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5화
성전
그간 남서부에서 일어났었던 크고 작은 혼란들은 사실 눈속임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음지에 숨어 치밀한 계획을 준비해 온 암흑교의 저력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었다.
중앙 관구의 팔라딘들을 파견하며 교단의 눈길이 남서부에 쏠려 있는 동안, 암흑교는 동부 왕국의 귀족사회를 잠식해 들어갔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교도의 사술이 사람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사회지도층을 장악한다고 해서 국가 전체가 배교 집단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요?”
“저도 그 부분이 의아하긴 합니다만…….”
알렉스는 이사벨의 의문에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이 세상이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는 신분제가 확고한 세계라고 하지만, 종교라는 것은 그런 계급조차 초월한 영향력을 가진다.
소수의 귀족들이 이미 유일신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예루스를 부정한다고 해봐야, 밑의 사람들이 그걸 얌전히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이다.
기실 교황이 직접 성전을 선포하며 나설 일도 없어야 했다.
국가의 지도층이 예루스 교단을 부정한다?
민중봉기가 일어나 왕실을 무너뜨리고, 암흑교에 세뇌당한 귀족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동부의 어느 한 곳도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들었어. 설마 암흑교는 일반 국민들 하나하나까지 전부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는 건가?’
알렉스의 머릿속에 자신이 쓰러뜨려야 했던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 대단한 수준도 아니었던 흑마법사 한 사람이 천명의 군대를 조종하던 모습.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했다.
제아무리 암흑교가 흑마법으로 사람을 세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수십 수백만 명의 인구를 전부 조종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을 리가.’
“후우. 저희끼리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의미가 없겠군요.”
암흑교가 무슨 수로 동부 지역을 완벽히 집어삼킨 것인지 추측해 보고 있자니, 이사벨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교황 성하께서 명령을 내리셨으니, 의혹을 거두고 따라야만 하는 것이 옳겠지요.”
교단에선 동부에 위치한 네 개의 국가를 징벌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성전을 위해 모여든 군대는 그들의 영토를 짓밟고 들어가, 국가지도층을 비롯해 죄악에 가담한 모든 인원들을 남김없이 처단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죄 없이 휘말려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발생할 수도 있을 터.
성기사의 신분으로서 교단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사벨이지만, 아무래도 그런 부분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무슨 대화를 하기에 이리 분위기가 무겁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알렉스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음.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르덴 경.”
소속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알렉스와 이사벨은 올리머츠 교구의 성기사단에 잠시 의탁하여 성전에 참가했다.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올리머츠 교구의 성기사단장으로, 임시긴 하지만 지휘권을 가진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사벨과 단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있어도 괜찮았지만 이제는 타 교구의 단장이 끼어든 자리이기에, 알렉스는 괜히 트집을 잡히지 않도록 말을 아꼈다.
“팔라딘은 외부에 이름이 알려지는 경우가 드문데, 듣자 하니 두 사람은 여기저기서 꽤나 명성을 쌓았었나 보더군?”
올리머츠 교구를 비롯해 남부의 교구들이 참여한 연합군에는, 알렉스의 지난 활약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판디움에서 히드라를 격퇴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었으니,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하다.
“동부의 국경을 넘어선 뒤로 꽤 시간이 흘렀으니, 언제 적들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거요. 본래의 소속이 다르다 보니 두 분은 기사단 내에서 겉도는 느낌이 있는데, 전투상황에서는 함부로 나서지 말고 본인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주면 좋겠소.”
“그리 하겠습니다.”
모르덴은 약간 권위적인 태도로 두 사람을 대했다.
본인의 휘하에 있는 알렉스와 이사벨이, 자기보다 훨씬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점에 부담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지휘권이라고 해봐야 허울뿐인 권한인데, 뭘 그리 자존심을 세우려고 안달인지.’
동부와 인접한 덕분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올리머츠 교구는, 남부에서 올라온 연합군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여러 국가와 교구들이 뒤섞여 있는 집단인 만큼, 지휘체계를 완벽히 하나로 통일시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연합이란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여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수십 개의 세력이 개별행동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별것 아닌 알력다툼 따위로 힘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알렉스는 그와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도록 가능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어차피 실제로 급박한 전투상황에 돌입하게 되고 나면,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없을 것이다.
“적이다!”
“오백에서 육백 사이. 전원 경무장한 보병으로 다른 병과는 보이지 않습니다.”
“식후 운동거리도 안 되는 수준이겠군. 진격하라!”
알렉스의 그런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연합군은 징벌 대상으로 삼은 동부국가의 병력으로 보이는 군대를 마주치기 무섭게, 제대로 된 작전수립도 없이 멋대로 뛰쳐나가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얼씨구.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서로 같은 곳으로 돌진하다가 대열이 엉켜 무너지는 보병대들이 있는가 하면, 지휘관끼리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아군이 지나가는 자리에 오인사격을 가하는 궁병대도 있었다.
두개골 안의 내용물을 분실하진 않았는지에 대한 걱정과, 조상 중에 견공의 혈통이 섞여 있음을 확신하는 지적들이 사방에서 빗발쳤다.
그래도 병력의 양과 질에서 큰 차이가 있다 보니, 남부 연합군의 첫 전투는 무난한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굳이 나설 필요도 없어 보여 뒤편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던 알렉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엉망으로 싸우는 연합군의 행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암흑교도로 보이는 놈이 없잖아?’
지난번 흑마법사처럼 군대를 조종하는 암흑교도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전투가 끝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없었다.
