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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90화 (90/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0화

히드라(6)

이사벨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작전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전투를 이어왔으니, 기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히드라 역시 꽤 많은 상처를 입고 처음보다 지친 기색을 보였지만, 체급의 차이 때문에 녀석의 작은 동작에도 급격한 움직임으로 대응해야 하는 이사벨 쪽이, 더 빠르게 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경. 이대로는 저희 쪽이 먼저…….”

뒷말은 삼켰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기에, 알렉스는 이쯤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직 멀쩡히 움직일 수 있을 때 물러나거나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승부를 보거나.

‘언제는 뭐 무리하지 않은 적이 있었냐.’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사벨 경. 승부수를 띄워봅시다.”

“알겠습니다. 다음 공격에 모든 걸 걸어보지요.”

몇 마디 더 짧게 의견을 주고받은 후.

이사벨은 디바인 익시드를 발동시키며 대지를 박찼다.

발을 구르는 힘 있는 동작에 흙먼지가 넓게 피어오른다.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초월한 근력에서 비롯된 폭발적인 추진력으로, 이사벨은 거의 날아오르다시피 한 움직임으로 히드라의 목에 접근했다.

서걱!

폴액스가 히드라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조금 더 둔탁한 소리를 기대했던 알렉스는 아쉬움에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얕았다.’

강대한 힘을 담은 폴액스가 히드라의 가죽과 근육을 갈랐지만, 안쪽의 뼈까지 닿지는 못했다.

목을 떨어뜨릴 정도의 위력을 내진 못했다는 의미.

공격에 실린 힘은 충분했으나 히드라가 재빠르게 반응하며 직격을 피한 탓이다.

녀석도 이사벨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 쉽게 당해주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히드라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이사벨이 놈의 몸체 위에 올라선다.

이사벨을 쫓아 고개를 돌린 히드라의 두 머리가, 거의 동시에 그녀를 물어뜯기 위해 쏘아져 다가왔다.

알렉스는 단단히 조이고 있던 다리를 풀고 이사벨의 등에서 내려왔다.

이사벨도 다시 중독되기까지 몇 초 정도는 더 견딜 수 있을 터.

지금은 두 사람 다 몸을 돌보지 않고, 히드라를 해치우는 데에 모든 수를 동원해야 할 때였다.

신성력이 요동치며 강렬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디바인 크로스]

히드라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언데드나 악마처럼 어둠의 속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기에, 막대한 힘을 담은 디바인 크로스의 광채는 히드라에게 가죽 겉이 약간 익을 정도의 화상을 입히는 피해밖에 주지 못한다.

알렉스가 노린 것은 디바인 크로스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빛 그 자체.

히드라의 시야를 잠깐이나마 차단하여, 이사벨에게 공격할 시간을 벌어다 주기 위함이었다.

시시싯!?

얼굴 앞에서 터져 나오는 갑작스러운 빛에, 히드라는 움찔하며 공격시도를 멈추고 머리를 뒤로 빼려 했다.

그리고 그런 히드라의 머리를 향해, 이사벨이 몸에 남은 힘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달려들었다.

빛의 폭발이 일어난 범위 안에 있던 것은 이사벨도 마찬가지지만, 알렉스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히드라보다는 시야에 혼란을 덜 겪을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이사벨이 흐릿하게 보이는 히드라의 머리를 향해 폴액스를 휘둘렀다.

“예루스시여!”

으지직!

나무를 쪼개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이번의 공격은 제대로 놈의 목뼈를 부수며 깊게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이야아아앗-!”

기합성과 함께 이사벨이 허리를 비틀며 손에 쥔 창 자루를 크게 휘두르자, 히드라의 목에 깊숙이 박혀 있던 폴액스의 날이 꽉 물린 근육을 찢어발기며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울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피분수가 솟구치며 히드라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하나!’

막 빛의 분출을 끝낸 알렉스가 성검의 손잡이를 역수로 붙잡고, 히드라의 마지막 머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실드 차지]

돌진 기술의 효과로 움직임이 가속된 알렉스는 히드라의 목에 달라붙으며, 손에 쥔 칼자루에 홀리 웨폰의 힘을 불어넣었다.

기이잉.

미세한 진동과 함께 자라난 광휘의 칼날이 히드라의 목을 파고들었다.

스에에에엑-!

