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6화
성전(2)
“서쪽의 성벽이 다른 곳보다 높이가 살짝 낮은 편이니, 병력을 나눠서 그쪽을 함께 공략합시다.”
“무슨 소리! 서쪽 벽을 따라 넓게 파져 있는 해자는 보지 못하셨소?”
“차라리 지대가 높은 동쪽이 벽을 타고 넘기는 더 수월할 거요.”
“다툴 필요가 뭐 있나? 인원은 충분하니 전 방위에서 공격하면 되지 않은가?”
“장난하십니까?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공성 병기의 지원 하나 없이 성벽을 공략하는 게 쉽겠소? 주력 부대를 셋 이상으로 나누는 건 바보짓이오!”
“기사가 몇 명인데 그런 걱정을 합니까? 한두 사람만 올라서도 성벽 위의 잡졸들을 금방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기사들이라고 성벽을 쉽게 오를 수 있는 줄 아시오? 파성탑은 고사하고 재차(대형 사다리차)조차 없으니,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고작 갈고리 로프나 사다리 따위에 의지해 성벽을 올라야 하는 상황이거늘!”
“쳇. 계집애처럼 걱정들도 많으시군.”
“뭐라고! 이놈! 방금 뭐라고 지껄였느냐!”
공성전을 앞두고 작전을 수립하기 위해 각 세력의 수뇌부가 모였지만, 처음부터 명확하게 중심이 잡혀 있지 않았던 연합군이 이제 와서 깔끔하게 의기투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소란스럽게 회의를 마친 결과.
결국 연합군은 각자 알아서 하고 싶은 대로 전투를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오, 진짜 미친놈들인가?’
내용을 전해 들은 알렉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흘렸다.
이래서야 이름만 연합군이지 전혀 힘을 합치는 게 아니지 않나.
연합군의 단합력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아군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전쟁은 지체 없이 진행되어야만 했다.
뿌우우-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연합군은 상대측 도시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지휘부가 죄다 따로 놀아서 오합지졸처럼 보이긴 해도, 성전에 참여한 병력의 전체적인 수준 자체는 꽤 높은 편이다.
투구와 사슬갑옷, 몸통을 가릴 수 있는 카이트 실드 등의 튼실한 무장을 갖춘 중장보병들이, 묵직한 걸음걸이로 성벽을 향해 진군했다.
그 사이사이로 전신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해 함께 달려 나갔다.
‘성벽 위의 적병들은…… 그다지 많진 않은데? 하긴 여긴 남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이고, 딱히 전략적인 요충지도 아니니. 제대로 된 병력은 성도나 다른 요새에 집중되어 있겠지.’
아마 적들도 최대한 성에서 버티며 연합군의 진격속도를 늦추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일 것이다.
연합군이 부대 운용을 개판으로 하고 있지만 그래도 병력 규모의 차이가 나는 걸 보아하니,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했다.
“아군이 우세해 보이긴 합니다만 피해가 적지 않을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저희는 언제쯤 출진하는 걸까요?”
“흠. 글쎄요. 팔라딘들은 일단 대기하고 있으라 했으니…….”
후방에 머무르며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말에 교단 측 전력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제들이 천천히 돌아다니며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걸어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버프도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 느긋한 거 아닌가? 다른 부대들은 이미 성 앞까지 도달했는데.’
아무래도 교단 측 지휘부는 명예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기로 한 모양이다.
아군의 부대들과 같이 앞장서서 전공을 취하기보다는, 전세가 확실하게 기울어진 후에야 병력을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눈에 보였다.
‘끄응,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같은 편인데, 저쪽만 피 흘리며 싸우는 걸 구경하려니 양심이 찔리네.’
성기사들은 암흑교도들을 상대할 때 쓰여야 할 특수전력이기도 하니, 괜히 일반적인 전투에서 소모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긴 하다.
다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가 안전한 위치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아군 병사들이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뚫고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다.
다들 무장을 충실히 갖췄고 적병의 수가 비교적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아직까지 아군 측의 사상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고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성벽을 마주한 병사들은 사다리를 대고 갈고리를 던지며, 거대한 장애물을 넘기 위한 작업에 들어섰다.
“올라가! 빨리 움직여!”
“가장 먼저 성벽을 넘는 이에겐 두둑한 포상을 내리겠다!”
“으아아아-!”
사방에 떨어지는 화살, 장교들의 고함소리, 짤그락거리는 금속음.
정신이 반쯤 나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밀린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른다.
그런 공격자들을 얌전히 내버려 둘 리가 없는 적병들이, 전통적인 수성의 예법에 따라 모아놓은 돌무더기를 병사들의 머리 위로 퍼붓는다.
“아악! 내 눈!”
“끄아아악!”
성벽의 높이는 그 자체로 뛰어난 무기가 된다.
밧줄을 붙잡고 막 발을 올리다가 머리가 깨져 쓰러지는 병사.
방패로 머리를 가렸지만 돌멩이에 맞고 중심을 잃어, 사다리에서 실족해 낙사하는 병사.
시체를 시체로 덮는 피비린내 나는 무덤들이 여기저기 쌓여갔다.
영 수지가 맞지 않아 보이는 싸움.
그나마 그런 방해에도 아득바득 성벽을 기어올라, 기어코 꼭대기에 도달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으아아! 이 시부랄 것들아!”
“커억!”
“죽어어엇-!”
물론 힘들게 성벽 위로 올라서는 데 성공해도 고비는 끝나지 않는다.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적병들이 가하는 집중공격에 당해, 대부분의 병사들은 뭘 해볼 새도 없이 성벽 위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도 버티는 자들이 아예 없지만은 않았다.
