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4화
격전지(4)
넋을 놓고 있는 흑마법사를 향해, 알렉스가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을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엔 정신이 나간 행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흑마법사가 혼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직 그의 주변엔 500에 달하는 병력이 남아 있었으니까.
아무리 중무장한 기사와 경보병의 수준 차이가 극명하다 해도, 혼자서 500명을 상대하겠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평범한 병사들이라면 당연히 무리겠지.’
그러나 무모한 행동처럼 보여도 알렉스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저 흑마법사는 고위의 악마로 보이는 존재를 소환하기 위해 병사들을 제물로 바쳤다.
자신이 흑마법의 원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물이라는 것이 사전준비도 없이 주변에 있는 아무 사람이나 잡아넣는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아님은 알고 있다.
정상적인 개인의 의지가 아닌 마법에 의한 세뇌 때문이겠지만, 흑마법사가 조종하는 병사들은 이미 악마숭배의 맹약을 거친 자들일 터.
이미 악마의 소유물이라는 낙인이 찍힌 먹잇감들이기에, 거창한 의식을 치르지 않고 간단한 주문만으로도 제물로 바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암흑교도와 평범한 인간의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겠으나, 어쨌거나 병사들은 전부 어둠의 속성을 몸에 품고 있는 타락한 자들이란 소리.
그리고 앞을 막는 상대가 그런 성향을 가진 존재라면, 알렉스에겐 꽤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패가 하나 있다.
“주, 죽여! 저놈을 죽여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흑마법사가 알렉스를 막기 위해 병사들을 움직였다.
몸을 던져 앞길을 막아서는 병사들에 의해 알렉스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방어력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알렉스지만, 수백 명의 인간이 몸으로 세운 벽을 뚫고 지나갈 정도의 돌파력은 가지고 있지 않기에.
적병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고 고통에도 위축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통과하기 힘든 방해물이 되었다.
천천히 힘을 잃던 알렉스의 돌진은 결국 흑마법사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바보 같은 놈! 그대로 깔려 죽게 만들어 주마!”
수백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된 알렉스를 보며, 여유를 되찾은 흑마법사는 다시금 비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먹이에 달라붙는 개미떼처럼 뭉친 병사들 사이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는.
[디바인 크로스]
일반인에게는 디바인 크로스로 발생하는 빛의 폭발이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기껏해야 눈이 부셔서 잠깐 시력저하가 온다거나, 화상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살짝 데는 것이 고작.
하지만 대상이 어둠의 힘을 품고 있는 존재라면, 효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알렉스를 에워싼 병사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힘없이 떠밀려 나가떨어졌다.
‘역시 암흑교 놈들을 상대로는 이보다 효과적인 스킬이 없군.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필요도 없이 그냥 내 선에서 정리가 되겠어.’
대부분의 병사들이 이 한 번의 공격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무력화되었다.
어둠을 심판하는 빛의 힘에 의해 그대로 즉사하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것이다.
적들이 알렉스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 뭉쳐 있던 탓에, 스킬의 효과는 더 극대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바깥 부분에 위치해 있어 피해가 덜한 일부 병사들도, 부상이 심했기에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예루스의 종놈 중에 이런 능력을 가진 것들은 분명…….”
“아가리 그만 놀리고 모가지 딱 내밀어라. 버러지 같은 새끼야.”
억울하다는 듯이 머리를 잡아 뜯으며 악을 쓰는 흑마법사를 향해, 알렉스는 성검을 뽑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상극의 속성과 스킬들 덕분에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덤벼든 병사들도 결국은 암흑교에게 농락당한 피해자들이지 않은가.
악마의 제물로 선정된 타락자들을 되돌릴 방법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지만,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심판을 받아야 할 놈은 저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흑마법사 한 마리뿐이다.
“이노옴!”
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흑마법사의 몸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튀어나와 알렉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흑마법사가 사역하는 악령의 일종이다.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악령의 귀곡성을 코앞에서 들었지만, 알렉스는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영체 형태의 몬스터는 평범한 사람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타격을 줄 방법이 없어 굉장히 위험하지만, 알렉스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가까이 접근해 공격을 가하려는 악령에게 벌레라도 때려잡듯 무심하게 성검을 휘두르자, 악령은 단칼에 반으로 갈라지며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이이잇!”
다급해진 흑마법사가 어둠의 힘을 끌어모으며 알렉스를 향해 마법을 날렸다.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 화살이나 약화의 저주, 눈속임을 위한 환영 등이 연달아 나타났다.
물론 그런 짧은 시전 시간을 통해 완성된 주문들은, 알렉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질 않았다.
서걱.
“그륵...”
빛의 칼날이 허공에 선을 그리며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가던 흑마법사의 목을 베어냈다.
소량의 경험치가 올랐다.
적의 생명이 다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
알렉스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흑마법사의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손쉽게 승리를 가져왔지만,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암흑교도는 이놈 하나가 전부인가? 하지만 이런 녀석이 혼자서 어떻게? 경험치를 봐서는 레벨이 아주 높은 놈은 아니야. 60이나 겨우 넘으려나?’