히드라가 몸부림치며 알렉스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알렉스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놈에게 박아 넣은 검을 마구 흔들었다.

‘잘려라!’

검술도 뭣도 아닌 세련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히드라의 목에 난 상처를 헤집어 벌리는 데에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사벨 같은 괴력이 없는 알렉스는 아쉽게도 놈의 목을 완전히 잘라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컥! 으윽…….”

지면에 등부터 떨어진 알렉스는 속이 뒤집히는 충격에 신음을 토했지만,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현기증에 초점이 흐려지긴 했지만, 히드라의 마지막 목이 깊은 상처로 너덜너덜해진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음을 깨닫고 날카롭게 발하던 살기를 잃고 허둥거렸다.

‘됐다! 저만하면 익시드가 아니어도 이사벨이 충분히 마무리를 지을 수…….’

생각을 이어가던 알렉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베어낸 머리 근처에서 비틀거리다 무릎을 꿇는 이사벨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만, 딱 무기 한번을 휘두를 만큼만 더 버텨주면 좋을 것을.

탈진에 빠진 이사벨은 살짝 풀린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간신히 쓰러지지 않도록 허리에 힘을 주며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쪽을 향해 몸을 돌린 히드라가, 거대한 발바닥을 들어 올렸다.

히드라는 이사벨를 공격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위험을 느끼고 왔던 길로 도주하려는 듯한 눈치였다.

문제는 그녀가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점.

“피해!”

엉겁결에 외치긴 했으나 무의미한 소리일 뿐이었다.

알렉스는 이사벨을 구하고자 뛰었으나, 아무리 신속하게 움직여도 히드라의 발걸음보다 빠르게 이사벨에게 도달할 수는 없었다.

‘시발! 웃기지 마! 이제 거의 다 해냈는데!’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다면 자신이 충분히 막아줄 수 있는 것을.

이사벨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고 있는 히드라의 발길을 보며, 알렉스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쿵!

히드라의 발이 지면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부릅뜬 눈으로 모든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알렉스는, 결과를 확인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핫!”

입안에 흙모래가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렉스는 환희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버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히드라의 발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동료를 깔아뭉개기 직전.

이사벨을 향해 한줄기 금색의 섬광이 그어지며, 그녀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킹!”

주둔지를 파고드는 히드라를 보고 곧장 숲속으로 대피했던 킹은, 상황이 잠잠해지자 주인의 흔적을 뒤쫓아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다.

알렉스의 신성력을 자주 접했고, 마지막엔 성검에 찔리기까지 해서였을까?

새로운 변이를 겪으며 신성력을 몸에 품게 된 킹은, 멀리서도 자신의 주인이 품은 신성한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알렉스를 찾아내어, 기적 같은 타이밍의 조력을 펼쳐 보일 수가 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속도로 나타나 이사벨을 물고 빠져나온 킹은, 콧김을 훅하고 내뿜으며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없으니 바로 이런 꼴인가?’ 하는 표정이라 조금 얄미운 모습이었지만, 알렉스는 거만한 기색을 풍기는 킹을 몇백 번이라도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스는 한달음에 킹과 이사벨에게로 달려갔다.

“이사벨.”

“후아…… 킹이 절 구해줬군요. 꼼짝없이 당해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알렉스는 이사벨을 덥석 끌어안았다.

“읏, 알렉스 경?”

“잠깐이지만 히드라의 목을 베고 피를 뒤집어썼으니, 독기가 다시 스며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요.”

당황하여 눈을 굴리며 꼼지락대던 이사벨은, 이내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치료를 받아들였다.

백염을 두르고 잠시 이사벨을 안고 있던 알렉스는, 푸르륵거리는 투레질 소리에 킹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하자, 킹이 ‘이대로 끝낼 셈은 아니지?’ 하는 느낌으로 어느 한쪽을 향해 고갯짓을 한다.

히드라가 달아난 방향이었다.

“쫓아가자는 거냐? 하지만…….”

알렉스는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로 보이는 이사벨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무방비한 상태로 혼자 둘 수는 없다고 여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별문제는 없을 것도 같았다.

최강의 포식자인 히드라가 날뛴 탓에 인근 숲의 몬스터나 짐승들은 모조리 겁에 질려 숨었을 테니, 당분간은 이 주변에서 위험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저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요.”

