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9화
성전(5)
도시 하나를 점령한 남부연합군은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등, 부대정비의 시간을 가지며 며칠간 점령지에 머물렀다.
마구잡이로 싸운 것치고는 병력의 손실이 아주 심각하진 않았다.
각 교구에서 올라온 실력 있는 사제들이 한가득이다 보니, 숨만 붙어 있으면 어지간한 중상자들도 전부 전력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기 때문.
연합군의 몇 없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점령전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알렉스는 요사이 꽤나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연합군을 구성한 각 세력들에서 친분을 쌓고자 수시로 그를 찾아댄 탓이다.
‘아으, 거 더럽게 귀찮게 구네.’
그래도 마냥 번거롭다고 내칠 수는 없었다.
연합군을 조금이라도 더 군대답게 만들려면, 자신이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연합군의 결속력이 워낙에 형편이 없다 보니, 각 병력들은 부대가 다르면 서로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이제는 알렉스와 마주치면, 직속 상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한 예를 보이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일부 기사와 병사들이 위험한 국면마다 앞장서서 방패가 되어준 알렉스의 능력을 눈앞에서 목도했기에, 입소문이 퍼지고 퍼져 그에 대한 호감과 신뢰가 높아진 덕분이었다.
비록 단 한 번의 전투였지만, 알렉스는 연합군을 수호하는 신성한 상징으로 인식되어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알력다툼이나 벌이면서 지 꼴리는 대로 하겠다는 인간들을 통제하려면, 모두의 인정을 받는 인물이 나타나 중심을 잡아주는 수밖에 없겠지.’
현 상황에 그런 위치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어떻게 봐도 자신 한 명뿐이 없었다.
물론 아직은 그에게 연합군 전체를 휘어잡을 정도의 영향력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마냥 머나먼 뒤의 일도 아닐 것이다.
연합군의 동부정벌은 이제 첫발을 디뎠을 뿐이고, 가야 할 길이 아직도 한참 남아 있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병력이 많다고 해도 최대한 빨리 하나로 뭉친 군대다운 군대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결국 연합군은 한순간에 삐끗하여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될 것이다.
다른 지방의 연합군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몰라도, 적어도 남부 연합군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지금보다 더 높은 인지도를 쌓을 수 있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극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렉스를 전쟁영웅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의견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활약하는 싸움을 직접 보지 못해, 그냥 과장된 소문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분 존재했다.
공성전 때는 아무래도 부대가 여기저기 나뉘어져 개별적인 전투 수행을 했다 보니,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지 못한 탓이다.
도시 내의 시가전에서 네크로맨서를 일거에 쓸어버린 것도, 지휘부에나 보고가 되어 공로를 인정받았을 뿐.
땅에서 언데드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대부분의 병사들은, 머리 위를 뛰어다닌 알렉스와 킹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이룬 성과에 비해서 활약상을 목격한 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에 대한 아쉬움은 이른 시일 내로 해소될 수 있었다.
“척후 부대로부터의 보고입니다!
“대규모 병력이 관측되었습니다!”
남부 연합군의 다음 전투가, 평야에서 이루어지는 회전(pitched battle)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 *
부대정비를 마치고 다음 목표를 향해 북상하던 연합군은, 널찍한 광야 한복판에서 적들과 마주했다.
명예를 드높이고자 성전에 참가한 기사의 비율이 높은 편인 연합군에게, 평평한 들판을 전장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꽤나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장애물이 없는 광활한 대지는 기마대가 날뛰기 좋은 최적의 전투 환경이기에.
‘내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네.’
기병이 싸우기 수월한 전장이라는 건, 알렉스가 대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킹의 기동능력과 자신이 가진 방어능력의 조합.
그것만으로도 다른 기사들과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인데, 이제는 기승 상태에서도 스킬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알렉스는 이번 전투에서 스스로가 어느 누구보다 돋보이는 전투를 펼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뿌우우으으-!
양측의 병력이 서로 가시권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지휘부의 신호에 따라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초에 교섭이나 항복 권고 따위가 무의미한 전쟁이기에, 전통적인 예법 따위는 모두 생략하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한다.
두 세력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어느 한쪽이 전멸해야만 끝이 나게 될 진격을 시작했다.