흑마법사는 아주 잠깐이지만 상급의 악마로 추정되는 존재를 이곳의 공간과 연결했다.
고작 60대 레벨의 흑마법사가 그런 능력을 갖추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대량의 제물을 준비해 바치기도 했고, 놈이 소모한 해골 지팡이가 최고급의 아티팩트라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악마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병사들을 조종한 것도 의문이다.
세뇌처럼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은, 정신력이 평범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도한다 해도 상당한 난이도를 가진다.
정신간섭에 한번 성공했다고 해서 영원히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두 자릿수 정도의 집단을 움직이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전쟁으로 내몰 정도의 통제력을 갖춘다?
고위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적어도 나보다 더 높은 레벨의 실력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로 보이는데.’
알렉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70대 후반, 어쩌면 80레벨 이상.
최소한 암흑교의 장로급은 되는 인물이 나서야, 이만한 일을 주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알렉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근처에서 딱히 다른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2단계 성과 보상이 지급됩니다.]
[잔여 스킬 포인트 2]
‘으응?’
뜬금없는 알림에 놀란 알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과 보상? 아…….’
그러고 보니 오래전부터 퀘스트창을 차지하고 있던 항목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활동에 접어든 암흑교를 저지하라는 내용의 퀘스트.
[빛을 잠식하는 어둠]
‘자세한 내용도 없이 그냥 단계별로 보상을 지급한다고만 되어 있었지. 한참 동안 별다른 반응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1단계 보상을 받은 뒤로 꽤나 시간이 지났고 그간 암흑교와 몇 번 더 연관되기도 했었는데, 이제야 2단계 보상의 기준을 충족한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스킬 포인트가 2개나 생겼기에, 알렉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그기기긱!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알렉스의 주의를 끌었다.
시선을 돌리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을 열고 말을 탄 기사 몇 사람이 몰려나오는 것이 보인다.
“알렉스 경!”
이사벨이 무리에 섞여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올리머츠 교구에서 지원을 나온 팔라딘들인 듯했다.
“어째서 혼자 성 밖에…….”
“아니, 그보다 홀로 이 많은 인원을 쓰러뜨린 건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까이 다가온 팔라딘들이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을 목격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알렉스를 힐끔거렸다.
알렉스는 발밑에 있는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키며, 그런 그들에게 지금껏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흑마법사! 저주받을 이교도가 군대를 조종했다는 소리인가?”
“동부 왕국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참 한심한 일이군. 이 지경이 될 동안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지 않나.”
“그쪽만 욕할 문제도 아니지 않소? 동부 지역의 형제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야기를 들은 성기사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동안, 알렉스는 면목 없다는 듯이 울상을 짓고 있는 이사벨에게 다가갔다.
“알렉스 경. 또 혼자 어려운 싸움을 하신 모양이군요. 저도 차라리 곁에서 도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이사벨 경을 보낸 것은 제 의견이었는데요. 수비군 병사가 전령이었다면 교구에서 바로 반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쩌다 보니 도움을 받기도 전에 전투가 종결되긴 했지만, 당시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리고 아직 사건은 끝난 게 아닐 수도 있다.
미심쩍은 구석을 몇 가지 느낀 것도 그렇고, 어쩌면 이번 일은 암흑교가 꾸미는 거대한 음모의 시작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오늘 올리머츠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분간 더 여기 머무르며 소식을 알아봐야겠군.’
암흑교와 부딪치는 일이라면 자신이 빠질 수 없다.
성기사의 능력이 가장 돋보이는 순간이, 바로 암흑교도들과 전투를 벌이는 때이지 않은가.
알렉스는 이곳에 있다 보면 조만간 다시 자신이 활약하게 될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올리머츠에서 대기하던 알렉스는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규모는 상상했던 것과 조금 많이 달랐다.
* * *
동부 지역의 한 왕국이 전대미문의 성명을 공표했다.
예루스 교단을 더 이상 유일한 종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유의 사태에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당황하며 교단의 반응을 숨죽여 주시했다.
각국의 지도층들은 곧 교단이 움직여 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교단에서 어떤 조치가 떨어지기에 앞서, 동일한 내용의 선언이 몇 차례나 뒤를 이었다.
전부 동부 지역에 속해 있는 왕국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각 나라에서 보낸 사절들이 동부 지역을 쉴 새 없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 대륙 전역의 모든 국가를 향해 교황청으로부터의 연락이 전해져 왔다.
-주 예루스를 따르는 자들이여, 배교자를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라.
교단은 동부의 왕국들을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성전을 선포했다.
동부를 제외한 전 지역의 국가들이, 교단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들의 군대를 파견했다.
기사와 병사, 수천 단위의 병력이 신의 깃발 아래 모였다.
역사를 수백 년쯤 거슬러 올라가도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