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2화
격전지(2)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무렵.
알렉스는 소란스러운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뭐야. 벌써 아침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숙소 바깥으로 나오자, 등불을 들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뭔가 문제가 터졌음을 눈치챈 알렉스는, 마침 안면이 있던 바룬 사제가 지나가는 게 보여 그에게로 다가갔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아, 어제 방문하신 형제님이시군요. 그것이…….”
바룬 사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던 알렉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속 불명의 군대가 지척까지 다가왔단 말입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저희 교구의 입장이 꽤 곤란해졌습니다.”
인구수가 일정 규모 이상이 모여 도시를 이루면, 자연스럽게 신전이 들어서고 교단의 성직자들이 발령되게 된다.
도시는 그 땅의 적법한 주인인 영주 가문에 의해 통치되지만, 신전은 도시에 속해 있음에도 치외법권의 구역이 되어 자율적인 행동을 보장받는다.
종교가 통일된 이후로 그것은 암묵적으로 고정된 불변의 법칙이었다.
이것은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룰이 유지되기 위해선 도시가 전란에 휩싸여도 성직자들이 어느 한쪽에 관여하지 않고,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긴 하다.
“이런 비상식적인 군사행동은 처음 겪는 상황인지라 다들 당황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관구청에 연락을 넣어 의견을 구하고 있지만 당장 저쪽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그동안 대륙 각지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쟁에서, 교단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
교단은 언제나 분쟁을 말리는 중재자가 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공정한 심판원의 역할을 맡아왔다.
적어도 싸움에 휘말리는 애꿎은 희생양의 처지에 놓일 일은 없다는 소리.
그럼에도 올리머츠 교구가 혼란에 빠진 것은, 그만큼 저쪽 상대방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귀족들의 풍조나 교단과의 전통적인 관례를 싹 무시하고 나타난 소속 불명의 군대.
혹시나 상식을 벗어난 교전이 벌어진다 해도 설마 교단의 분노를 사는 행위를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올리머츠 교구의 입장에선 긴장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이가 칼을 들고 돌아다니면, 근처에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음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교구에선 아직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겁니까?”
“교구장께서 대사제분들을 모아 논의를 하고 계십니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이해관계의 조정이 끝날 때까지 신전을 봉문하는 것이 원칙이겠습-”
“주임사제님. 윌리암 대사제님께서 이것을…….”
“-음? 이리 주시게나.”
젊은 사제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와 대화에 끼어들더니, 바룬 사제에게 무언가 서류 같은 것을 전달했다.
내용을 확인한 바룬 사제는 그것을 접어 품에 넣고는 알렉스를 향해 다시금 말을 건넸다.
“논의를 막 마친 모양이군요. 아마도 저쪽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교구에서 사절을 파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지금 신전을 벗어나 바깥으로 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여러모로 의문투성이인 사태입니다만, 당장 교전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설마 사제를 공격하지는 않겠지요. 아무튼,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형제님께서는 저희 교구의 팔라딘분들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전쟁이라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면 신전 구역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서 교단의 무력집단인 팔라딘들이 투입될 테니, 바룬 사제의 말은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일찌감치 그쪽에 합류해 있으라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멀어지는 바룬 사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여기 계셨군요.”
“이사벨 경.”
잠에서 깨자마자 급하게 알렉스를 찾아 나섰는지, 머리카락 한쪽이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는 이사벨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분위기가 어째 이상한 것 같아서 알렉스 경을 찾고 있었습니다. 혹시 어제의 그 이야기 때문입니까?”
“예. 저도 막 사정을 들은 참입니다.”
알렉스는 바룬 사제와의 대화를 요약하여 이사벨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사벨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전쟁사를 조금 공부했었습니다만 이런 식의 군사행동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군요. 만약 이대로 개전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저들은 대륙 전 국가들의 비난을 한 몸에 사게 될 겁니다. 교단에서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테고요.”
“으음…….”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알렉스는 이내 이사벨에게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성벽 쪽으로 가볼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예? 성벽은 지금 수비대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을 텐데요? 지금은 준전시상황이니 가벼운 접촉조차도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다간 교단의 개입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싫으시면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아앗!? 가, 같이 갑니다!”
허둥거리며 따라붙는 이사벨을 뒤로 하고, 알렉스는 굳은 얼굴로 신전을 나섰다.
아직은 봉쇄가 되기 전이라 그들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느낌이 너무 안 좋네.’
성벽이 있는 방향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알렉스는 마음 한구석에 일어나는 묘한 두근거림에 의문을 품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해도, 교단 소속인 자신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신전에서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 가슴 한편에서 이리 서늘한 느낌이 드는 걸까?
