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1화
격전지
성기사단장을 비롯한 교구의 팔라딘들과 영주 가문 직속의 기사들 같은 고급전력들이 대거 사망한 전투.
병사들이야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 충당한다 해도 기사계층은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도시의 방위 능력에 상당히 큰 손실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 판디움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방위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흩어진 와중에 기어코 히드라의 목숨을 끊어낸 알렉스와 이사벨은, 판디움의 주민들에게 도시를 구한 영웅으로 추대받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알아보고 경의를 표하는 상황은, 기분은 좋지만 꽤 부담스럽기도 한 모습이었다.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되었군.’
도시의 위협이 제거되었으니 더는 이곳에 볼 일이 남아 있지 않다.
남들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며 우쭐대고 싶다면 더 오래 머물러도 좋겠지만, 굳이 그런 음습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시간을 더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전후 처리에 제법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었으나, 알렉스와 이사벨은 이를 기다리지 않고 판디움을 떠나기로 했다.
히드라의 사체에 대한 소유권은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은 전위팀에게 높은 배당이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공을 가리고 실질적인 분배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지루한 과정을 생략하도록, 그냥 자신들의 몫에 대한 권리를 판디움 교구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판디움 교구 측에서도 이번 사건으로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같은 교단소속으로서 그렇게라도 복구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난 충분히 얻은 게 많으니. 굳이 다른 욕심을 내고 싶지도 않고.’
알렉스는 슬쩍 자신의 상태창을 띄워보았다.
[알렉스 Lv 73]
강대한 몬스터였던 히드라는 알렉스의 레벨을 무려 4단계나 올려주는 알찬 영양분이 되어주었다.
73레벨의 성기사.
게임 유저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고 말하겠지만, 이곳의 기준으로는 인간의 한계치에 도전하는 강자의 수준이었다.
60대 레벨까지가 일반인이 노력여하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70대 레벨부터는 타고난 재능까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경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게 되는 단계라고 해야 할까?
물론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 알렉스는 그런 인간적인 고뇌를 느낄 일이 없었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70대 레벨 돌파는 내게도 의미가 크네. 드디어 두 번째 각성기를 배울 수 있었으니.’
이번에 얻은 4개의 스킬 포인트는 전부 크게 고민할 것 없이 필요한 스킬들에 투자할 수 있었다.
[신앙 Lv 10(Max)]
제일 먼저 예정한 대로 성기사로서 가장 근본적인 스킬인 신앙을 올렸다.
신앙은 신성력의 양과 질을 증가시켜주는 스킬로, 솔직히 극한까지 자신을 쥐어짜는 전투는 흔치 않기에 굳이 마스터할 필요까지 있나 싶기는 한 스킬이다.
성기사 클래스인 알렉스는 단순히 본인의 레벨만 올려도 신성력이 점점 늘어나기에, 아무리 기초가 되는 스킬이라도 신앙의 마스터는 약간 과투자라는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신앙 스킬을 올리는 것은, 알렉스가 익혀야 할 다른 스킬의 선행조건으로 마스터 레벨 신앙이 포함되기 때문.
이 부분은 성직계열 클래스라는 컨셉에 맞춰져 있는 조건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해야겠다.
‘뭐 신성력이 늘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포인트 낭비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지.’
아무튼 첫 포인트는 그렇게 제한조건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이어서 다음 포인트는 70레벨의 제한을 넘어야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각성기에 투자가 되었다.
[천상의 가호 Lv 1]
첫 번째 각성기인 디바인 크로스는 광범위 공격 기술이지만, 알렉스가 익힌 두 번째 각성기는 그와는 반대되는 성질의 기술이었다.
자신을 대상으로 한 물리 및 마법 피해량 감소, 치명타 확률 및 피해량 감소, 온갖 상태이상 내성 증가 등.
여러 가지 이로운 효과로 무장시켜주는 개인한정의 버프 스킬인 천상의 가호가, 알렉스의 선택을 받았다.
지속시간이 아주 길진 않다는 것만 빼면 단점이랄 게 없는 기술로, 굳건한 태세와 같이 사용한다면 살아서 움직이는 성벽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바퀴벌레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다 하여, 성기사를 성바퀴라 부르게 만드는 스킬이기도 했다.
