

그렇지만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말살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성전에 참전한 팔라딘 개인이, 그런 영토의 소유권을 갖게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기사 한 사람이 세울 수 있는 전공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하지만 나는 이야기가 다르지.’

알렉스는 남부 연합군의 모든 이들이 기여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엄청난 활약을 펼쳐 보였다.

만약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공적을 쌓아나간다면, 이사벨의 말처럼 영지 하나를 떡하니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직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한 설레발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한 영지의 주인이라는 꽤나 그럴싸해 보이는 타이틀을 얻을 기회라 생각하니, 살짝 마음이 설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도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구가 없는 건 아니니까. 암흑교 놈들을 때려잡으며 겸사겸사 출세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긴 하네.’

어차피 최선을 다해 전쟁에 임할 마음이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참 솔깃하네요. 영주라…….”

“알렉스 경이라면 당연히 그만큼의 활약을 하실 겁니다!”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이사벨에게, 알렉스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한 영지의 주인이 된다면, 이사벨 경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 그야 물론 진심으로 축하해드리겠지요!”

“아뇨. 저를 따라 소속을 바꿔주실 거냐고 물은 겁니다.”

처음에는 성기사의 신분으로 교단에 입적하게 되었다고 해도, 교단령을 하사받은 영주가 된다면 일개 평단원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영주가 된다면 아마도 재치권이 없지만 주교품의 특권과 영예를 지닌, 명의주교의 신분으로 교단과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을까 싶다.

‘명의주교라면 교구의 행정 권한은 없지만, 그래도 이사벨을 내 영지로 보내달라는 요청쯤이야 해볼 수 있겠지.’

이사벨이 소속 변동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가능하면 그녀가 이후에도 계속 곁에서 자신을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가능하면 가까이 두고자 하는 것은, 누구라도 당연히 떠올릴만한 생각이 아닐까.

“저는 이사벨 경이 앞으로도 쭉 제 곁에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알렉스의 말을 들은 이사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는가 싶더니, 이내 불을 지피기라도 한 것처럼 낯빛이 달아올랐다.

“그…… 저는, 아직, 그렇게까진…….”

“음. 무리한 부탁인가요?”

“그게……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 겨, 결혼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잉?’

이성과의 관계가 신성력의 발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기에, 예루스 교단은 성직자들의 혼인을 금지하지 않는다.

스스로 정결을 맹세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성직자들이 교단 내에서 좀 더 좋은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반드시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항은 아닌 것이다.

‘뜬금없이 결혼은 왜? 내가 뭔가 말을 잘못…… 어라?’

대화의 맥이 끊어져 의아해하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

설마 자신의 말을 일종의 프러포즈로 받아들인 건가?

그냥 소속구를 옮기고 지금까지처럼 서로 힘이 되는 관계로 있어달라는 말이었는데.

‘아니, 뭐…… 이사벨에게 애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생각을 자제하려고 했을 뿐이지 외모가 빼어난 편인 이사벨과 동행하며, 그렇고 그런 관계에 대한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간 목숨이 오가는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닌지라, 이성에 관한 문제로 깊게 고민을 하기엔 정신적으로 여력이 없기도 했었다.

‘그동안 빨리 레벨을 올려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진지하게 내 마음을 돌아보지도 못했고. 그래, 솔직히 연애에 대한 감정이 있기야 하지.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프러포즈 같은 걸 할 리가 있냐고.’

이 전쟁이 끝나면 나랑 결혼해 줄래? 라니.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만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보통 갑자기 돌연사하는 조연 캐릭터나 할 법한 대사다.

“이사벨 경. 그게……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게,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잘 수습해 봐야겠다고 싶어 입을 여는 찰나에, 이사벨은 빠르게 몇 마디를 내뱉고는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음…… 엄청나게 당황하네. 그야 뭐, 그런 오해를 했다면 당황할 만도 하지만.’

오해를 살 법한 말을 한 자신의 잘못이지만, 어째 0고백 1차임 같은 느낌이라 살짝 마음이 시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볼을 긁적거리고 있자니, 멀어져가던 이사벨이 움찔하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읏! 거절할 생각으로 피하는 건 아닙니다! 그, 그러니까……그냥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아?”

그 말을 끝으로 시야에서 사라진 이사벨의 모습을 떠올리며, 알렉스는 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

부대정비를 마치고 기세등등하게 북상한 연합군은 어느새 두 번째 도시를 앞에 두게 되었다.

“……이건 너무 높은데.”

지난번 점령한 도시보다 거의 두 배쯤 높아 보이는 성벽을 마주하며, 알렉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곳 하이번데르크가 루미츠 왕국 내에선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대도시이라 하더구려.”

“동부가 낙후된 지역이긴 해도 마냥 작은 도시만 있는 건 아니지요. 하이번데르크를 확보해 둔다면, 동부의 정벌에 있어서 아주 유리한 교두보를 손에 넣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난다면, 아마 다른 연합군을 통틀어서 우리보다 앞서나가는 이들은 없을 것이오.”