사이한 마법을 발현하는 징조가 나타날까 싶어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하고 있던 알렉스로선, 상당히 김빠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미 세뇌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던 건가? 하지만…… 그렇다 쳐도 왜 이런 무의미한 병력 소모를?’
암흑교 놈들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전투가 끝났으니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으려나? 포로들을 심문한다면…….’
알렉스는 당연히 적측의 생존자를 잡아서 심문하는 행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쭉 지켜보고 있자니 그런 낌새는 전혀 없이, 아군 병사들이 전장을 돌아다니며 숨이 붙어 있는 적들을 착실히 제거하고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아니…… 하나라도 살려서 정보를 얻어야 하지 않나?’
알렉스는 급히 올리머츠 교구가 이끄는 병력들을 찾아, 지휘관인 모르덴에게로 다가갔다.
“모르덴 경. 적병을 심문해서 정보를 캐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뭐가 있소?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수도까지 밀고 들어가, 죄악의 뿌리를 남김없이 뽑아내면 그만이오.”
“예? 하지만 적들이 어떤 함정을 파고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진군하겠다는 말씀은-”
“어허! 성기사와 사제들만 해도 기백 명이 넘고, 각국의 정예병과 기사단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게 보이지도 않소? 이교도들이 아무리 수작질을 부린다고 해도, 우리 징벌군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소.”
“아니, 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그만하시오. 북부나 서부는 물론이고 중앙 관구에서 주도하는 징벌군보다 한발 앞서서, 우리 남부의 연합이 배교자들의 주축을 심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들 이야기를 마친 상태요. 괜한 시간 낭비는…… 아! 알렉스 경은 원래 소속구가 서부 지방에 있으니, 우리 쪽의 계획이 그리 마음이 동하지 않겠군?”
자신의 의견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모르덴의 모습에, 알렉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망할. 생각이란 게 없는 건가? 누가 먼저 공적을 세우느냐가 그리 중요해?’
물론 전쟁을 오래 끄는 것보단 빨리 끝내는 것이 좋기는 하다.
그렇지만 필승을 자신하고 무작정 빠르게 병력을 밀어 넣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자세냐고 물으면 찬성하기 어려웠다.
‘암흑교가 수백 년을 숨어 지냈다고 해서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닐 텐데.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으면 평상시보다 더 주의해야 하지 않아?’
오합지졸처럼 질서 없이 싸우는 꼴은 마음에 안 들긴 해도, 확실히 병력의 차이는 연합군 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반 병사들을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고, 아직 암흑교의 주 전력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
물론 이쪽도 교단의 전력이 모여 있으니 뭐가 되었든 쉬이 밀리지는 않겠으나,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병력을 밀어 넣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본신의 실력이야 어쨌든 일반 성기사 단원에 불과한 알렉스는, 지휘부의 의견에 반발한다 해서 딱히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는 신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 상황에 이사벨과 단둘이서만 움직인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으니, 알렉스는 별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아군의 무조건적인 진격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문제가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 * *
“어째서 보급대가 오지 않는 게요!”
“이러면 당장 내일부터 배식량을 줄여야 하지 않소! 열 번 패배한 군대보다 한 끼를 굶은 군대의 사기가 더 떨어진다는 것을 모르시오!?”
“끄응.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도 아닌데,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암흑교에 손에 넘어간 동부의 네 국가 중 하나인 루미츠 왕국.
남부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목표로 삼았던 루미츠 왕국의 첫 도시의 앞에서, 연합군은 행진을 멈추고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왔어야 할 보급부대가, 한참이 되도록 나타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빠른 진군을 위해 병참을 최소화한 상태로 이동했던 연합군의 입장에선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보급물자가 도착하는 대로 공성전에 돌입할 생각이었던 연합군은, 임시로 세운 주둔지에서 손가락만 빨며 가만히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고 나서야, 지휘부는 후방에서 보내온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보급부대가 궤멸?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아니 그게 무슨 고블린 부랄 빠는 소리야!”
“적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오?”
충격적인 소식에 연합군 전체가 휘청거렸다.
“그것이…… 수백의 언데드 몬스터가 보급부대를 덮쳤다고 합니다.”
“언데드? 그런 것이 있었다면 우리가 보지 못했을 리…… 아니, 설마?”
지휘부 인원들의 뇌리에, 연합군이 짓밟고 지나온 적국의 병사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를 막아서고 있던, 처음으로 조우한 보병 부대.
그들의 목적은 연합군 본대의 발길을 늦추는 게 아니라, 언데드로 되살아나서 본대를 지원하는 보급선을 끊는 것이었다.
“보급로가 확보되지 않고선 전쟁을 치를 수가 없소!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목표를 코앞에 두고 아무 성과도 없이 물러나잔 말인가! 다른 지방의 연합군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남부에는 병신들만 모여 있다고 신나게 떠들겠군!”
지휘부의 의견이 둘로 갈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언데드들을 처리하고 다시 처음부터 정비를 갖추자는 의견과, 최대한 빨리 성을 점령하고 도시 내의 물자로 자체적인 보급을 하자는 의견.
급박한 시간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도 아니니,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전자를 선택해야 옳았다.
하지만 어떻게 싸워도 질 리가 없다는 자신감과 빠르게 공적을 세우고 싶다는 욕심이, 무리하게 여겨지는 후자의 선택에 더 많은 표를 던져주었다.
남부 연합군 지휘부는 그대로 공성전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본인들조차도 이게 올바른 선택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원하던 대로 성전에 참여한 모든 연합군을 통틀어 가장 빠르게 도시 점령을 시도한 전투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