‘병력 차이는 여전히 우리가 우세하군.’
남부 연합군의 병력 규모는 대략 6천가량.
적병들의 수는 2천에서 조금 모자라 보이는 정도였다.
아군 지휘부가 일부러 지기 위해 병력을 운용한다면 모를까, 이런 회전에서 세 배의 규모 차이면 사실상 전술이란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격차이긴 하다.
‘구성이 좀 독특하긴 하네. 평지에서 싸우기 위해 기병들을 모아온 건가?’
기사가 많은 연합군에도 기마병과의 비율은 2할이 채 되지 않는다.
반면 상대측은 병력의 절반가량이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마대의 수로만 따지면 양쪽이 엇비슷하다는 이야기다.
“돌격의 선봉은 우리 바이로니아의 기사단이 맡겠소.”
“무슨 헛소리를! 평지가 드물어 평생 산이나 타고 지내던 작자들이 선봉이라고? 거, 달리다가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이놈! 어디서 감히 그따위로 무례하게 입을 놀린단 말이냐!”
“흥! 이래저래 알려진 명성만 따져 봐도, 당연히 우리 사르데냐 왕국의 정예들이 앞장서야 옳지 않은가.”
연합군 보병대의 진군에 맞춰 이동하며 적들의 동태를 살피던 알렉스는, 아군 진영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고 슬쩍 시선을 옮겼다.
어째 조용히 넘어가나 싶더니만, 어느 세력의 기사들이 선두에 서느냐를 가지고 분쟁이 벌어진 듯하다.
‘끄응…… 매번 지치지 않고 잘도 싸우는구만.’
기마돌격에서 선봉을 차지하는 것은 기사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자격 중 하나로 취급되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툼이 벌어져도 어쩔 수 없긴 했다.
잠시 시끄럽게 떠들던 기사들이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그래도 적을 앞둔 상황에서 분란을 키우는 건 아니다 생각해 잘 합의를 본 건가 싶었는데, 아군 진영의 양익에서 기사들이 앞다투어 뛰쳐나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입 아프게 떠드느니 그냥 원하던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모양이었다.
“이랴앗! 돌격하라! 하앗!”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바이로니아 사내들의 용맹함을 보여줘라!”
‘허허. 지랄들 한다, 진짜.’
아군 기사단의 출진 타이밍에 맞춰 움직일 생각이었던 알렉스는,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난잡하게 돌격하는 기사들을 보며 뻣뻣해지는 뒷목을 주물렀다.
보병이 주축으로 이루어진 본대가 적들과 충돌해 서로를 밀어붙이는 동안, 기동성이 장점인 기병대가 우회하여 측면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것은 병력 운용의 기본이다.
흔히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불리는 방식.
그런데 망치 역할을 해야 할 기사단이 저렇게 결속력 없이 분산되어 달려든다면, 그만큼 기병 전력에게 요구되는 돌파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쇠망치가 아니라 고무망치 수준으로 위력이 격하될 수 있다는 소리다.
‘후우, 그래도 병력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은 안 오겠지.’
본대의 규모가 비등비등했다면 저런 행동들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기병 전력이 적진을 치고 빠져나오지 못해 아군이 도울 수 없는 후방에서 고립된다면, 그대로 어이없이 전멸을 당하게 될 수도 있기에.
그나마 상대편의 전체적인 병력이 적어, 아군 기병 전력이 적들에게 포위당해 빠져나오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쯧. 킹, 우리도 가자.”
프히힝!
알렉스는 먼저 출발한 아군 기사들을 뒤따르기 위해 킹을 재촉해 속도를 높였다.
일반적인 전투마들과 비교해 거의 두 배는 빠른 속도를 가진 킹은, 알렉스의 지시에 따라 금방 벌어진 거리를 좁혀갔다.
그러던 와중 상대측에서 기마들이 달려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벌써?’
아군 기사들이 출진 시기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뛰쳐나갔을 뿐이지, 아직은 양측의 본대가 제법 떨어져 있어 기병대가 움직이기엔 조금 이른 시점이었다.
아무래도 이쪽의 움직임에 맞춰, 기병으로 기병을 요격하기 위해 출진을 서두른 모양이다.