‘요즘은 공격 능력을 좀 더 보강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존능력이니까.’
애초에 이제 와서 위력적인 공격 스킬을 배우기엔, 성장 방향이 다른 스킬 트리로 너무 멀리 왔다.
물론 그래도 공격 수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으니, 남은 두 개 포인트의 투자는 방어나 보조계통을 제외하기로 했다.
[소드 마스터리 Lv 9]
[격노의 응징 Lv 5(Max)]
이번에는 숙련도의 충족 기준이 채워졌는지 방해 알림이 뜨지 않았기에, 전투력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검술을 먼저 향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포인트는 무난한 공격 기술인 격노의 응징을 최대치까지 올리는 데 사용했다.
“알렉스 경! 제가 왔습니다!”
한층 성장한 자신의 능력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이사벨이 발랄한 목소리로 알렉스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분명 이전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던, 화려한 장식이 양각된 방패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만 계속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려 소속구를 떠나오다 보니, 받는 것이 늦어진 알렉스를 위한 선물이었다.
“이제 와서 팔라딘 서임을 축하한다고 말하면 너무 우습겠지요?”
“하하핫! 확실히 시기가 많이 늦기는 했네요.”
“으웃…… 이걸 준비할 때만 해도 알렉스 경이 그리 빠르게 서임식을 받게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아무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이사벨이 선물한 방패는 알렉스가 기존에 쓰던 장비와 같은 히터실드 형식으로, 무려 이사벨의 갑옷처럼 자가복구 기능이 부여된 마법물품이었다.
매번 큰 전투가 생길 때마다 방패를 부숴먹었던 알렉스에겐 아주 도움이 되는 장비라 할 수 있었다.
“마침 지금 쓰는 방패도 히드라와 싸우면서 꽤나 손상이 됐는데, 딱 좋은 타이밍에 바꿀 수 있게 되었네요.”
“혹시나 해서 문의했던 것을 마법사분들이 친절하게 들어줘서 다행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글라즈번으로 복귀할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말입니다.”
알렉스가 뜬금없이 판디움에서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던 마탑의 인원들이 이사벨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 덕분이었다.
귀족들도 쉬이 이용할 수 없다는 공간이동 마법설비를 개방하여, 작업 의뢰를 맡긴 지역의 마탑과 연계해 이곳 판디움의 마탑까지 물건을 전송할 수 있도록 연결을 해준 것이다.
토벌 작전이 실패할 뻔했던 것이 마법사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위험에서 가장 먼저 발을 빼며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보니 눈치가 보이긴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로켓 배송은 명함도 못 내밀 텔레포트 배송 덕분에 장비를 업그레이드한 알렉스는, 선물 받은 방패를 만지작거리며 기분 좋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히드라를 쓰러뜨린 싸움은 어땠는지 자세히 듣지 못했네요. 직접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 그때는 저보단 킹의 활약이 대단했지요. 이 녀석이 능력이 어찌나 엄청나던지.”
프힝~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들리자, 킹이 귀를 퍼덕이며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주행속도가 거의 무슨 날아가는 수준이었는데, 으음…… 거기를 잃고 몸이 가벼워진 덕분이려나.”
“알렉스 경? 킹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만.”
판디움에서의 마지막 볼일까지 전부 끝낸 두 사람은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그렇게 새로운 여정 길에 올라섰다.
* * *
남부 지방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올리머츠는, 내세울 만한 장점이 딱히 없는 지극히 평범한 도시였다.
굳이 특별한 점을 꼽자면 동부 지방과 가까워, 그쪽의 특산물들을 접하기가 쉽다는 정도.
다만 동부 지방은 대륙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보니, 무역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조차 영 신통치 않은 수준이었다.
‘그냥 별일 없이 쉬었다 가는 동네가 되겠군.’
그런 사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 알렉스는, 올리머츠를 그저 남부 지방 쪽의 순례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반환점으로만 생각했다.
아마 얼마 전까지의 올리머츠였다면, 알렉스의 이런 생각도 틀리지 않았을 터였다.
“정지! 신원을 밝히십시오!”
“교단의 팔라딘들이오. 신전을 방문하기 위해 들렀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해 주실 분을 모셔오겠습니다.”