“이사벨 경은 충분히 활약해 주셨습니다. 제 역량이 부족해 남은 머리 하나를 처리하지 못했을 뿐이죠.”

알렉스는 히드라가 남긴 발자취들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자라면 경험치가 아깝긴 해도 무리하게 따라가려 들지 않겠으나, 킹의 합류로 사정은 또 달라졌다.

‘막타만 딱 남은 녀석이라 해도 혼자서는 위험하겠지만, 킹을 타고 싸운다면…….’

기사는 전투마와 함께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다.

하지만 히드라 같은 초대형급의 몬스터에겐 평범한 말을 타고 하는 기마돌격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난 킹의 능력이라면 어떨까?

사실 킹이 신수 같은 생김새로 변화한 뒤로, 아직 전투마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 끝을 시험해본 적이 없었다.

‘아까 전의 모습을 봐서는 기동력은 내 예상보다 더 뛰어난 듯한데. 마치 익시드 상태의 이사벨처럼 폭발적인 움직임이었지.’

대단한 재생능력을 갖춘 킹이고 몸을 붙이고 있어 정화의 불꽃에도 영향을 받을 테니, 히드라의 독도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생각보다 강한 시너지가 나와 줄지도 모르겠다.

히드라를 쫓아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알렉스는,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계십시오. 끝을 내고 오겠습니다.”

“따르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아쉽군요. 알렉스 경이라면 반드시 놈을 쓰러뜨리고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킹의 등위에 올라탔다.

“좋아. 킹, 너만 믿는다.”

히히히힝-!

안장에 앉아 등자에 다리를 넣기 무섭게, 킹이 긴 울음소리를 내뱉고는 엄청난 속도로 대지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체감상 일반적인 전투마들보다 배 이상 빠른 것 같은 속도였다.

‘으아!?’

훅 쏠리는 풍압에 하마터면 낙마할 뻔한 알렉스는,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고 식은땀을 흘렸다.

‘킹의 능력이 이 정도였나? 평상시엔 이사벨과 같이 속도를 맞추느라 전혀 몰랐었네.’

말과 평생을 함께하는 기사 직군의 평균은 되는 기마술을 가진 알렉스였지만, 킹이 힘을 한껏 드러내자 호흡을 맞추기는커녕 짐짝처럼 간신히 매달려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킹의 능력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이대로는 제대로 된 마상전투를 벌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렇다고 히드라 같은 강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힘을 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알렉스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스킬창을 띄웠다.

찝찝한 레벨 업을 경험했기에 잠시 마음 한편에 묻어두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으니 이제는 포인트를 사용해야 한다.

[라이딩 Lv 3(Max)]

원래 69레벨의 포인트는 신앙 스킬을 마스터하는 데에 쓸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이러니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어차피 히드라를 잡으면 레벨 두 개쯤은 올라주겠지.’

3레벨로 마스터되는 라이딩 스킬.

기마술과 관련된 행위에 보정을 주는 스킬을 마스터하자, 알렉스의 몸에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 깃들었다.

라이딩 1레벨이 경험자 수준의 기마술을 2레벨이 전문가 수준의 기마술을 부여했었다면, 마스터 레벨의 라이딩은 알렉스를 인마일체의 영역에 들어서는 달인의 경지로 끌어올려 주었다.

‘킹의 호흡과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전부 느껴진다. 마치 내가 직접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일체감이야.’

프륵?

방금까지도 굉장한 속도였지만 알렉스가 한 몸이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자, 킹은 한층 더 속력을 내며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괴물 같은 신체능력을 지닌 킹과 알렉스의 마스터 레벨 라이딩이 합쳐지니, 효과는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잠시 뒤, 알렉스는 저 앞에서 땅을 울리며 이동하고 있는 히드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속도가 이러니 금세 따라잡았군.’

알렉스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어떻게 싸울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달리고, 벤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달리던 킹이 공중을 향해 뛰어올랐다.

금색의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비록 날개가 달려 있진 않았으나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신수 페가수스를 목격했다고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것인지 킹의 것인지 혹은 둘이 합쳐지며 한 단계 진보한 감각인지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그 어떤 계산도 없이 막연히 가능하다는 느낌에 몸을 맡기며 관능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이익.

이윽고 발굽 다 닳아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길게 미끄러지며, 지면에 내려선 킹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지만,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을 감상했다.

잘려나간 히드라의 마지막 머리가,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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