보병 병과와 달리 기병 전력은 양측이 비등해 보이니, 그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수백 마리의 말들이 대지를 달리며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한 몸이 된 것처럼 진형을 이루어 달려오는 적 기마대의 위용에, 아군 기사들도 슬그머니 속도를 조절해가며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리 막 나간다 해도 이따위 무질서한 돌격을 하다가 기병끼리 맞부딪치면, 허망하게 각개 격파당할 거란 걸 본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좋아. 이제 좀 봐줄 만하게 되었…… 읏?’
막 아군 기사들을 따라잡아 대열에 합류한 알렉스는, 정면에서 느껴지는 불순한 기운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레벨이 오르고 신성력이 강해질수록 흑마력을 감지할 때의 혐오감도 짙어지는 기분이다.
‘암흑교도가 있군. 역시 무언가 준비한 게 있으니 이리 나선 거겠지.’
돌진해오는 상대측 기마들 사이로, 다른 기병들과 차별화된 형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보인다.
흑마력이 물질화된 심연의 갑주를 입고, 붉은 안광을 빛내는 타락기사들.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성기사가 아니라면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존재들이다.
‘과연, 믿는 구석이 저거였나.’
타락기사는 개인의 무력도 일반적인 기사의 수준을 상회하지만, 집단을 이루었을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놈들이다.
녀석들은 같은 타락기사가 가까이 인접해 있을 경우 어둠의 힘을 공유하여, 일시적으로 방어력과 생명력을 상승시키는 버프 효과를 줄 수 있게 된다.
이 효과가 유지되는 동안은 성기사라 해도 쉬이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아예 불사신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버린다.
‘타락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과 일반적인 기사단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면, 수가 몇 배쯤 되지 않는 이상 필패일 수밖에 없지.’
양측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적의 기병대에 섞여 있던 타락기사들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적 기병 전력의 전원이 타락기사인 것은 아니지만, 대여섯 명만 앞장서서 창끝의 역할을 맡아줘도 충분히 뛰어난 위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두면 아군 기사들이 크게 불리할 것이 분명했기에, 알렉스는 진형의 선두에 서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알렉스의 요구에 따라 전력을 다해 달린 킹이 순식간에 선두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고맙게도 마침 판이 잘 깔렸네.’
도시를 점령한 후 부대가 정비를 갖추는 며칠의 기간 동안.
알렉스는 몇 차례의 실험을 통해 기승 상태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스킬 활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자신과 킹에게 동시에 스킬 효과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조절하기에 따라서 예전처럼 본인에게만 스킬을 적용시킬 수가 있다는 점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실드 차지와 굳건한 태세.
두 스킬은 애초에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조합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실드 차지의 효과를 킹에게 부여하면서, 자신에게만 따로 굳건한 태세를 개별 적용하는 활용법을 터득해냈다.
‘뭐 이것만으로는 그리 쓸모 있는 조합이 아니긴 하지만, 다른 스킬이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네크로맨서들을 처리하고 레벨 업을 경험했던 알렉스는, 그때 얻은 포인트를 여태까지 고려하지 않았었던 새로운 스킬에 투자했다.
[광휘의 방패 Lv 1]
자신의 전방으로 신성력을 넓게 퍼뜨려, 빛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방패를 만들어내는 스킬.
방패에 가해지는 피해가 모조리 사용자의 몸에 전해지기에, 탱커라 해도 전담 힐러가 없이는 써먹을 수 없는 기술이다.
현실이 된 이곳에서는 쓸모가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해,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스킬이기도 했다.
‘그런데 라이딩과 연계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단 말이지.’
스킬을 사용하자 딱 킹의 머리가 방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반투명한 직사각형의 방패가 만들어졌다.
[굳건한 태세]
[천상의 가호]
이어서 자신만을 대상으로 한 굳건한 태세를, 그리고 킹과 공유하는 천상의 가호를 사용했다.
“다 뒈졌다고 복창해라 이 새끼들아!”
[실드 차지]
마지막으로 실드 차지의 가속 효과를 받은 킹이, 거대한 방패를 앞세운 채 방어력을 최대로 뻥튀기한 알렉스를 등에 싣고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현대에나 존재하는 불도저탱크를 가져다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