희망찬 계획을 떠들어대며 한껏 신이 나있는 지휘부 인사들의 모습에, 알렉스는 눈가를 문지르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행군을 너무 오래한다 싶었더니, 주변의 다른 소도시들은 무시하고 큰 거 한 방을 노리러 온 건가.’

보급로를 확보하기 쉽도록 작더라도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공략해나가는 편이 좋을 텐데.

만난 적도 없는 타 지역 연합군을 경쟁상대로 의식하며, 다들 너무 분위기가 과열된 느낌이다.

“그래서 다른 분들은 저길 어떻게 공략할 계획을 갖고 계신지? 이거 외성을 돌파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만.”

“공성병기를 제작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 적당한 나무는 주변에 널려있고 말이지요.”

“흐음.”

대륙 동부는 전체적으로 열대 기후인 지방이 많고,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교목류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나무를 벌목해 그대로 성벽에 기대기만 해도 타고 오를 수 있는 다리가 만들어질 테니, 확실히 시간을 조금 들이면 쓸 만한 공성병기들을 만들 수 있긴 할 터.

“그리고 저희에겐 알렉스 경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하핫! 신의 은총이 함께하는 군대를 저들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허.”

농담인가 싶지만 저건 진심을 담아 하는 소리다.

홀로 적들의 기마대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준 뒤로, 연합군의 많은 이들은 알렉스를 반쯤 신격화하는 상태가 되었다.

어떤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그가 나서면 기적이 벌어져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라는, 그런 무분별한 상상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 버린 것이다.

심지어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들 중에서도, 그런 의견에 찬동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한 일들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남들에게 신의 이적으로 여겨질 만도 하지만…… 너무 맹목적인 기대로 이성이 흐려지면 안 되는데.’

자신이 남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불가능한 일이든지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알렉스는 혹시나 지휘부가 이상한 판단을 내리게 될까 봐, 우려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임시 주둔지가 세워지게 되자 병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작업을 시작했다.

나무를 벌목하고 잔가지를 쳐내는 병사도 있고, 덩굴을 꼬아 밧줄을 만드는 병사도 있었다.

공병장교의 지휘 아래 야전공병들이 영혼 없는 눈으로 자재들을 가공하며, 상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공성용으로 쓸 수 있는 장비들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다들 착실히 공성 준비를 하긴 하는군. 나한테 기적으로 성벽을 허물어달라고 요구하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공병들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의외로 결과물들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방패차라 이름 붙여진 장비.

병사들이 성벽까지 접근할 동안 투사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대형방패와 수레를 결합한 물건이었다.

그 외에는 발을 딛고 오르기 쉽도록,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홈을 파놓은 커다란 기둥도 여럿 있었다.

성벽까지 이 기둥들을 무사히 운반하여 줄지어서 기대어 세운다면, 그것만으로도 벽을 타고 넘는 튼튼한 사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급조된 공성병기들은 정교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품질이었고, 오로지 나무와 밧줄로만 만들어져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단기간 사용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고, 높은 성벽으로 보호받는 대도시를 공략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준비가 다 끝났소이다!”

“음! 이만하면 이미 하이번데르크는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겠소.”

공성병기의 제작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한 연합군은, 기세등등한 태도로 전투에 돌입했다.

각 세력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알렉스가 지휘부의 의견을 잘 조율해준 덕분인지, 병력들은 이전의 난잡했던 모습과 달리 오와 열을 맞추며 성벽을 향해 진격했다.

‘괜찮네. 병사들의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겠어.’

방패차를 밀며 진군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아진 모습의 공성전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짝 안도하는 알렉스의 시야에, 하늘을 까맣게 메우며 날아오는 무언가의 모습이 보였다.

“엇!?”

투석 공격이었다.

연합군의 공성 시도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각도 때문에 안쪽이 보이진 않지만, 성벽 뒤로 상당수의 투석기가 모여 있는 모양인지, 허공을 가득 채운 대량의 투사체가 연합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퍼버버벅!

화살 정도를 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패차는, 예상보다 더욱 묵직한 공격을 두들겨 맞으며 쉽게 망가져 갔다.

“크윽!”

“으아악!”

당연하게도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부상자로 돌변해 갔다.

“허억!?”

“이게 뭐야!”

“우욱! 그웨엑!”

아직 사격 범위 안에 들어서지 않은 병사들이, 질겁하는 표정이 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저기서 비위가 약한 이들이 구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정신적인 충격으로 다가온 탓이 컸다.

‘이런 썅…… 이 자식들은 대체 사람을 얼마나 죽여 대는 거냐.’

알렉스는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막연히 투석 공격이라고 짐작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적들이 쏘아 보낸 것은 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부패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인간의 시체들이었다.

돌 대신 날아온 다량의 시체들은 지면이나 방패차 혹은 병사들과 직접 충돌했고, 잘게 찢겨 연합군의 눈앞에 끔찍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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