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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89화 (89/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9화

히드라(5)

“이잇…….”

이사벨의 등에서 내려와 히드라의 뒤를 쫓던 알렉스는, 뿌드득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세게 악물었다.

전투가 허무하게 끝나지 않은 것은 환영하는 바이지만, 방위군의 병력들이 학살당하는 상황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멈춰라! 사악한 괴물아!”

“신이시여!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소서!”

주둔지에 남아 있던 기사전력들이 히드라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위팀의 기사들에게 크게 데인 경험이 있던 히드라는 그와 비슷한 차림새의 인간들이 다가오자, 육탄전을 벌이는 대신 자신의 몸 주위로 독액을 뿜어대며 기사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모든 지원 수단을 집중 받은 전위팀과 달리 독에 대한 보호 수단이 없던 다른 기사들은,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강렬한 독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낼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용맹함을 보인 기사들이 주변에 형성된 독 지대를 돌파하여 놈에게 달라붙었으나, 칼질 몇 번을 해보기 무섭게 중독되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무, 무리야. 저런 걸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마법사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후퇴해야 해! 작전은 실패했다!”

히드라보다 늦게 주둔지에 도착한 알렉스는, 압도적인 폭력에 의해 사라져가는 아군들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마법사들이 뭔가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하지만 주둔지 안에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음에도, 그들은 뭔가 대응해 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느껴지던 마력의 흐름조차 사라지고 잠잠한 것을 봐서는, 오히려 벌써 손을 놓고 남들보다 빠르게 후퇴해 버린 듯싶었다.

‘이런 엿 같은 주문쟁이 놈들이?’

마법사들이 분명 유용한 전력임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어째 그들과 엮여서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알렉스는 욕설을 잔뜩 중얼거리며 다시 주둔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병력들은 지휘체계도 무너진 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은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거나 히드라의 거체에 깔려 육포처럼 변해 버렸지만, 그나마 주둔지 후방에 있던 소수의 인원들은 히드라를 피해 주둔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전투마들은 거의 다 자신의 주인인 기사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으나, 공성병기 및 여러 물자들을 옮기느라 동원된 짐말들이 남아 있었기에 그걸 타고 빠져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안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울타리를 찾아 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위군이 떠나온 도시, 판디움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도시 쪽으로 도망치는 건 놈에게 길 안내를 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꼴인데.’

생존자를 태우고 달아나는 짐말들은 대체로 싸구려 품종이기에, 히드라가 전력으로 달린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만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살육을 즐긴 히드라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도주하는 생존자들을 뒤쫓았다.

녀석은 더는 인간들에게 자신을 위협할만한 특별한 개체나 무기가 없다고 판단했고, 본능적으로 생존자들의 뒤를 쫓으면 더욱 많은 사냥감들이 나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알렉스 경! 저것을 도시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생존자들을 쫓아 멀어져가는 히드라의 뒷모습을 보며 도시의 주민들을 떠올린 이사벨이, 알렉스를 돌아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맞는 말이다.

이미 이곳에서 꺼진 생명의 수만 해도 세 자릿수를 가뿐히 넘어갔지만, 놈이 판디움에 도달하게 되면 피해는 그보다 수십 배로 더 폭증될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놈을 막는단 말인가?

‘사실상 우리만으로는 뭘 시도한다 해도 가능성이 희박하잖아.’

“쫓아가야 합니다! 남겨진 말이 있는지 찾아봅시다!”

어떻게든 히드라를 따라가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인지, 이사벨은 답을 고민하는 알렉스를 남겨두고 말을 찾아 움직였다.

다리로 뛰어서는 히드라를 따라잡을 수 없을 테니, 두 사람을 태울 말이 한 마리라도 필요하긴 했다.

‘킹은…… 자리를 피한 건가? 쉽게 죽을 놈은 아니긴 하지.’

두 사람을 태우고도 거뜬하게 다른 말보다 빠른 주행을 할 수 있는 킹이라면, 금세 히드라의 속도를 따라잡을 터인데.

전위팀의 임무 때문에 주둔지에 대기시켜 뒀던 킹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질 않았다.

