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7화
성전(3)
“기사다!”
“떨어뜨려!”
갑작스레 솟아난 두 사람을 발견하고, 성벽 위에 있던 적병들이 창을 내질렀다.
재빨리 이사벨의 등에서 내려온 알렉스가, 가뿐하게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성검을 뽑아 휘둘렀다.
이사벨의 근력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70대 레벨로 접어들며 상급기사들조차 상회하는 능력치를 지닌 알렉스다.
명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알페리온의 절삭력.
9레벨 소드 마스터리로 달인 수준에 근접한 검술.
거기에 충분한 신체능력까지 더해지자, 자루가 목재로 된 병사용의 평범한 창 따윈 수수깡처럼 잘라낼 수 있었다.
‘흠. 묘하게 이질감이 드네.’
매번 강대한 괴물들을 상대하다가 평범한 인간이 가하는 공격을 막아내려니, 영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미동조차 없는 알렉스의 굳건한 방어는,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냄과 동시에 허점을 노출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드러난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일격일살.
알렉스는 화려함은 없지만 충분히 치명적인 공격으로, 성벽 위에 차곡차곡 죽음을 적립해 갔다.
이사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벽에 오르자마자 익시드는 해제했지만, 원래도 이사벨의 근력은 탈인간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기술적인 부분은 다른 노련한 기사들에 비해 부족할지 몰라도, 그녀의 폴액스의 담긴 힘은 평범한 인간이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동작으로 좌우 횡베기를 몇 번 되풀이하고 나자, 이사벨의 반경 몇 미터 내로 더는 서 있는 적병이 없어지게 되었다.
“저쪽으로!”
“옛!”
두 사람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아군 병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주에 당해 신체능력이 떨어진 기사들이, 망령들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네크로맨서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망령들을 조종하는 사령술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성벽 위가 아니라 도시 내의 다른 장소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군. 기사들을 살려야 성벽을 함락시키기가 수월해지니, 네크로맨서를 찾는 건 잠시 뒤로 미루자.’
알렉스의 몸을 중심으로 신성력이 흘러넘쳤다.
긴 쿨타임 때문에 사실상 한 전투에 한 번 정도밖에 쓸 수 없는 스킬을, 지금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디바인 크로스]
성벽 위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지난번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스킬 포인트 중 하나를 투자해, 알렉스는 디바인 크로스를 3레벨로 올려두었었다.
이전보다 한층 더 넓고 강하게 뻗어나간 신성한 빛이, 성벽 위를 날아다니던 수십 마리의 망령들을 한순간에 소멸시켜버렸다.
‘네크로맨서가 가까이 있었다면 그놈도 같이 보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쉽네.’
비장의 한 수를 벌써 소모해 버린 게 아깝긴 하지만,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망령에게 당할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긴 했다.
어차피 아군 병력이 외성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사실상 도시를 점령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도시의 내성 건물은 요새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단순한 저택 시설에 불과하다.
외성처럼 성벽이란 거대한 방해물이 없는 이상, 연합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적을 쓸어버릴 수 있을 터.
도시 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져도 그때는 교단의 전력이 함께할 테니, 네크로맨서가 새로운 수족들을 데리고 튀어나온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오, 오오…….”
“그 많던 고스트들을 순식간에 해치우다니!”
“넋 놓고 있지 마십시오! 이대로 쭉 밀어붙여서 성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아, 알겠소!”
기사들과 합류한 알렉스는 이내 성벽 한 곳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고, 뒤따라 올라오는 병사들을 규합해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성문 주변은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수비군에 의해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었으나, 성벽을 타고 오른 연합군 병력에 밀려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다.
“성문이 열렸다!”
“돌격! 안으로 진입한다!”
“와아아아-!”
수천에 달하는 군대가 먹이를 발견한 개미떼처럼, 성문을 향해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다.
적은 수의 병력임에도 수성의 이점을 이용해 공세를 버텨내고 있던 적병들은, 성문이 뚫리자 속절없이 무너지며 연합군의 발아래 짓밟히게 되었다.
연합군은 함성을 지르며 대로를 달려 내성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그 힘찬 소리들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저, 저것 좀 보십시오!”
“……이게 무슨?”
승리를 앞두고 사기가 충만했던 연합군의 기세가 사그라지며, 앞장서서 달리던 병사들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전장의 열기로 눈이 뒤집힌 병사들의 흥분이 일거에 식을 만큼, 도시 내의 풍경이 기괴했기 때문이었다.
바닥 전체가 검붉은 피로 젖은 도시 중앙의 대로변에는, 차마 세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의 다량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져 있었다.
아마도 도시의 주민이었을 거라 추정되는 시체의 수는, 대충 봐도 천 단위를 가볍게 돌파하는 수준이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풍겨온다.
“이런 미친…….”
“정신 나간 놈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평범한 주민들은 전부 죽이고, 병사들만 세뇌로 조종하고 있던 건가?’
과장 없는 표현으로 시체의 산이 쌓여 있는 도시의 모습에, 알렉스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곳이 바로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신이시여…… 저 가엾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참혹한 현장을 목도한 연합군이 발길을 멈추고 탄식하던 때였다.
도시의 성벽 위로 검은 안개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이내 하늘을 감싸며 태양빛이 가려져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엇!”
“당황하지 말고 주변을 경계하라!”
심상치 않은 현상에 병사들이 무기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사방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야아아악!
캬아아아-!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망령들이 연합군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귀곡성을 퍼뜨린다.
음산한 기운이 도시를 감싸며 갑자기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져, 연합군의 병사들은 몸서리를 치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우매한 자들아. 여기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크히히힛!”
“죽음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안식일지니.”
