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3화
격전지(3)
저걱, 쿵. 저벅, 쿠웅.
군홧발로 대지를 짓밟는 소리들이 하나로 뭉치며, 거대한 생물이 다가오는 듯한 기척을 만들어낸다.
숫자가 천에 이르는 군대가 열을 맞춰 행진해 오는 모습은, 성벽을 사수하기 위해 모여든 수비군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병력만으로 수성이 가능할까?’
장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수적으로 상당히 열세이다 보니 다들 두려운 기색이 가득하다.
올리머츠는 변경백령이 되기엔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어 자작 가문이 다스리는 도시이지만, 타국의 국경과 가까운 영지이기에 백작령에 준하는 군사권 및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접한 국가인 루미츠 왕국과 알바니아 왕국이 본국과 오랜 세월 동맹에 가까운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영주는 권한이 있음에도 군사력의 증강을 위한 투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도시에 주둔한 상비군의 숫자는 겨우 100여 명을 유지하는 정도.
그나마 정체불명의 군대가 목격되었다는 보고에 급히 징집병을 끌어모아, 현재 수비군의 병력은 200명을 살짝 넘어선 상태이긴 했다.
‘믿을 건 올리머츠 교구의 참전뿐이로군.’
4배가량 차이가 나는 아군과 적군의 병력 수에 한숨을 내쉬며, 알렉스는 신전이 위치해 있는 방향을 향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졌고, 이제 이 전투는 교단이 총력을 다해 해결해야 할 크나큰 사건이 되어버렸다.
도시 내에 있는 성기사와 사제들이 가세하고 수성의 이점을 살린다면, 머릿수에 차이가 난다 해도 적들을 격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
알렉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곁에 있던 이사벨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사벨 경. 곧장 신전으로 가서 방금 본 상황을 전하십시오. 설마 사제들이 공격당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 사람은 없을 테니, 아마 다들 느긋하게 사절이 돌아오길 기다리고만 있을 겁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서둘러서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오도록 하지요.”
사제들의 죽음을 지켜본 이사벨은 당장에라도 적들에게 뛰어들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으나, 알렉스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착실히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 교단에서 나서준다면 저 무도한 자들을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겠구려.”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얼어 있던 장교가 약간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사제마저 무참히 살해하는 정체불명의 군대와 싸워야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대신 교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다행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알렉스는 다가오는 적군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거리가 가까워져 이제는 저쪽의 병력 구성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다행히 충차나 파성탑 같은 본격적인 공성병기는 보이지 않는군.’
보아하니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보급만으로 이곳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상대에게 성문을 뚫거나 성벽 자체를 무너뜨릴 공성 수단이 없다는 건 안도할 만한 일이다.
사다리나 갈고리 밧줄 같은 휴대용 장비만으로 공략을 시도한다면, 수적으로 열세라고 해도 충분히 수성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알렉스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이리 조용해?’
아군 병사들은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긴장감을 표출하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질 지경인 반면, 상대 진영은 기이할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흥분에 취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앞서는 병사나, 반대로 딱딱하게 굳어 뒤처지는 병사가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며 돌아다니고 있어야 할 장교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그저 묵묵히 도시를 향해 다가올 뿐인 저들의 태도는, 도저히 전투를 코앞에 둔 군대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양새였다.
발걸음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하기 짝이 없는 행진.
마치 거대한 인형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형? 설마…… 언데드?’
그런 의심이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알렉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 사이로 한두 명이 섞여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전원이 언데드로 이루어진 군세였다면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물량이 천에 가까운 언데드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성기사인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저 비정상적인 분위기는 대체 뭐지?’
“사격 준비!”
알렉스가 적들의 기묘한 모습에 의아해하고 있는 동안.
성벽 위에 도열한 궁수들이 장교의 지휘에 따라 시위를 당겼다.
적이 성벽에 다다르기 전에 원거리 공격으로 최대한 피해를 입혀놓는 것은, 수성전을 벌이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취해야 하는 행동이다.
“발사!”
적병들이 점점 가까워지며 활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서자, 거리를 재고 있던 지휘관이 궁수들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다.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진격하는 적들의 전열 일부가 무너진다.
“……뭐야?”
전황을 지켜보던 알렉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려 소리를 내었다.
상대 진영의 대응이 너무나도 괴상했기 때문이었다.
진군하던 적들이 병력을 반으로 나누었다.
그러고선 한쪽의 병력은 화살이 닿는 범위 바깥으로 물러나더니,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서 날아드는 화살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자신들을 표적으로 삼아달라는 듯한 행동이었기에, 알렉스는 물론이고 수비군을 지휘하는 장교 또한 잠시 당황하여 병사들의 통제를 잊고 말았다.
“사, 사격! 각자 준비되는 대로 발사하라!”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지휘관이 명령을 내림에 따라, 궁수들이 가만히 멈춰선 적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려 보냈다.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적의 숫자를 줄일 수 있는 기회이니, 일단은 쏘고 봐야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다.
적들의 머리 위로 화살이 끊임없이 퍼부어졌다.
‘……기괴하네.’
마치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병들은 화살이 자신의 몸을 꿰뚫는 동안에도 비명은커녕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멍하니 이쪽을 응시했다.
허수아비라도 된 듯이 서 있는 절반의 적군 중, 화살에 맞아 죽은 적들의 수가 어느덧 살아 있는 이들보다 많아졌을 때쯤.
“으윽.”
갑작스레 알렉스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렸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적들이 있는 방향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의 눈이 병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를 포착했다.