“흐음?”
굳은 표정으로 검문을 시행 중인 병사들의 태도에, 알렉스는 의문을 담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이리 경계가 삼엄하지?’
기사계급만 되어도 어지간한 도시는, 영주의 특별령이 있지 않는 한 별다른 검문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데 교단의 팔라딘임을 밝혔음에도 이렇게 붙잡아두다니, 보통의 경우에선 일어나지 않을만한 상황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병사는 사제복을 입은 사내 한 사람과 동행하여 알렉스를 향해 다가왔다.
“올리머츠 교구의 주임사제 바룬이라 합니다.”
“글라즈번 교구 소속의 팔라딘 알렉스입니다.”
“실례지만 성법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바룬이라 이름을 밝힌 사제의 요구에 알렉스는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입 아프게 따지는 대신 그냥 스킬을 사용해 보였다.
[블레싱]
신성력을 많이 잡아먹지 않으면서 효과를 확인하기 쉬운 간단한 스킬을 선보이고 나자, 바룬 사제는 이제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분들의 신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군요. 제가 신전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부탁드리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기사님들.”
머리를 조아리는 병사들을 지나쳐 성문을 통과한 알렉스는, 바룬 사제에게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도시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것이…… 문제는 문제라고 해야겠습니다만…….”
바룬 사제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올리머츠는 현재 전시체제에 돌입해 있습니다.”
“예? 전시체제라 하셨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알렉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올리머츠의 영주 가문이 다른 귀족과 영지전이라도 벌인다는 소리일까?
알렉스가 자세한 내용을 물었고, 바룬 사제는 착실하게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주었다.
“위쪽의 국경지대에서 긴급 연락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관측되었다더군요. 그 때문에 도시의 경계가 강화된 상태입니다.”
“국경지대? 대규모 병력이동이요? 아니, 그럼 다른 나라의 병사들이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는 중이란 말씀이십니까?”
영주 가문끼리의 분쟁도 아니고 국가 단위의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었기에, 알렉스는 크게 당황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이사벨 역시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전쟁이라니, 무슨 그런…… 올리머츠의 국경지대 위쪽이라 하시면 동부 지방의 루미츠 왕국이나 알바니아 왕국을 뜻하는 것이겠군요. 둘 중 어느 쪽이랍니까?”
“모르겠습니다. 교구에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긴 합니다만…… 이제 막 벌어진 일이다 보니 방금 말씀드린 것 외에는 정보가 없습니다. 경계가 강화된 것도 오늘 오전부터의 일이었지요.”
그것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헛웃음을 흘리는 알렉스에게, 바론 사제는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런 소란이 일고 있다 해도 정말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겠지요. 이 나라가 외교적인 분쟁을 겪고 있단 소식은 여태껏 들은 적도 없습니다. 지금이 무슨 고대의 야만적인 시절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타국을 습격하는 행위가 벌어질 리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전쟁이란 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국가 사이의 외교적 분쟁이 심화되어 무력 충돌이 빚어질 것 같은 상황이 오면, 보통은 교단이 먼저 개입해 중재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단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양쪽에서 적당히 서로 양보를 하며 합의가 이루어지기 마련.
그 과정에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전쟁이 벌어지지만, 거기까지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그러니 교단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단위의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은, 현 대륙의 시류에서는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교단과 척을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국가가 나타난다면 또 모르겠다.
‘괜찮으려나? 당장 여길 떠나지 않으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거나…… 설마 그런 급전개가 벌어지진 않겠지?’
물론 만에 하나 정말 전쟁이 발생한다 해도, 도시 내의 신전구역은 암묵적으로 비전투 지역이 되긴 한다.
통일종교인 예루스교가 대륙 모든 국가의 국교로 공인되어 있는 마당에,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신전에서 칼부림을 하려 드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다.
최악의 상황이 된다고 해도, 알렉스와 이사벨이 전쟁에 말려들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영 찝찝하니까 오늘 밤만 쉬고 내일은 바로 떠나는 게 좋겠군.’
뭔가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기에 알렉스는 올리머츠에선 일거리를 찾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신전에 머물러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알렉스는 자신이 생각보다 거대한 사건의 중심지에 발을 들였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