지능과 신체능력이 뛰어난 녀석이니 아마 히드라가 주둔지에 침입하자 곧바로 대피한 모양이다.

‘주인을 두고 혼자 도망갈 놈은 아니니 금방 돌아오긴 할 텐데.’

“아레에스, 겨, 겨엉…….”

주변을 둘러보는 알렉스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성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기사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판디움 교구의 성기사단장이었다.

안색이 거뭇거뭇하게 변한 채 피를 토하고 있는 성기사단장은, 히드라의 독기에 중독되어 몸 전체가 괴사해가고 있었다.

기사 특유의 강건하게 단련된 육신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심각한 상태.

“이런…….”

황급히 다가간 알렉스가 그를 안아 일으켜 세우려했으나, 격한 기침을 한 성기사단장은 알렉스를 밀어내며 만류했다.

“그만 두시게. 나는 이미 트, 틀렸네.”

정화의 불꽃과 치유의 손길로 그를 도우려 했으나 이미 깊게 중독되어 무너지기 시작한 성기사단장의 육체는, 침투한 독기를 해소한다고 회복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를 살리려면 적어도 치유에 특화된 주교급의 고위사제가 필요할 터.

알렉스가 가진 스킬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사제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교구의 단장을 이렇게 두고…….”

“작전 시작과 도, 동시에, 마법사들과 함, 쿨럭! 주둔지에서, 벗어나 이, 있었네.”

마법사들은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는 듯하자 바로 꽁무니를 뺀 듯한데, 그들과 함께 있던 사제들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대로 몸을 피한 모양이다.

주둔지가 한순간에 털리는 상황에서 가세해봐야 시체만 늘어났을 테니, 사제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괴로워하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도움이 필요할 때 곁에 없는 아군들에 대한 원망이 마음을 짓누른다.

‘망할…… 사제들이 여기 있었다면 몇 사람 정도는 살릴 수 있을 것을.’

중독되어 쓰러져 있는 것은 성기사단장뿐이 아니다.

히드라를 막아보고자 달려들었던 방위군의 기사들 여러 사람이, 아직 숨이 붙은 채 여기저기 늘어져 핏물과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일반 병사들과 다른 강인함을 지닌 기사들은, 쉬이 죽지도 못하고 검게 죽은 피를 뱉어내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알레엑, 스으 겨엉…… 이제 그만 이 고, 고통을 끝내주시…….”

힘겹게 말해오는 성기사단장의 부탁에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독기를 제거하고 손상된 신체를 치료할 수단이 없는 이상, 이들은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전장에서 회복이 어려운 중상자가 스스로 요구를 해온다면, 더 고통 받지 않도록 안락사를 돕는 것도 동료의 품위를 지켜주는 일이다.

“부디, 그분의 푸, 품으로…….”

“알겠습니다. 형제여, 뒷일은 맡기고 쉬십시오.”

“가, 감사, 판디움, 부탁…….”

알렉스는 마음속으로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기도문을 더듬더듬 외우며, 알페리온을 뽑아 부탁받은 대로 성기사단장의 고통을 덜어내 주었다.

‘후우-’

무거워진 기분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일어난 알렉스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신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성기사단장은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육신이 스스로 독기에 저항하며 버티고 있을 뿐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가 거의 없었다.

회생이 가능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알렉스는 무의미한 고통에 잡아먹히고 있는 그들에게 안식을 내려주었다.

지옥이 도래한 것 같은 풍경 속에서, 더 이상 자신 외에 살아 숨 쉬는 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렉스 Lv 69]

알렉스는 하나의 알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떠오르는 알림에 절로 냉소를 흘렸다.

‘기사들의 가치가 어지간한 몬스터들보단 경험치를 더 잘 쳐줄 만한 정도인가 보군. 염병할…….’

자신의 성장을 증명해 주는 레벨 업 알림은 언제나 마주할 때마다 반가웠었지만, 아군의 목숨값으로 경험치를 올린 지금의 순간은 혐오감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알렉스 경! 말을 찾아왔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자니, 이사벨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벨이 데려온 말은 운이 좋게도 마구를 전부 착용하고 있는 군마였다.