시체들의 산 너머로 흑마력을 풀풀 풍기며 걸어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쯧! 네크로맨서가 있는 건 알았어도, 이렇게 많은 군세를 다룰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백? 삼백? 고스트의 수가 이 정도면 병사들의 피해가 상당해지겠는데.’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적의 규모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설마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이었다니.
디바인 크로스를 너무 일찍 소모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망령은 자신에겐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지만, 다른 아군들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조차 마법무기가 없으면 놈들을 격퇴할 수가 없다.
저 많은 수의 영체형 몬스터를 물리치려면 아군 병력에 큰 손실이 생길 수밖에-
“예루스시여, 당신의 자비를 저희 위에 내려주소서!”
“사악하고 부정한 것들아, 거룩하신 주 예루스의 권능 앞에 굴복할지어다!”
-없다고 여겼는데,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 우리도 대응할 수단은 충분하지 참.’
거의 뒷짐 지고 구경하다시피 하고 있던 교단의 전력이, 네크로맨서들에게 맞서며 드디어 밥값을 하기 시작했다.
축복이 퍼지며 병사들의 마음에 담대함을 불어넣고, 두려움을 쫓아내 몸의 떨림을 진정시켰다.
몸에 활력이 돌며 정신이 맑아지고 시야가 또렷해진다.
희미하지만 망령에게 약간이나마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축성의 효과가, 연합군의 무기 하나하나에 모두 깃들었다.
교단의 사제들이 부대를 이룰 정도로 모여 있으니, 수천 명의 군대에게 이런 대단위 버프를 거는 것이 가능했다.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사, 그 어떤 삿된 존재도 굳건한 믿음을 침범하지 못할지니.”
키에엑-!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던 망령 몇 마리가, 바늘에 찔린 풍선마냥 펑펑 터지며 소멸한다.
사제들 중에는 구마계통의 성법이 특기인 자들도 있으니, 손을 대지 않고 기도만으로 고스트를 퇴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겁먹지 마라! 신의 뜻이 우리와 함께한다!”
“이야아아!”
“신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얼어붙어 있던 연합군의 기세에 다시 불씨가 지펴진다.
그렇지만 마냥 상황이 유리해진 것은 아니었다.
암흑교도들의 다루는 전력이 영체형의 언데드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어억.
건물 높이만큼이나 쌓여 있던 시체들이 언덕이 무너지며, 죽은 자들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할 순 없는 저급한 좀비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엄청난 물량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으아아! 죽어엇!”
“앞서나가지 마! 대형 유지해!”
“흐앗! 다, 다리가! 나 좀 도와줘!”
“옆의 사람하고 열을 맞춰서 버텨!”
“넘어졌다간 그대로 밟혀 죽는다!”
그에에엑.
그아악!
두 세력이 충돌하며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울려 퍼진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극명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생김새는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살의가 가득한 공격에 목이 잘리고 팔이 끊어지며 사방에서 핏물이 솟구친다.
옆에서 악을 지르는 존재가 살아 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언데드인지 알아보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연합군이 서로 심하게 손발이 안 맞긴 했어도, 다들 훈련받은 병사들이기에 최소한의 진형은 유지해서 망정이다.
대열이 흐트러져 뒤섞였다면, 아군끼리 찔러 죽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을 것이었다.
“죽어라! 이 더러운 것들아!”
“빌어먹을! 베고 또 베어도 끝이 없군!”
병사들이 끝없이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상대로, 간신히 밀려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싸우는 가운데.
홀로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알렉스와 이사벨의 모습은 단연코 돋보였다.
‘뭐, 써보니 나쁘진 않군. 이걸 투자하길 잘한 것 같네.’
[리플렉트 실드 Lv 2]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다른 하나의 포인트는, 리플렉트 실드 스킬을 2레벨로 올리는 데 사용되었었다.
원래는 다른 스킬들보다 먼저 투자할 예정이 없었으나, 이런 대규모의 전투에서는 효율이 뛰어날 거란 생각에 우선순위를 조절해 보았다.
‘반사공격도 신성력이 담겨서 그런가? 언데드라서 더 효과적인 거 같긴 하네.’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몰매를 맞는 알렉스의 곁으로, 파괴된 언데드들의 파편이 즐비하게 늘어진다.
방어에 집중해야 하다 보니 자연히 공격의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리플렉트 실드의 반사공격이 누적되어 때리지도 않았는데 혼자 쓰러지는 적의 수가 제법 된다.
거기에 더해 심판의 일격과 격노의 응징을 번갈아 써가며 주위를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알렉스는 잔뜩 쌓여 버린 시체 파편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윽. 이거 더 나아갈 수가 없네.’
시체가 몇 구만 쌓여 엉켜도 무게 때문에 힘으로 밀고 지나갈 수가 없어, 알렉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방어능력도 좋긴 하지만 이럴 때는 이사벨의 괴력이 부럽다.
자신의 방어능력에 그만한 힘까지 더해진다면, 순식간에 좀비들을 돌파해 암흑교도 놈들에게 닿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꽤나 익숙한 울음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히히힝!
“킹?”
시선을 뒤로 돌리자, 저 멀리 성벽 위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킹이 보인다.
‘으응? 똘똘한 놈이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성문으로 들어왔겠지만, 거기는 뭐하러 올라갔대?’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알렉스의 눈에, 킹이 성벽을 박차고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억! 뭔데? 왜 저러는 거야!?’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튼튼한 녀석이니 저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왜 저런 짓을 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혼자 성벽 아래 두고 갔다고 시위하는 건가?
당혹감에 빠져 굳어진 알렉스는 이내 눈을 크게 치켜뜨며 탄성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