해골이 장식된 지팡이를 허공에 휘저으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남자.
끈적끈적한 어둠의 마력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어 거세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흑마법사! 역시 암흑교의 수작이었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긴 했었다.
예루스 교단의 사제를 살해하는 자들이라니,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집단은 암흑교가 유일무이하다.
상대측 병사들의 이상한 행동과 분위기도 이제는 납득이 갔다.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움직이는 병사들.
아마 강력한 세뇌나 최면 같은 능력에 당해 조종당하는 것이리라.
무언가 사악한 마법을 준비하는 것인지, 암흑교도가 미친 듯이 지팡이를 흔들 때마다 어둠의 마력이 점점 더 진하게 뭉쳐진다.
‘막아야 하는…… 망할, 방법이 없잖아.’
몇 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상대를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 알렉스에겐 없었다.
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알렉스가 이를 갈며 응시하는 가운데, 흑마법사의 지팡이에 달려 있던 해골이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이 부서졌다.
이윽고 흑마법사는 망가진 지팡이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오오! 위대한 심연의 군주시여! 당신의 종복이 바치는 제물을 취하시고 이곳에 임하소서!”
온몸에 해골 파편이 박혀 피가 맺히고 있음에도, 흑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환희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는 무방비하게 화살에 맞아 죽어 작은 동산을 이룬 시체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어느 순간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느낌을 풍기며 나타난 새까만 어둠이, 시체들의 위로 불길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크윽!’
어둠을 바라본 알렉스는 귓속을 파고드는 이명과 함께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무언가 압도적으로 거대한 존재가, 어둠 너머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빨려드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알렉스는 어둠 사이로 흰색의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의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크기와 생김새를 가진 한 개의 손가락이었다.
파지지직!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었다.
어둠에 대비되는 새하얀 손가락 끝에서, 마치 벼락을 하나로 뭉쳐 만든 듯한 구체가 나타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따가운 청백색의 구체는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지름이 1미터쯤 되는 크기로 불어났다.
빠직! 프지짓!
사방으로 스파크를 튀기며 존재감을 뿜어내던 구체가 성문을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성벽 위에 집결해 있던 모두가 홀린 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알렉스는 본능이 시킴에 따라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쓰읍. 저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버렸네.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벌써 두 번째인가.’
발바닥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충격에, 어지러웠던 정신이 다시금 또렷해진다.
알렉스는 성문을 향해 서서히 날아오고 있는 구체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저것이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고위급으로 보이는 흑마법사가 몇백 명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불러들인 존재.
지금은 사라졌지만 아까 그 어둠 너머에 있던 것은 아마도 마계의 악마, 그중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 상급의 악마였을 것이다.
고작 손가락 하나를 들이밀었을 뿐이지만, 그런 강대한 존재가 내보인 마법의 위력이 하찮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진다. 성문 따위는 단숨에 소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적들의 수가 아직 500명 정도는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교구의 지원이 오기도 전에 벌써부터 성문이 뚫리면 곤란하다.
인간성을 잃고 꼭두각시가 된 저쪽의 병사들이 도시로 들어오게 되면, 본인들의 죽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게 될 것이다.
알렉스는 방패를 들어 올리며 일직선으로 천천히 날아오는 구체의 앞을 막아섰다.
“크흣! 저런 멍청한 놈! 프하하하학-!”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흑마법사가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리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방패 하나에 의지해 저 위대한 존재가 발한 힘을 막아서려 하다니.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고도 멀쩡한 모습은 제법 놀랍긴 했으나, 그래 봐야 마법에 무지한 머저리일 뿐이다.
흑마법사는 저 기사가 구체에 닿는 순간 티끌조차 남지 않고 소멸해 버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생각은 충분히 합당한 것이었다.
물론 알렉스의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파지지직-!
청백색의 구체가 알렉스의 방패와 맞닿으며 한층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구체가 품고 있던 막대한 에너지는 사람 하나쯤은 단숨에 녹여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앞을 막아선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랬을 것이란 이야기다.
[굳건한 태세]
방어능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굳건한 태세 스킬은, 물리적인 피해뿐 아니라 마법에도 상당한 저항력을 갖추게 만들어준다.
괜히 탱커형 성기사의 밥줄 스킬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으로는 저 위력적인 마법을 막아내기에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의 방어 스킬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스펠 가드]
과거 암흑교의 장로였던 네크로맨서 케네스를 상대하느라 3레벨까지 찍어두었던 스펠 가드 스킬.
마법으로 입는 데미지를 감소시켜주는 스펠 가드의 효과가 굳건한 태세의 방어능력과 중첩되며, 알렉스에게 상당한 마법저항력을 갖추게 만들어주었다.
[천상의 가호]
거기에 더해 얼마 전 새롭게 익힌 버프계열의 방어 스킬인 천상의 가호까지.
사실상 현 상태의 알렉스를 한순간에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마법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파지짓, 지직!
“크으윽.”
지짓, 프시식.
“흐으. 따끔하구만.”
무시무시한 힘을 품고 있던 마법의 구체는 극한까지 끌어올린 마법저항력마저 뚫고 알렉스에게 자극을 가했지만, 부상이라고 하기엔 미묘한 피해만을 입히고 사라지게 되었다.
알렉스는 살짝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는 흑마법사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아까 그놈 또 한 번 불러볼 테냐? 아, 이제 지팡이가 없어서 무리인가?”
큰 충격을 받았는지 흑마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