난리 통에 주인을 잃고 달아나, 주둔지 근처를 서성거리던 놈을 이사벨이 찾아낸 것이다.

다만 덩치 큰 군마이긴 해도 품종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아, 과연 무장한 기사 둘을 태우고 전력으로 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앗…… 알렉스 경?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능숙한 기마술로 알렉스의 앞에 선 이사벨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어서 갑시다.”

아군의 목숨을 끊어준 유쾌하지 못한 감각이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해 영 거슬렸지만, 알렉스는 불편한 기색을 억누르고 이사벨의 뒤에 올라탔다.

2레벨의 라이딩 스킬을 보유해 기사라는 이름에 부족하지 않은 기마술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말을 다루는 실력은 이사벨 쪽이 조금 더 낫기에 그녀에게 고삐를 맡겼다.

무게가 부담스러웠는지 말은 투레질을 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두 사람을 태우고 힘차게 대지를 달려 나갔다.

“이럇!”

히드라를 따라잡으려면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기에, 이사벨은 끊임없이 박차를 가하며 녀석을 몰아붙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히드라가 지나간 길이 곧 대로가 되었기에, 말을 전력으로 달리도록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렵진 않았다.

혹독한 주행 끝에 군마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되었을 무렵.

두 사람은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판디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히드라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독기에 중독되어 한순간이라도 반응이 늦어지면 그대로 즉사할 수 있기에, 알렉스는 곧장 이사벨의 등에 바짝 매달렸다.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히드라의 머리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이사벨은 달리는 말의 등을 발판 삼아 뛰어오르는 묘기를 선보였다.

무리한 주행으로 지쳐 있던 군마는 이사벨이 가하는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다리가 부러지며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말에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이사벨은 히드라의 등 위에 폴액스를 박아 넣으며 올라탈 수 있었다.

샤아아아악-!

분노의 포효와 함께 히드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징그럽게도 유독 자신을 끝까지 괴롭혔던 인간을 알아본 히드라는, 깊은 증오와 약간의 두려움을 같이 드러내며 살기를 뿜어냈다.

이사벨은 놈의 척추 위를 내달리며 목을 향해 다가가 무기를 휘둘렀다.

이미 이사벨의 공격력을 몸으로 체험해본 히드라는 방심하지 않고, 재빨리 꼬리를 휘둘러 이사벨을 몸에서 떨어뜨리려 했다.

부아앙!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꼬리를 피해 이사벨은 히드라의 등을 박차며 놈의 머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아앗!?”

허공에 몸을 띄운 이사벨이 새된 목소리를 내뱉으며 당황했다.

히드라가 휘두른 꼬리가 교묘하게도 스스로의 목을 축으로 삼아 걸치며,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이사벨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날뛰기만 하는 줄 알았던 녀석이 낸 꾀에, 공중에서 방향을 바꿀 수단이 없는 이사벨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돌려!”

뒤에 매달려 있던 알렉스에 외침에 이사벨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무시무시한 충격이 이사벨의 등을 강타했다.

[굳건한 태세]

“크윽…….”

다행스럽게도 히드라의 꼬리는 이사벨의 몸에 닿지 않고 알렉스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물리법칙을 농락하며 힘의 작용을 대부분 흘려내 버리는 스킬의 효능으로 인해, 이사벨은 별다른 피해 없이 바닥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알렉스가 통증에 살짝 신음하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쉬시시싯!

나름 머리를 굴려 낸 수가 막히자, 히드라는 비늘을 떨어대며 불쾌한 감정을 표현했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니 침착하게 공략합시다.”

“옛! 제가 조금 조바심을 냈습니다.”

시간이 이쪽의 편인 것은 아니지만 급하게 몰아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어떻게든 기회를 기다렸다가 녀석의 머리 하나를 잘라내고, 곧바로 익시드를 발동해 나머지 머리까지 단숨에 베어내야만 했다.

알렉스의 말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이사벨은 신중한 태도로 히드라의 주변을 맴돌았다.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두 사람은 초조함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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