알렉스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군대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사벨의 말대로 지금은 주둔군과 함부로 만나선 안 되는 게 옳다.
하지만 자신의 감각이 위험에 대비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알렉스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도시의 수비군이 모여 있는 성벽으로 올라섰다.
“잠깐! 거기 누군가! 소속을 밝히시오!”
무거운 공기 속에서 병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가운데, 장교로 보이는 인물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교단의 팔라딘들입니다.”
“팔라딘? 이곳은 군 관계자가 아니면 접근이 금지…… 엇, 혹시 교단에서 지금의 사태에 개입하기로 한 겁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단독적인 행동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크흠. 그렇소? 하면 뭘 알아보러 온 것인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대가 몰려오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성벽 위에서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알렉스의 부탁에 장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알겠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오.”
앞장서서 걷는 장교의 안내에 따라 성벽 위의 망대에 오른 알렉스와 이사벨은, 곧 저 멀리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젠장. 도대체 무슨 목적을 가진 놈들인지.”
욕설을 내뱉으며 투덜거리는 장교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알렉스는 도시를 향해 진군해 오는 병력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냥 평범한 병사들처럼 보이긴 하는데.’
아직 거리가 멀어 제대로 식별이 되진 않지만, 지금도 성벽 위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수비군의 병사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자들이다.
특이한 점을 꼽자면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
일반적인 군대라면 백인대 규모만 되어도 군사 활동을 벌일 때 부대기를 내걸고 다니는데, 저쪽은 그보다 몇 배는 큰 규모의 군대임에도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어떠한 표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정도면 수가…… 적어도 칠, 팔백은 되는 것 같군요.”
눈대중으로 수를 가늠해 본 알렉스가 입을 열자, 옆에 서 있던 수비군 장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최소로 치면 그렇소. 좀 더 접근해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어쩌면 거의 천 명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
일천의 병사.
국가 단위의 분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별것 아닌 숫자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도시 하나를 점령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병력이다.
입지가 잘 갖춰진 요새에서 상비군을 넉넉히 운영하고 있다면 천명의 군대를 막아낼 수도 있겠지만, 올리머츠는 딱히 수성에 적합한 구조를 지닌 도시도 아니었다.
“저들이 공격해 온다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후우! 어렵겠지. 교단의 팔라딘과 프리스트들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모르겠소만.”
은근한 기대감을 품은 시선에, 알렉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했다.
소속 불명의 군대가 비상식적인 군사 활동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는 중립을 표방해야 할 교단이 전쟁에 가담할 수가 없다.
교단의 무력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는 상황은 단 두 가지.
감히 교단의 의지에 대적하려 드는 존재를 척결하거나, 몬스터에게서 사람을 구제해야 하는 경우뿐이다.
“혹시 저들에게 전령을 보내지는 않았습니까?”
곁에서 듣고 있던 이사벨이 질문을 던지자, 장교는 신경질적인 몸짓을 보이며 대답했다.
“보냈지! 보낸 지 꽤 시간이 지났으나,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고 있소. 전령이 세 번은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장교의 대답에 이사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전령을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 역시 굉장히 명예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정체를 계속 감추려는 생각일까요? 저 군대의 지휘관은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요.”
장교와 이사벨이 하는 말에 알렉스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무런 말도 없이 다가오는 군대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어째 점점 커지고 있어, 다른 이들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성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알렉스는, 성벽 밑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와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세 기의 기마가 성문을 지나 바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엇? 누가 지금 함부로 성문을 개방…… 으음?”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장교가,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신분을 알아보기 쉬운 복장들이었기에, 알렉스 역시 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 교구의 사제분들이군요. 사절을 보내 저들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보겠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
“그렇소? 흐음.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면 좋겠군. 그래도 교단에서 중재해준다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겠구려.”
그렇게 말하던 장교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예상했던 어떤 상황보다도, 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
소속 불명의 군대에게 접근해 그들의 진형 안으로 들어선 사절들은, 잠시 뒤 셋이 아닌 하나의 말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성벽 위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모두가, 안장 위에 겹겹이 쌓인 목 없는 시체들을 목격하고 눈을 부릅떴다.
피로 젖어 붉게 물든 사제복이 바람에 흔들려 나풀거렸다.
“이게…… 아니……?”
머릿속이 새하얘진 수비군 장교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전쟁 중인 국가끼리도 상대측이 보낸 사신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
한데 다른 누구도 아닌 교단의 사제들이 사절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다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싸늘한 공기가 성벽 위를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알렉스는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고 생각했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올리머츠 교구는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