“크하핫! 어느 놈이 내 앞을 막을 수 있겠느냐!”
“저쪽으로 길을 뚫겠소!”
목숨을 건 등반 끝에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전력들이 존재한다.
전신갑옷으로 빈틈없이 몸을 보호한 기사들은 적들의 집중적인 공세를 견뎌냈고,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번 후에 반격에 들어섰다.
숫자는 적지만 성벽 등반에 성공한 몇몇 기사들이, 착실하게 적들의 수를 줄여갔다.
“됐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라!”
“이야아아-!”
분위기가 반전되며 이대로 성벽을 함락시키는 건가 싶은 순간.
용맹하게 적들을 베어 넘기던 기사들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커억!”
“뭐, 뭐냐!?”
저주를 담은 사악한 힘이 퍼지며 기사들의 몸을 뻣뻣하게 굳게 만들었다.
이어서 어디선가 나타난 수십 마리의 망령들이 허공을 맴돌더니, 기사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고스트다!”
“제길!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곤란에 빠진 것은 성벽을 오른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성벽 아래 쌓인 시체 더미가 들썩거리더니, 죽은 자들이 일어나 주변의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끄아악!”
“뭐, 뭐야! 아군이 뒤에서 공격을…….”
“아냐! 저건 좀비들이다!”
“이익! 오지 마!”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아군 병력과 되살아난 좀비들이 뒤섞여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오니, 일부 병사들은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다.
‘성안에 네크로맨서가 있구나! 그래. 아무리 중요한 도시가 아니라도, 지키고 있는 암흑교도가 한 놈도 없다면 이상하겠지.’
알렉스의 고개가 교단의 전력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돌아갔다.
계속 미적거리고 있던 성기사들이지만, 사령술을 목격했으니 이제는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특한 존재를 멸하라!”
“예루스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예상대로 모르덴을 비롯한 각 교구의 단장들이, 성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기다리느라 지칠 지경이었던 알렉스와 이사벨도, 성기사들의 무리에 합류해 함께 이동했다.
말을 타고 돌격한 성기사들은 금방 성벽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안식으로 돌아갈지니!”
“언데드는 우리에게 맡기고 성벽의 공략에 집중하라!”
대언데드전의 스페셜리스트인 성기사들이 가세하자, 병사들을 혼란에 빠트렸던 좀비들은 빠르게 처리가 되었다.
다만 성기사들의 활약은 거기까지가 딱 끝이었다.
“위에 올라간 병력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평범한 무기로는 망령에게 피해를 줄 수가-”
“어허, 굳이 우리가 무리하게 성벽을 오를 필요까진 없네. 다른 언데드 몬스터가 더 나타날 수도 있으니, 주변을 돌면서 아군의 뒤를 봐주고 있도록 하지.”
밧줄과 사다리에 죽어라 매달려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사들의 모습은 남의 일이라는 듯, 교단의 수뇌부들은 누구 하나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기껏 병사들 목숨을 버려가며 기회를 만들어놨는데, 여기서 또 몸을 사리자고? 위에 올라간 기사들이 당해 버리면 여태까지의 공격이 그냥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알렉스는 그냥 이들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통하지도 않을 말씨름을 할 바에야 혼자라도 올라가서 아군을 돕는 편이 낫다.
“킹. 너 혹시 성벽을 타고 달리는 능력 같은 건 없냐?”
푸히힝?
혹시나 싶어 내뱉은 말에, 킹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래…… 내가 과한 기대를 좀 했다.”
킹의 등에서 내린 알렉스는, 누군가가 걸어놓은 밧줄을 붙잡고 성벽을 올라갔다.
어차피 자신은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지도 않으니, 안위를 걱정하며 몸을 아낄 필요가 없다.
투둑!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로프가 끊어지며 알렉스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고 워낙 몸이 튼튼한 덕분에 그다지 충격은 없었다.
다만 급한 마음에 짜증이 조금 일었다.
“염병할!”
“알렉스 경!”
“후우, 괜찮습니다. 이 정도론 다치지 않으니 걱정 말고 비켜주십시오.”
다시 다른 로프를 찾아 움직이려 했는데, 이사벨이 앞을 막아서고 비켜주지 않았다.
“이사벨 경?”
“제가 있는데 왜 따로 힘쓰는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업히세요. 그게 더 빠를 겁니다.”
“아?”
몸을 돌려 등을 내미는 이사벨의 행동에, 알렉스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사벨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남자로서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하지만, 이미 전에도 한번 해봤는데 두 번을 못할 이유가 없다.
알렉스는 홀린 듯이 작지만 듬직한 이사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폴짝 뛰어올라 그녀의 등에 매달렸다.
“갑니다!”
막대한 신성력의 유동이 느껴짐과 동시에, 이사벨의 머리카락이 찬란한 백금빛으로 물들었다.
디바인 익시드의 발동.
알렉스를 탑재한 이사벨이 성벽을 향해 뛰어올랐다.
사다리나 갈고리 로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몇 미터를 뛰어오른 이사벨은, 성벽에 손가락을 푹푹 꽂아 넣으며 거침없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뭐지? 손이 닿는 곳마다 구멍이 숭숭 뚫리네.’
분명 단단한 벽돌을 쌓아 만든 성벽일 텐데, 사실은 색만 칠해놓은 스티로폼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근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이 정도면 그냥 평지를 걷는 것보다 빠르지 않나?’
십여 미터가 넘는 높이의 성벽을 이사벨이 타고 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채 5초가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성기사의 등에 매달린 성기사가 성벽 위로 올라섰다.
성벽을 사수하던 적병들의 입장에선 꽤나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